맥베스에서 발견하는 불안과 가능성, 두려움과 매혹
맥베스는 세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제임스 왕 앞에 공연되었고 Gunpowder Plot 인유를 통해 왕에 대한 충성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지요. 내용상으로도 뱅쿠오를 왕 살해의 악행에 동참하지 않고 악을 경고하는 지혜로운 인물로 묘사하는데 뱅쿠오의 후손인 제임스 1세의 왕권을 옹호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홀린셰드의 연대기에 기록된 실제 뱅쿠오가 맥베스와 공모하여 왕권 찬탈에 일조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모습입니다. 재미난 건 영국 내란 당시 세익스피어 공연이 완전 중단된다는 건데 즉 찰스 1세와 의회와의 전쟁이 시작된 1642년부터 청교도 의회파가 권력을 장악하다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복귀하기 전까지요. 이후 찰스 2세가 프랑스에서 돌아오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세익스피어 연극 중 가장 활발히 공연된 게 맥베스였습니다. 왕권의 절대성이 맥베스와 같은 악인에 의해 시험을 당하지만 결국 정통 후계자에 의해 회복된다는 정치적 비전을 구현하기에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최고의 수단이었지요.
당신은 맥베스를 잔혹극, 심리극, 인간극장식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보수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Political Manafesto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보셨지요. 당시 영국은 왕정, 공화정, 민주정 곧 정치 시스템을 두고 이미 격렬한 정치투쟁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혁명 혹은 의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보다 근 150년 앞서 왕의 머리를 잘랐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역사에서 왕(=아버지)을 dehead 해 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개인의 정신분석까지도 포함 집단의식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왕(=아버지)에 대한 가장 격렬한 부정의 경험은 그 집단 혹은 개인의 성장 혹은 형성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대 밖의 상황(1606년 제임스 1세의 처남인 덴마크 국왕 크리스천 4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궁정에서 초연되었고 제임스 1세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미장센이 구사된 점 ) 등으로 <맥베스>를 국왕 시해와 왕권 찬탈이 부른 국가적 무질서와 찬탈자의 파멸을 다루어 왕권의 신성과 정통성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옹호한 극으로 편협하게 해석하는 관점을 우려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존재를 드러냅니다. 특히 세익스피어는 그의 아버지 존 세익스피어가 로마 가톨릭 지지자이고 왕당파였으며 윌리엄도 그러하였다는 약간의 외적 정보를 제외하고는, 작품을 통해 구현되는 것으로는 매우 모호하고 헷갈리며 다중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애초에 <맥베스>가 왕 앞에서 정치적 언설로 기획 공연되었다고 해도 세익스피어는 교묘하고,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재능과 열정이 흘러나오는 작가이지요. 그래서 맥베스에는 단순한 제임스 1세 만세로 귀결되지 않는 다양한 메시지가 변화의 에너지가 격렬하게 꿈틀거리던 시대상과 결합되면서 생명을 갖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세익스피어의 극은 언제나 사회극이라는 겁니다. 희랍극 같은 운명 비극이 아니고, 성격적 심리적 결함에 의해 비극이 연원하는 성격비극도 아닙니다. 세익스피어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 인물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중요한 동력장치입니다. <베니스의 상인>은 나치에 의해 반유대주의의 전형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실제 작품을 꼼꼼히 분석해 보면 주류 기독교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차별받은 외국인이자 유대인인 샤일록의 분투기로 읽힙니다. <햄릿>은 우유부단한 햄릿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성격비극인 것처럼 보이지만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 찬 덴마크 사회의 부패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어떻게 하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지를 알지 못해 고민과 갈등을 겪는 햄릿의 비극적 통찰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리어왕>에도 리어와 딸 세대의 사회적 가치관의 충돌에서 봉건적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대립을 볼 수 있습니다.
<맥베스>도 세익스피어 당대 사회 현실의 복합적 측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왕정, 공화정, 민주정 등의 정치 시스템을 두고 이미 격렬한 정치투쟁이 싹트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고,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해외 무역에 기초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사고가 기존의 계급 질서나 도덕에 대한 회의와 함께 개인의 성공과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사고를 필연적으로 촉발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시대의 복합적 측면 속에 창조된 캐릭터가 맥베스이며, 맥베스는 이러한 양면성과 격렬한 투쟁성을 내부에 함께 지닌 인물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뱅코우나 맥더프는 단선적으로 그리며 서술의 비중을 그리 할애하지 않습니다. 작품 전체가 맥베스의 던컨 왕 시해와 그 이후의 불안과 내적 균열, 그리고 비극적 파멸의 과정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단순히 마녀의 꼬드김에 의해 움직이는 악마의 하수인이라기보다는 악을 행하면서도 내적 갈등과 고통을 겪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는 과정에서 맥베스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통찰과 영웅적인 측면은 기존 질서에 대한 순응보다는 오히려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거지요. 그를 지켜보는 관객이 맥베스의 행위가 부인할 수 없는 악행임을 인정하면서도 모호하고 이중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 거라는 겁니다.
늘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는 세익스피어 극에 나타난 내면의 불안입니다. 요즘 세익스피어를 다시 읽으며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불면과 망상에 시달리며 광증을 자처하기도 하는 햄릿이 쉬어라 쉬어라 심란한 혼령이여! 를 쉼 없이 반복하는 것.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모든 질문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로 수렴되는 것. 더 모질었던 레이디 맥베스의 분열증이나 혼돈의 시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령에게 외치는 <햄릿>의 첫 대사가 Who's there?로 시작한다는 것도 유의미해 보입니다. 불확실하고 혼돈스러운 시대에 대한 불안도 있고 자신 혹은 자기 계급이 그것을 감당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불안도 드리워져 있는 듯도 하고요. 사실 불안은 복수극의 기본 전제 조건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치환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텍스트 전체에 포진해 있는 불안의 코드들은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네요. 메시지의 복합성과 맥베스라는 캐릭터의 양면성은 여러 함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캐릭터의 양면성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팽창 속에서 새로이 부상하는 근대 부르주아 계급의 내면적 불안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은 새록새록 고민해 볼 대목입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었고요. 근대의 얼굴이 불안이라는 것은 계속 탐구해보고 싶은 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