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지키지 말라고 있는거잖아요?
나는 '큰 일'에 있어서는 즉흥적인 법이 없다. 반대로 '작은 일'에는 꽤나 즉흥적인 편이다.
예를들어 '여행을 가는 일'은 꽤나 신중한 고민과 계획 끝에 결정이 되고, 여행 계획도 철저히 세우는 편이지만 정작 가서 '여기 말고 저기 갈까?'라는 생각이 들면 즉흥적으로 계획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작은 일이라고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너무 불안하니까.
계획 빌런 답게 나의 하루 역시 계획과 함께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다이어리를 열고 오늘 뭘 해야하는지, 어떻게 시간을 쓸지 고민고민하며 적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부터, 꼭은 아니지만 하면 좋은 일까지. 물론 하루 계획은 나에게 비교적 '작은 일'이라 즉흥적으로 바뀌는 일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런 내가 퇴사하고 그 이후에 어떻게 살지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최소 올 해 계획은 있다.
근데 이전에 브런치에 올린 글에서도 말 했듯, '어차피 계획대로 다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미 코로나 때문에 내 계획이 반은 틀어졌는걸.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니까.
퇴사라는 큰 일을 결정하면서 계획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 계획에 너무 얽매이지 않을 생각이다.
방향만 잃지 말자. 여전히 그것이 나의 제 1 계획이다.
그래도 퇴사 후 1달의 계획은 꽤나 명확했다.
바로 "제주 한 달 살기". 퇴사를 결정하고 몇 개월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계획이었다.
여러모로 좋은 시기였다. 4월이고, 봄이고, 날씨가 좋고, 그냥 모든 게 다 좋고, 무엇보다 나는 자유니까. 그놈의 의무와 책임감에 눌려있던 나를 망나니처럼 풀어봐놓고도 싶었고(그랬을 때 내가 과연 망나니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도 궁금하다) , 정말 글쓰고 사는 일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만 써보고도 싶었다.
제주도는 섬이니까. 게다가 예쁜 섬이니까.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제주도에 가면 내 인생의 거대한 무언가를 만날 수 있을거라는 환상같은 건 없다. 그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공간일 뿐.
제주에 가서 가장 큰 목표는 '나 홀로임을 마음껏 즐기기'였고 두번째 목표는 '쓰고 있는 대본 완성하기'였다.
한 달을 살아보고 너무 좋으면 조금 더 살다 올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퇴사를 보름 앞 둔 지금, 계획이 불가피하게 바뀌었다.
내 퇴사 후 1달의 계획은, 제주가 아닌 "청주 한 달 살기"가 되어버렸다.
내가 엄마 앞에서 속상한 내색은 차마 못했는데, 결정하고 나서 진짜 너무 속상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정말 싫지만, 성인이 된 이후 햇수로 8년간 내 모든 삶의 기반이 거기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냥 편하고 싶다면 서울에 있는게 맞다.
그렇다고 청주가 내가 선택한 제주처럼 자유롭고, 외로울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거기엔 엄마와 아빠가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고, 고양이도 있다. 나는 청주를 너무 사랑하고, 청주에서 사는 거 좋은데, 그게 왜 하필 또 퇴사 직후가 되어야 했을까. 지금 당분간은 정말 내 맘대로 살고싶은데 말이지.
어쩔 수 없다. 유자가 아프니까.
하필이면 아빠도 4월부터 장기교육으로 주중에는 지방에 내려가 계셔야 하고, 유자는 투병중이라 사람 손이 필요하다. 밥도 신경써서 먹이지 않으면 잘 먹질 않고, 약은 절대절대 엄마 혼자 못 먹인다. 그러니 옵션은 단 하나. 퇴사하고 굳이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는 내가 청주로 내려가는 수 밖에.
당연한 선택이긴 했는데, 몇 개월동안 그려 온 계획이 미뤄지니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계획을 새로 짜는 중이다. 청주에서 한 달동안 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모르겠어...) 역시나 계획없이 한 달살기를 할 수는 없으니 급하게나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단 글을 신나게 쓰려면 집 말고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 집 근처 맘에 드는 카페도 찾아놨다.
(육묘는 육아에 버금가는 집중 방해 요소다)
문제는 운동인데, 폴댄스 학원이 청주에는 딱 하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단 상담받으러 가려고 날짜도 잡아놨다. 여차하면 주말마다 서울 올라가서 폴댄스 할 수도 있다.
운동을 잠깐 쉬다가는 한 달 살기 전에 내가 미칠 수도 있어서 안돼 안돼.
그리고 춤도 다시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댄스학원도 문의했지.
엄마가 너 춤추려고 퇴사하나며 웃었다. 그러게. 나 약간 가만히 못 있는 스타일인가봐.
아니면 중이병이 도지는건가. 자유가 생겼을 때 머릿속에 하고싶은걸로 떠오르는게 이런것들 뿐이네.
물론 책도 많이 읽을거고, 글을 열심히 쓰는게 1번이다. 넷플릭스랑도 엄청엄청 친해져야지. 다 볼거야.
이것들만 하려고 해도 내 일주일 생활계획표가 꽉꽉 찬다.
하고 싶은 것만 하기에도 하루하루가 모자라구나.
새삼 다시 느끼는 요즘.
새로 그려 놓은 계획표도 과연 얼마나 지켜질지 모르겠다.
'여유로운 제주 한 달 살기'에서 갑자기 '빠듯하게 춤추고 글쓰며 청주에서 한달살기'가 되었는데 이 또한 내가 잘 이용하면 의미있는 시간이 되겠지.
방향만 잃지 말자. 오늘도 조그맣게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