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콤플렉스>
어린 시절, 말 안 듣던 나에게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표정과 말투로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온대"라는 말씀을 줄곧 하시곤 했다. 저 당시의 나는 망태 할아버지가 귀신과 도깨비보다도 무서웠다. 길을 걷다 모르는 할아버지를 마주치면 괜히 할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때로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땅만 보고 걷거나, 착한 아이처럼 비치기 위해 할머니에게 더 사근히 대했다. 그러면 이름 모를 할아버지는 그런 내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지나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착한 모습이 나를 지켜냈다고 생각했다.
질풍노도의 10대가 됐다. 이제는 망태 할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할 줄 아는 소녀가 됐다. 망태 할아버지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는 고학년 선배들로 바뀌었다. 어른들의 훈계보다도, 선배들의 "스키니진 입지 마라, 크로스백 메지 마라" 같은 유치한 법칙이 더욱 헌법처럼 와닿았다. 고작 한 두살 차이 나는 같은 소년 소녀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 공포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선배들을 발견하면 한참을 삥 돌아서 집에 가곤 했다. 고작 12살의 나이였다.
겨울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파마를 했다. 꼬불거리는 헤어 스타일은 참신한 기분을 주었다. 며칠 후, 평소에 선배들에게 '선배 자격'을 운운하며 결코 지배성에 꺾이지 않던 내 친구가, 파마를 했단 이유로 고학년생에게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친구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을 신고했다. 나는 그 순간, 맞은 대상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선배들에게 내 정체성을 뒤로하고 착한 모습으로 비췄던 과거의 나 자신에 감사했다. 이번에도 나의 '착함'이 그들에게서 나를 지켜냈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었던 파마머리를 미용실로 달려가 당장 생머리로 바꿨다. 왠지 모르게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용감하지 못한 어린애에게 조용히 비겁하다고 속삭였다.
선함을 타인에게 반사하는 게 아닌, 무조건 비침으로써 자신을 지켜냈던 그 어린아이는 청년이 됐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뿌리 잡힌 자기방어의 방식은 쉽게 뽑히지 않았다. 억울해도, 배제당해도, 무조건 웃어 보였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알아줄 것 같았다. 같은 구성원으로서 대해줄 것만 같았다. 그런 내가 미련하다는 듯, 그들은 나를 집단에서 더욱 분리했고, 그 현상은 타 부서 사람들이 보기에도 염려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혹여라도 내 표정에 작은 찌푸림이라도 있을까, 그게 나를 더욱 고립으로 몰고 갈까, 광대가 떨리도록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마음은 넘칠 정도로 울고 있었다.
이후 나의 후임으로 새로운 신입직원이 입사했고, 내가 겪은 아픔을 그녀는 한 조각이라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최선을 다해 잘해줬다. 그러면서도 구성원들이 나와 어울리는 후임을 같이 배제할까 봐, 때로는 존재를 조용히 지우기도 했다. 살아가는 감각보다 죽어감을 인지하게 된 순간 퇴사를 결심했고, 구성원을 제외한 많은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그들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어떻게 나를 지켜줄 수 있었을까. 후임은 내게 선물과 편지를 주며, 선배 덕에 적응할 수 있었고 잘 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 미련하다고 여기며 외면했던 직장에서의 나를 처음으로 품었던 순간이었다.
그 시기의 고통과 아픔은 현재 시간선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제는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아닌, 고마움으로 남았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그때의 나 자신을 통합하고 보듬어주는 연습을 해야 했다. 아직도 내 안에는 입 안을 허물어질 정도로 깨물어대며 컴퓨터 앞에서 눈물을 참던 젊은이가 살아있다. 바보 같다고 비난하고, 왜 다른 사람들처럼 본인을 지킬 수 없냐며 질책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 좌표의 내가 아니었다면 현재의 나는 '내가 겪은 아픔을 타자가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과 '착함은 '모습'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대상을 통해 느껴지는 파장대로 오롯이 비춰주면 되는 거였다. 모두를 판단하지 않고 인지하되, 내게 전달되는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그대로 반사해 주는 것. 그 과정에서 내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그에 맞는 파장을 대상에게 비추면 되는 거였다. 내가 현재 어떤 감정인지,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돌아보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착한 모습만을 비췄다. 그건 착함이 아니라 '형태'일 뿐이었다. 진정한 선은 서로가 서로를 거짓 없이 비출 때,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에너지라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는다. 그리고 나를 지킨다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닌,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용기임을 지금은 안다.
단지 스스로를 두려움에서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그 방식이 파괴적이거나 날카로운 방식이 아닌, 융화된 방식이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 에너지 덕분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제는 형태가 아닌, 마음으로 선함을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진정 그 마음을 느꼈을 때, 그 빛을 반사하여 내뿜었으면 좋겠다. 진짜 '착한 아이'란, 누군가에게 빛이 되기 전에, 내 안의 그림자까지도 정직하게 비춰볼 수 있는 용기였음을. 이 글을 과거의 나, 그리고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