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깨물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위인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위인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본디 '위인(偉人)' 이라는 말이 '성품이 훌륭하거나 행적이 남달리 뛰어나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나무위키백과)' 라고 하는데, 어느 사전에도 그 위인이 될 자격에 대한 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위인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존경을 받음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인의 자격은 갖추었으나, 내가 정말 위인이 되었을까? 라는 물음에는... 나 자신에게 실망스럽고, 어이없을 정도로 미안하다. 아무리 위인전을 즐겨 읽던 꼬맹이가 아닐지라도 이제 중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위인이 되고 싶고, 되길 바라는 내 자신이 우습기도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영웅놀이 좋아하는 존재라 그런지, 위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꾸준하다.
그래서 맡기고 떠난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나름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도 살뜰히 돌보고, 사춘기 반항도 제대로 해본적 없이 어머니의 빈자리를 오롯이 느끼며 버텨나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버티기 힘드셨나보다. 불과 1년 반만에 아버지는 재혼을 결심하셨다.
이쯤 되면, 위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격. 하나 더 추가 되는 것 아닌가? 새어머니 슬하에서 온갖 구박 속에 버티며 자라셨던 수많은 영웅들... 나도 정말 그렇게 커 갈 수 있었을까?
새어머니는 딸을 하나 데리고 왔다. 우리와 성이 다르나 동생이 된 아이. 처음부터 낯설었지만, 그렇다고 티냈다가는 가뜩이나 불행한 집안에 웃음꼬리 하나 지우는 일이기에 무던히도 그 아이와 살가와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참 우스운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안해도, 내 여동생이 그렇게 안해도, 그 아이는 그냥 사랑받았다. 이뻐서도 잘해서도 아닌, 새아빠에게는 새마누라의 금지옥엽이었고, 새어머니에게는 여전한 삶의 이유이자 목표였으며, 피한방울 안섞인 남매들로부터 지켜야 하는 대상이자, 그 남매들에게도 함부로 할 수없던 새어머니의 귀한 혈육이었기에 그냥 존재만으로도 우리 남매와는 차별되고 선택된 자였다.
부러웠다. 몹시도 부러웠고, 미안했다. 내 여동생에게.
여전히 나와 여동생은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는데, 항상 어딜 가든 자기 딸은 데려가고 우리는 그냥 집에 있었다. 때로는 나도, 어쩌면 내 동생도 따라 가고 싶었음에도, 우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 따라나서는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말을 꺼냈다가 거절받는 일이 더 두려워서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새어머니가 생기고, 가족이 생겼지만, 오히려 우리 남매는 더 고립되고 외로웠다. 재혼하고 생전 살아보지도 도시이름도 생소한 곳으로 이사까지 갔기 때문에, 친구도 아는 사람도, 오히려 친가보다 살갑던 외갓집 식구들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내 동생은 더 서럽고 힘들었다. 아무도 학교와 집에만 있는 나와 내 동생에게 손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한창 예민한 나이지만 바보는 아니었기에 학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수도 있었고, 우리 아버지에게 유일한 재혼의 조건(지금 생각해보면 허울좋은 이유였지만)이었던 교회 나가는 것 때문에, 교회 선후배도 사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학교는 여전한 텃세(요즘에는 이걸 학폭이라고 하더라)가 심했고, 교회는 재혼가정에 대한 불쌍한 눈초리가 여전했기에 솔직히 별로였다. 게다가 내 동생은 아직 국민학생이자 이제 사춘기로 접어들 나이였기 때문에, 사실 나보다 더 예민했다. 그냥 의무적으로 나가야 하는 것에만 나가고, 집에만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새어머니가 생겨 좋은 건 사실 아침에 도시락을 직접 안싸도 되는 것. 그 외에는 별로 없었다.
늘 교회나 집회에 자기 딸만 챙겨 나가 있었고, 우린 여전히 그냥 집에만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집에 없고, 비오는 날에만 있었다. 약속한 건 있어서, 한 몇 달간 일요일에는 쉬기도 했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았다.
식구가 늘었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있었나 보다. 사실 우리는 그 보다 더 필요한게 있었는데...
다섯손가락. 이제는 깨물어 줄 사람이 없었다. 자기 손가락을 누가 깨물겠느냐. 하지만 살다보면 깨물때도 있다. 근데 아프던 안아프건 깨물어 줄 사람이 없어졌다. 아무도 깨물어 주지 않았다. 차라리 진심으로라도 깨물어 줬으면 좋겠는데, 정말 그랬는데... 아무도 우리를 깨물지 않았다.
아무도 깨물어 주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깨물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사람들 중에 깨물어 주기를 바라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