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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유서 - 류시화

답시를 올립니다.

by 쏘리


p.100


가을 유서 - 류시화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 되어 버린 시작 노트 위에


(* 내 유서는 내가 살기 싫을 때마다

죽고 싶었을 때, 또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을 때


적어내려 갔다.


내 노트는 노트북이고 다이어리고,

내가 적어 내려 갈 수 있는 모든 글자에

남겨뒀다.


글자체에서도 느껴지는 내 느낌과 감정을)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 마지막 눈을 감았다 생각했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꺼풀 위에는

다시 보기 싫은 것들을 마주해야 했다.)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 내 인생이 한 장안에 다 녹여져 있지 못함을

깨닫고는 다 쓰기 전까지는 유서가 아님을)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 차가운 마음들 사이에

따듯한 마음들 사이에


그 사이에 나는 이리저리

많이도 지나갔다)


하룻밤 새 하얗게 돌아선 양치식물 위에

유서를 쓰리라


(* 맑았던 사람들이 떼가 묻어감에

그 떼사이에 나도 묻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미 묻어있나

이미 내가 묻히고 있나

이미 내가)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 아직도 묻혀있는 내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피어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데)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 시체가 되기 전 마주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나는 도움이 되지 못한


존재임을 알았을 때

현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꽂히게 되는데)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 누군가의 한숨을 보고

왜 땅이 꺼지도록 숨을 쉴까 했던 내가


이제는 반대로 땅이 꺼지는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는 자체를 모르게 되는데


그래서 숨을 참게 되는데)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 멀어서 잘 몰랐던 상처들이

실은 가까이에 주고받았던 상처들이었음을


알게 되고


마음을 후벼 파는데 그 사이에 계절은 바뀐다)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 어딘가를 가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

정류장인데 어디를 가야 할 곳이 없어서


정류장조차도 갈 수가 없었다)


산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 왜 한 장일까

한 장안에 무엇이 담길 수 있는가)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 내 애인들은 잘 지내라.

나는 잘 지낸다.


앞으로도 달라지는 건 없다)


큰 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 눈으로 읽되

입으로는 읽지 마라


음성으로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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