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시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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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유서 - 류시화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 되어 버린 시작 노트 위에
(* 내 유서는 내가 살기 싫을 때마다
죽고 싶었을 때, 또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을 때
적어내려 갔다.
내 노트는 노트북이고 다이어리고,
내가 적어 내려 갈 수 있는 모든 글자에
남겨뒀다.
글자체에서도 느껴지는 내 느낌과 감정을)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 마지막 눈을 감았다 생각했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꺼풀 위에는
다시 보기 싫은 것들을 마주해야 했다.)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 내 인생이 한 장안에 다 녹여져 있지 못함을
깨닫고는 다 쓰기 전까지는 유서가 아님을)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 차가운 마음들 사이에
따듯한 마음들 사이에
그 사이에 나는 이리저리
많이도 지나갔다)
하룻밤 새 하얗게 돌아선 양치식물 위에
유서를 쓰리라
(* 맑았던 사람들이 떼가 묻어감에
그 떼사이에 나도 묻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미 묻어있나
이미 내가 묻히고 있나
이미 내가)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 아직도 묻혀있는 내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피어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데)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 시체가 되기 전 마주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나는 도움이 되지 못한
존재임을 알았을 때
현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꽂히게 되는데)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 누군가의 한숨을 보고
왜 땅이 꺼지도록 숨을 쉴까 했던 내가
이제는 반대로 땅이 꺼지는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는 자체를 모르게 되는데
그래서 숨을 참게 되는데)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 멀어서 잘 몰랐던 상처들이
실은 가까이에 주고받았던 상처들이었음을
알게 되고
마음을 후벼 파는데 그 사이에 계절은 바뀐다)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 어딘가를 가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
정류장인데 어디를 가야 할 곳이 없어서
정류장조차도 갈 수가 없었다)
산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 왜 한 장일까
한 장안에 무엇이 담길 수 있는가)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 내 애인들은 잘 지내라.
나는 잘 지낸다.
앞으로도 달라지는 건 없다)
큰 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 눈으로 읽되
입으로는 읽지 마라
음성으로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