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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 류시화

답시를 올립니다.

by 쏘리
류시화.png



P. 54


거미


(* 곤충)


거미의 계절이 왔다

오월과 유월 사이

해와 그늘의 다툼이 시작되고

거미가 사방에 집을 짓는다


(* 거미의 계절이 아닌 날에

거미는 어디에 숨어있을까

어디에 숨어야 할까

숨기 위해 여러 곳에 은신처를 만든다)


이상하다 거미줄을 통해 내 삶을 바라보는 것은

한때 내가 바라던 것들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그 중심점에

거미만이 고독하게 매달려 있다


(* 신기하다 거미줄을 걷어내니 거미는

또 숨어버린다. 걷어내서 얽힌 거미줄은

사라지고 오갈 데 없어진 거미는

어디다 집을 다시 만들어야 할지

생각에 잠긴다)


돌 위에 거미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나는 한낮에 거미 곁을 지나간다

나에게도 거미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거미, 네가 헤쳐 나갈 외로운 시간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 보이지 않았던 그림자들이 모여서

한낮에도 드리운 어두움은 걷힐 생각을 안 하고

모두 고유한 인생인데 섣불리 동감을 해버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들 판단 해버리고)


거미에게 나는 아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오월과 유월 사이


(* 아무 말하지 않는 침묵이 주는

대답이 뭔 뜻인지나 알까)


내 안의 거미를 지켜볼 뿐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난다 해도

나 자신으로부터는 달아날 수 없는 것


(* 어딜 가든 지상낙원은 없다는 그 말이

나가봐야 알 수 있지 않냐는 내 어리석은 판단으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현실을 알아버린 순간 거미를 죽여버렸다)


나는 해를 배경으로 거미를 바라본다

내가 삶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이고

또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거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 뜨는 해를 보고 경멸을 하고

지는 달을 보고 지지 말라 부탁을 하고

깨닫지 못한 많은 것들이

내 마음의 짐으로 다가와

내 숨을 옥죄여 삶을 죽여갔다

그럼에도 거미는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해를 배경으로 거미를 바라본다

내가 삶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이고

또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 나는 불현듯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게

깨달음을 찾으려 했지만

깨닫지 못한 많은 사실도 구분이 잘 되지 않았고)


거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 모두가 내 곁에 있었다)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도


(* 알아차림을 거부할 때도)


거미는 해를 등진 채 분주히 집을 짓고 있었다


(* 나를 위해 집을 지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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