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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Apr 25. 2021

발목이 세 번 삐끗한 날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발이 작은 내 곁에 이제 그가.

발이 작던 나는 평소에도 발목을 자주 삐끗했으며 쉽게 넘어졌다. 어디 걸려서 넘어질 때도 있지만 왜 넘어졌지 싶은 곳에서도 잘 넘어져서 말 그대로 난 쉽게 넘어졌다.


그와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예쁜 원피스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나갔다.

뾰족구두는 키를 커 보이게 하고 좀 더 해 보이게 해서 자신감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새로 산지 얼마 안 된 구두를 신고 간 게 문제였나 보다.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발뒤꿈치가 까져서 쓰라리고 아팠다.


한 껏 힘을 주고 나왔는데

걸을 때마다 상처가 쓸려서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고통을 견디고 숨기느라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바로 걷지 못하고 비틀대다가 첫 번째로 발목을 접질렸다. 쁘게 보이려고 신은 구두였는데 그런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짓게 돼서 아픔보다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보다 놀란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기 전 가엾은 아이 같았다. 내가 발목을 접질린 게 저렇게 어쩔 줄 몰라하며 슬퍼할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발목을 삐끗한 건 나인데 그가 가엾어 보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스킨십이 어색했던 우리였기에 약간 삐끗한 상황에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넘어지지도 않고 약간 휘청 한 거라서 잡았다고 해도 서로 어색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또각또각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 속도에 맞춰 그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한 번 삐끗하고 나니 엄마의 구두를 신고 나온 아이처럼 이 신발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삐끗하면서 느껴지던 통증이 걸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대로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여기까지만 보여줘도 그에게 충분히 예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말이다. 발뒤꿈치도 너무 쓰라리고, 발목도 시큰거리고 더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도망을 쳤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께 있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그런 때였으니까.


나는 처음보다 더 엉성하고 느리게 걸으며 그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가게를 향해 갔다.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 두 번이나 휘청하며 발목을 삐끗해버렸다. 세 번째 삐끗했을 때는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지만 구두가 거추장스러워서 그 자리에서 던져버리고, 맨발로 걸어가고 싶었다. 곁에 있는 그를 보며 참았다.


세 번째 삐끗하고 나서는 그에게 거의 부축을 받고 걸었다. 만나고 난 이후로 우리 몸의 가장 많은 부분이 밀착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겨우 식당에 도착해서 메뉴를 고르고 주문을 했다. 그는 내게 잠깐만 나갔다 온다며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이제 더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만큼 발 뒤꿈치는 벗겨져 있었고, 피까지 맺혀있었다. 발목은 똑같은 쪽을 세 번이나 삐끗해서 부어올랐고 욱신욱신거렸다.


우리가 간 식당은 좌식 테이블이 있는 곳이라 기다리는 동안 욱신거리는 발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가 다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약국 봉지가 들려있었는데,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그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그는 진지한데 나는 속으로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보호받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발의 통증 어느새 사라지는 거 같았다. 그의 이런 모습이 내게는 마취제였다.


내 행복은 거기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여름이라 혹시나 발 냄새가 날까 싶어 발을 내 쪽으로 최대한 끌어당기고 앉아있던 내게 그가 발을 달라고 했다.

'아니, 아직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그에게 이미 너무 부축을 받고 들어온 뒤라서 그 말을 하기에도 이상했다. 그리고 우리는 스킨십이 어색할 뿐 이미 사귀기로 한 사이어서 괜찮다는 최대한 완곡한 표현을 하 내 발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그동안 내게 모든 걸 맞춰주던 그가 그날 그 순간만큼은 단호했다. 괜찮다며 다시 발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접듯이 내 발을 살포시 그에게 내밀었다. 어쩔 수 없다. 이제 냄새가 나도 그가 감내를 해야 한다.


그는 뛰어가서 사 온 파스를 뜯을 생각도 없이 내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내 발목이 부었다며 걱정을 늘어놓으며 말이다. 이렇게 마사지를 하지 않으면 당장에 무슨 큰일이 날 것처럼 굴었다.


우리 앞에 있는 식탁에 음식이 나왔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직 내 발과 발목뿐이었다. 내 뒤꿈치가 까진 것은 언제 또 보았는지 그가 가져온 약국 봉지 속에는 상처에 바르는 연고와 대일밴드도 들어있었다.


아. 사랑받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구나. 이제는 내 몸이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니구나. 날 소중히 대해주는 그를 위해서라도 조심하고 다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마사지를 한다고 내 발을 만진 그의 손은 우유보다 부드러웠으며, 대일밴드와 파스를 붙이는 그의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런 그가 너무 예뻐 보였다. 그가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날 더 가까워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발이 유독 작아서 다행이다.

그날 유독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서 다행이다.


그 덕분에 가까워져서 결혼 하고 두 아이까지 낳아서 알콩달콩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작은 발 때문에 자주 넘어지거나 삐끗한다.


그래도 이제 아무 상관없다.

발이 작은 내 곁에는 이제 그가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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