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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Jan 26. 2022

밤이 무너져 내렸다.

다 겪는 일일 거야, 다 지나가는 일일 거야.

입덧은 모두가 아는 병이라 아무리 심하게 하더라도 죽은 사람을 못 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 한 모금을 일주일째 못 먹어도 사는 병이라고 했다.


아이를 키울 때 잠을 못 자는 것도 그런 거라 여겼다. 잠을 이렇게 오래도록 못 잔적이 없던 나는 그래도 가끔 두려웠다. 이러다 내가 덜컥 병이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픈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가족에게 나의 부재를 안길 만큼 큰 병에 걸릴까 봐 두려웠. 


오후 10시 무렵부터 12시 사이가 나는 가장 졸린데 아이는 그 시간을 훌쩍 넘겨 새벽 1시에서 3시가 되어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 된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는데 오후 두 시처럼 노는 아이가 경이로웠다. 우주 만물의 체력을 다 가져와도 지금 이 아이의 에너지와 견줄 수 있을까. 혹시 눈을 깜빡이는 순간 에너지가 채워지는 걸까 아니면 저 작고 통통한 발을 딛는 순간마다 에너지가 채워지는 걸까.


자지 않는 생명체는 배가 고플 수도 있고 쉬야나 응가도 한다. 둘째도 마찬가지였다. 자지 않고 있으니 자꾸 손이 갔다. "짹"하며 어디선가 가져오는 책을 벅꾸벅 졸면서도 읽어주었고 분유를 먹이기도 기저귀를 갈기도 했다.


아이는 업혀서 코를 골다가도 내려놓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을 번쩍 떴다. 유모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잠깐이지만 그렇게 맛있게 자다가도 안아서 눕히려고만 하면 눈을 뜨고 내가 언제 자기라도 했냐는 표정을 지어 날 당황시켰다.


아이는 자기 전까지 다시 쉼 없이 움직였고 나는 빌었다.

 "아가. 우리 제발 자자. 응?"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렇게 자주 간절하게 빌어본 적이 없다. 그런 내 목소리가 책을 읽어줄 때와 같게 느껴졌나? 아이는 동화의 한 구절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실은 내 말을 듣긴 들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들었으면 그렇게 한결같이 안 잘 수는 없었을 텐데, 조그만 게 정말 안 잔다 싶었다.


이 지루한 인내의 시간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펐다. 일은 하다가 맞지 않거나 힘들면 그만둘 수있는데 이건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고단해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이러고 살 텐데. 나보다 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 엄마도 많을 텐데. 엄살 그만 부리고 툭툭 털고 일어나야지. 이 작고 예쁜 아기를 봐. 힘내야지. 넌 이 아이의 엄마잖아.'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자기를 바라던 아이를 재우고도 나는 바로 잠들지 못할 때가 많았다. 잠 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온몸의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끙끙 앓았다. 그렇게 한참을 앓다 잠이 들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날은 약의 힘을 빌렸다. 약기운에 통증이 사그라들면 지쳐서 잠이 들었다. 타이레놀을 먹어도 듣지 않는 날도 있었다. 통증의 강도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걸 느끼며 통증과 두려움에 떨었다. 언제가부터 밤이 오는 게 무서워졌다.


극도로 잠이 부족한 날들이 지속되니 내 자아는 분열했다. 너도 입이 있으니 가족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하라고 소리쳤다. 또 한편에서는 그래 봤 바뀌는 게 있느냐고, 있을 거 같냐고 소리쳤다. 신랑이 오는 날 신랑에게 맡기고 맘 편히 자도 됐을 텐데 한 번도 그러지 못했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밤이면 엄마만 더 찾는 아이 때문이었다. 그런 아이를 달래려 애쓸 신랑이 눈에 선했고 그럼에도 쉽게 달래지지 않을 모습이 그려졌다. 신랑도 아이도 너무 고될 것 같았다. 그리고 신랑은 일을 하니까 출근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자면 출근하다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아이가 안 자는 그 힘듦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힘듦을 다른 이에게 안겨줄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때때로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나라서 노력한다 해도 바꾸는 건 힘들었다.


그저 나는 가만히 누워 잠이 들지 못하는 나를 채근하고 책망했다. 다들 각자 자리에서 해야 될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일을 쉬면서 아이 둘만 보고 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들지 자책했다.


아이를 재우고 계속 되뇐 건 '제발 지금이라도 자야 해. 그래야 내일 조금이라도 더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지.'였다. 잠을 못 자는 와중에도 아이를 걱정했다.


창문 밖 날씨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는 자주 비가 내렸다. 잠시 쏟아붓고 마는 소나기가 내리는 날도, 하루 종일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장대비가 내리는 날도 있었다. 못 자는 밤이 이어질수록 나는 무기력졌다.


김 빠진 맥주처럼 생기를 잃은 나는 잠든 채 눈만 뜨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낮마다 병든 닭처럼 시들시들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봐도 더 이상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마중물도 말라버렸다. 체력이 담긴 우물에는 빈 두레박만 처박혀 있었다. 잠깐의 여유와 시간이 생길 때조차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쉬는 것과 자는 것 밖에 없었다. 깨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도 해가 뜬 낮이면 생기가 돌아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겨우 뜨고 있는 눈과 자주 엎어져 있는 내 몸뚱이가 야속했다. 이 터널의 끝은 과연 있는 걸까. 더는 망가질 데도 없는 것 같은데, 더는 아파서는 안 될 텐데. 어디까지 나를 밀어 넣어야 성이 찰까. 생기를 잃은 채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게 오늘도 못 잘 거란 사실보다 더 슬프게 다가왔다. 생기발랄했던 내 모습들이 기억 속에서는 이렇게 생생한데 거울 속 내 모습은 늘 부스스했고, 피곤해 보였다. 낯설지만 이 모습조차 내 모습임을 인정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잠을 못 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살면서 처음 깨달았다. 몸에 이상 반응들이 늘어갔다. 입덧도 아닌데 자주 속이 메스꺼웠다. 그리고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입에서 자꾸 단 게 당겼다. 아이가 신생아일 때 발바닥이 아파 땅에 딛지도 못하겠던 증상이 있었는데 그 증상도 다시 시작되었다. 디딜 때마다 발 뒤꿈치가 불편했다. 신랑에게 하나하나 열거할 수도 없고, 그저 나 혼자 알고 있기에는 또 억울한 마음들었다. '자꾸만 이상 현상 늘어가는데 아무도 모르겠지.'

소외감이 들었다. 홀로 던져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너무나 피곤한 날이면 20분에 한 번씩 소변이 마려웠는데 방광이 아프기까지 했다. 오줌이 찔끔찔끔 새기도 했다. 수치스러워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건 둘째를 낳을 때 방광을 찢고 난 후 생긴 부작용이었다. 컨디션이 정말 떨어질 때면 이런 부작용을 겪고 있지만, 그 덕분에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여 소변줄이 상처를 자극하기 전까지는 요의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사방이 깜깜했던 시간도 겪어 냈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다.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로 방광 기능이 돌아와 준 것만 해도 나는 기적이라 여겼다. 이 아이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다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아이의 작고 앙증맞은 발이 보일 때마다 미소 짓게 되는 엄마지만, 아직 빠지지 않은 오동통한 젖살이 부드러워 손을 떼지 못하는 엄마지만, 밥을 먹은 후로 어느 정도 살이 차오른 허벅지가 기특해서 기저귀를 갈 때마다 "쭉쭉"을 외쳐가며 마사지를 놓치지 않는 엄마지만 나도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잠을 못 자며 깨달았다.


지금도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은 자고 싶을 때 자는 일이다. 가장 바라는 일은 밤낮없이 날 따라다니는 피곤이 달아나 아이들과 함께 밤낮없이 신나게 놀아주는 엄마가 되는 일이다.


아이들은 내 삶에서 너무나 크고 정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내가 조금 더 힘을 내서 놀아주어 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지금보다 더 밝게, 빛나게 기억될 수 있도록 둘째가 조금만 일찍 자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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