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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Feb 04. 2022

내가 아픈 건 당연했고, 신랑이 아프니 애가 탄다.

내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외롭고 고단했을 신랑이 떠오른다.

일요일 아침, 침을 삼키기도 힘들 만큼 신랑의 목이 부. 그에게 편도가 부은 건 위험 신호다. 한 번 부으면 열이 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증상이 심해져 무조건 입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랑은 나와 결혼 후 두 차례 입원을 했었는데 그때도 다 목이 문제였다.


나는 그가 온전히 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려 애를 썼다. 그를 볼 때마다 "얼른 들어가 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라는 말을 건넸다. 그가 쉬는 동안 편도선염에 좋은 음식을 찾고, 엄마가 직접 만들어 놓은 실엑기스로 그가 마실 매실 음료를 만들어 놓았다.


죽을 시키고 함께 을 때였다. 눈앞에 죽보다 그의 얼굴을 더 자주, 오래 들여다봤던 것 같다. 내가 최근에 그의 얼굴을 이렇게 유심히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둘이 얘기를 나누다가도 어느새 아이들의 곁을 지키기 바쁜 날들이어서 오랜만이었다. 키는 것조차 아파하는 그를 보며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내주지 못하면 백방 아빠를 찾으며 달려갈 것이 뻔했다. 목이 불편하긴 했지만 둘째가 가져오는 책을 모두 읽어 주었다. 거기다 첫째에게까지 굳이 찾지도 않는 책을 읽어 주었다. 점심으로는 유부초밥을 쌌고, 저녁으로는 스파게티를 했다. 유부초밥을 먹던 아이는  "그래. 소풍 갔을 때 꺼내 먹던 바로 그 맛이야." 하며 흡족해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중에는 아빠를 찾을 일을 없을 테니 덕분에 한시름을 놓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내가 아마 그 정도의 일을 해냈다면 칭찬을 입에서 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랑은 날 챙길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도 사실 그날목이 붓고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프다는 걸 알고 컨디션 같은 건 내게 안중에도 없 게 되었다. 내가 아프다고 했을 때 그에게 있어 그의 컨디션 안중에도 없는 게 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에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내 이마를 걱정스레 어 보 이 나던 나지 않던 혼자서 일을 떠안았다. 잔소리 하나 하지 않고 묵묵히 눈앞에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고 아이들을 돌봤다. 그런 그와 사느라 나는 그의 힘듦에 무뎌져 있었다. 이제껏 내가 아프다거나 피곤하다고 하면 늘 발 벗과 나서는 그였기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조금만 기운이 없어도 축 쳐져서 신랑만 믿고 하던 일들을 멈추고 게으름을 피웠던 지난날들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그가 아픈 것만 같았다.  나처럼 철도 없고 이기적인 아내를 만나 그가 너무 고단 했겠다, 외로웠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언제 한 번 그가 매일 온몸이 녹아내리는 거 같은데 참고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던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기억했어야 했는데. 밤이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둘째 재울 수 있으니 얼른 자러 가." 하고 그에게 인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허리가 아프다고 했을 때도 뜨거운 찜질을 추천하기만 할 게 아니라 '몸의 중심인 허리가 아프면 얼마나 괴로울까'라는 마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뜨거운 찜을 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 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가 되었다.


열이 치솟으면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그는 깨어있을 때면 온몸을 떨며 춥다는 말만 반복하다 혼절하듯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신랑이 아프기 시작한 날은 일요일인 데다 명절에 코로나까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반 병원은 다 문을 닫았기에 응급실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내 말을 신랑이 순순히 따라준 것도 더 이상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아픔보다 자신의 빈자리로 인해 고생할 아내와 안쓰러운 자식들을 먼저 떠올리는 가장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의 무게가 내게도 실려오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나마 그가 짊어진 무게를 가늠이라도 할 수 있었다.


코로나 검사를 하고 겨우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응급실에 가서 항생제와 링거를 맞는데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링거를 한대 더 맞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도 열이 심하게 났다. 속이 새카맣게 타고 애가 타서 정신이 아득했다. 열이 39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정말 없었다. 이마에 수건을 대어 주다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와 번갈아가며 대어 주었다.  


그랬는데도 도저히 열이 잡히지 않아 응급실에 두 번째 갔을 때 신랑은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코로나 간이검사에서는 음성이 나왔어도 PCR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내일까지는 자가격리 대상자라며 병원에서 다시 돌려보냈다고 했다.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며 겨우 갔는데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야 했을 그를 떠올리니 화가 났다. 그 후로도 열은 내릴 생각을 안 했다. 응급실에 전화를 해 상황을 설명했다. PCR 검사를 하면 자가격리 대상이 되어 더 이상의 치료를 내일까지 받을 수 없게 된다면서 열이 떨어지지 않은 사람을 왜 그냥 보냈냐고 물었다. 목이 너무 부어서 링거를 맞아도 어차피 열이 떨어지지 않을 거란 무성의한 대답이 돌아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비접촉식 체온가 거짓말같이 41도를 찍었다. 더는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더 강경하게 대응을 해야 한다면 하겠다는 생각으로 응급실에 전화를 해 자초지종을 다시 설명했다. 그제야 상황 심각하다 느꼈는지 격리병동이 있으니 그곳에서 치료를 받다 내일 결과가 나오면 입원을 하자고 했다.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집에는 아이들과 신랑, 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그날 하루신랑 혼자 병원 응급실에 세 번이나 갔다. 평생 곁을 지킨다고 해놓고 아픈 사람 병원 동행 하나 못하는 나는 신랑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신랑이 병원에 가고 눈에 보이지 않자 그때부터 나는 무너져 내렸다. 씩씩하게 닥친 일들을 척척 해나가던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가 아파하던 모습이, 열에 취해 벌벌 떨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가 내 곁에 없어 더는 돌봐줄 수가 없다. 그가 심하게 아픈 게 실감이 났다.


그날 그는 그렇게 입원을 했다. 입원한 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게 다행이라고 말이다. 집에 있었다면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을 거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는 그동안 밀린 잠을 자기라도 하듯 집에서부터 병원에 가서까지 계속 잠만 잤다. 집에 있을 때, 열에 취해 잠이 든 그를 보며 반딧불의 불빛처럼 영영 사라질까 봐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항생제 링거에 주사도 맞고 있으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상황은 좋지 못했다. 잠깐 괜찮았다가 다시 물 한 모금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목이 붓고 통증을 느꼈다. 옆에서 그 증상을 함께 견뎌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코로나 때문에 면회조차 금지가 돼있으니 애가 탔다. 전화기 너머로 힘없는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음이 미어졌다. 그가 있는 병원은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있는 병원 건물을 자주 쳐다봤다. 꼭 그가 보일 것만 같아서 커다랗게 솟은 병원 건물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집에서는, 그가 없는데도 그가 평소에 하던 일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를 씻기던 그,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면서도 둘째를 재우던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어주려 있던 그, 우리가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하루에 몇 번이고 사러 나가던 그, 내 통장에 돈을 입금할 일이 있어도 무조건 나갔던 그. 그쯤 되니 도대체 그가 하지 않은 일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었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 우리 집이 있는 건물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병실에서 우리 집이 이렇게 잘 보인다며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한 모금 못 넘기면서도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몫을 해내려 했다. 그런 그를 버텨내는 게 힘이 들었다. 맘 편히 쉬는 것도 못하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만든 게 나인 것만 같아서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입원 삼일차 밤에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너무 아파서 신랑이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피검사부터 시작해 다시 여러 검사가 이어졌고 저녁이 되어서야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내일 소견서를 써줄 테니 퇴원하고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얘기였다. 염증이 더 깊은 곳까지 넘어갔으니 그곳에서 찢고 염을 빼는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얘길 전화로 전해 듣는 그가 겪었을 통증이 떠올라 괴로웠다. 정말 내가 아픈 게 나았다.


그는 다음날 종합병원에 가는 것조차 혼자 하겠다고 했다. 그곳은 코로나 시국에 내게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나는 같이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결국 그는 내일 퇴원도 혼자 하고 더 큰 병원도 혼자 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발 그가 더는 아프지 않기를, 그의 통증이 사그라들기를 기도하며 잠이 드는 것뿐이다. 


이번 일을 겪으며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제껏 몸은 힘들고 고단했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는 걸 았다. 그런 그를 내가 엄청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더한 시련이 찾아와도 그의 곁을 지금처럼 킬 것이다. 불행은 노크를 하지 않고 삶으로 불쑥 들어오지만 그게 불행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가 아픈 건 너무 슬프고 힘들었지만 그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의 힘듦에 대해 이렇게 까지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그에게 더 좋은 아내가 되고 다. 그리고 꼭 그렇게 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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