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3)

어둠만이 가득한 집

by 시나브로

봄이 오고 가을이 가기까지 신작로 옆 언덕에는 꽃들이 수없이 피었다 졌다. 돌보는 사람 하나 없어도 들꽃은 군데군데 무리 지어 산을 물들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진달래와 들국화, 또 키가 큰 아카시꽃과 찔레꽃은 풀숲에서도 조용히 제 자리를 지켰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아침저녁으로 나는 그 길을 걸어 오갔다.


자연스레 피고 지는 들꽃을 보며 계절을 느끼고 꽃잎과 향기가 어떠한지 관심을 가지 기억하게 되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도 흘러가는 계절에 섞여 철철이 피어났고 어릴 적부터 접하던 그런 자연이 마냥 좋았다.



큰 냇가와 잇닿는 신작로엔 언제나 울퉁불퉁한 자갈돌이 깔렸더랬다. 신작로를 걷다 심심하고 지친 아이들은 구릉 같은 산모롱이로 올라 자잘한 풀밭에 책가방을 베고 누워 시간을 잊은 채 하늘을 보기도 했다.


파아란 하늘을 수놓은 구름을 보았던 날도, 비가 갠 뒤 활짝 핀 들꽃을 보며 무심코 혼자서 마음으로만 읊조렸던 생각들 까지도..


설마 그 꽃들은 알고는 있었을까. 어린 마음에도 살아나갈 내 삶이 큰 희망은 없을 것 같아 괜스레 주눅이 들기도 했던. 어떤 날은 터벅터벅 혼자서 걷다 삶이 버겁다고 느꼈던 순간들 까지 모두 간직하고 있는 그 시절을.


어른거리는 내 기억 속의 그날, 희미해지는 그림에는 지금도 그 시절, 그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다. 문득 오늘은, 퍼붓는 장대비를 보며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이 어제의 일처럼 하나하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떠오른 기억들이 풀 죽어 늘어뜨린 내 어깨를 훤히 비춰주는 주마등처럼 하나씩 또렷하게 가까워졌다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는 집에 도착해 잔뜩 어둠만이 차지한 어둑한 거실에서 활짝 열린 창문을 덩그마니 바라본다.


베란다를 통해 집으로 제멋대로 넘나드는 이른 밤바람이 그나마 기분을 좋게 해 준다. 비 내리는 날 특유의 고요와 정적만이 깃든 거실, 때 이른 저녁 풍경을 따라 평소보다 더 잔잔하고 차분해지는 마음이 싫지 않은 시간이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참을 베란다 가까이로 다가가 본다.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가 주는 편안함에 빠져 퇴근을 서두르는 도로 위 줄지어선 자동차 행렬을 본다.


노심초사 하루를 견뎌냈던 마음도 점차 사그라들며 작아지는 빗소리를 따라 빠르게 잠잠해진다. 점차 잦아드는 빗소리를 새삼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정겨움이 담긴 멜로디로 내 귓가로 가져온다.



급히 도로를 달려 편안한 쉼이 기다리는 귀로위에 선 많은 차들이 신호등을 보며 내달린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남기고 간 크고 작은 불빛의 잔해는 아스팔트를 더욱 짙은 흑빛으로 비춘다.


빠르게 달리는 바퀴에 깔린 물결이 자아내는 소리를 찾아 마음속 캔버스에 옮겨본다, 모두가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시간, 정적 속 실내를 장악한 것들은 어느새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유독 편안하게 즐기게 되는 밤이다.


누구 한 사람 가족들은 귀가하지 않아 텅 빈 집. 비 내리는 날 특유의 칠흑같이 짙은 고요와 무거운 어둠만이 온통 집 안을 차지하고 나를 붙든다. 그나마 식탁 위 작은 조명 하나가 까만 들판 같은 거실을 희미하게 밝혀준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었는지 아련한 조명 아래서 차분해지는 마음을 따라 그 울림을 따라 찬찬히 기록해 본다. 조금 전 빠르게 읽었던 짧은 문장 하나가 내 안에서 자꾸만 맴돌며 곱씹게 한다.


이 저녁,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따라 빠르게 몰려들던 옛 추억과 이 저녁의 어둠을 나도 모르게 즐기면서...

유난히 차분해지는 시간 속에 파고드는 혼자만의 의미를 우물 안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가둬본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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