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만이 가득한 집
봄이 오고 가을이 가기까지 신작로 옆 언덕에는 꽃들이 수없이 피었다 졌다. 돌보는 사람 하나 없어도 들꽃은 군데군데 무리 지어 산을 물들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진달래와 들국화, 또 키가 큰 아카시꽃과 찔레꽃은 풀숲에서도 조용히 제 자리를 지켰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아침저녁으로 나는 그 길을 걸어 오갔다.
자연스레 피고 지는 들꽃을 보며 계절을 느끼고 꽃잎과 향기가 어떠한지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게 되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도 흘러가는 계절에 섞여 철철이 피어났고 어릴 적부터 접하던 그런 자연이 마냥 좋았다.
큰 냇가와 잇닿는 신작로엔 언제나 울퉁불퉁한 자갈돌이 깔렸더랬다. 신작로를 걷다 심심하고 지친 아이들은 구릉 같은 산모롱이로 올라 자잘한 풀밭에 책가방을 베고 누워 시간을 잊은 채 하늘을 보기도 했다.
파아란 하늘을 수놓은 구름을 보았던 날도, 비가 갠 뒤 활짝 핀 들꽃을 보며 무심코 혼자서 마음으로만 읊조렸던 생각들 까지도..
설마 그 꽃들은 알고는 있었을까. 어린 마음에도 살아나갈 내 삶이 큰 희망은 없을 것 같아 괜스레 주눅이 들기도 했던. 어떤 날은 터벅터벅 혼자서 걷다 삶이 버겁다고 느꼈던 순간들 까지 모두 간직하고 있는 그 시절을.
어른거리는 내 기억 속의 그날, 희미해지는 그림에는 지금도 그 시절, 그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다. 문득 오늘은, 퍼붓는 장대비를 보며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이 어제의 일처럼 하나하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떠오른 기억들이 풀 죽어 늘어뜨린 내 어깨를 훤히 비춰주는 주마등처럼 하나씩 또렷하게 가까워졌다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는 집에 도착해 잔뜩 어둠만이 차지한 어둑한 거실에서 활짝 열린 창문을 덩그마니 바라본다.
베란다를 통해 내 집으로 제멋대로 넘나드는 이른 밤바람이 그나마 기분을 좋게 해 준다. 비 내리는 날 특유의 고요와 정적만이 깃든 거실, 때 이른 저녁 풍경을 따라 평소보다 더 잔잔하고 차분해지는 마음이 싫지 않은 시간이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참을 섰다 베란다 가까이로 다가가 본다.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가 주는 편안함에 빠져 퇴근을 서두르는 도로 위 줄지어선 자동차 행렬을 본다.
노심초사 하루를 견뎌냈던 마음도 점차 사그라들며 작아지는 빗소리를 따라 빠르게 잠잠해진다. 점차 잦아드는 빗소리를 새삼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정겨움이 담긴 멜로디로 내 귓가로 가져온다.
급히 도로를 달려 편안한 쉼이 기다리는 귀로위에 선 많은 차들이 신호등을 보며 내달린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남기고 간 크고 작은 불빛의 잔해는 아스팔트를 더욱 짙은 흑빛으로 비춘다.
빠르게 달리는 바퀴에 깔린 물결이 자아내는 소리를 찾아 마음속 캔버스에 옮겨본다, 모두가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시간, 정적 속 실내를 장악한 것들은 어느새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유독 편안하게 즐기게 되는 밤이다.
누구 한 사람 가족들은 귀가하지 않아 텅 빈 집. 비 내리는 날 특유의 칠흑같이 짙은 고요와 무거운 어둠만이 온통 집 안을 차지하고 나를 붙든다. 그나마 식탁 위 작은 조명 하나가 까만 들판 같은 거실을 희미하게 밝혀준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었는지 아련한 조명 아래서 차분해지는 마음을 따라 그 울림을 따라 찬찬히 기록해 본다. 조금 전 빠르게 읽었던 짧은 문장 하나가 내 안에서 자꾸만 맴돌며 곱씹게 한다.
이 저녁,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따라 빠르게 몰려들던 옛 추억과 이 저녁의 어둠을 나도 모르게 즐기면서...
유난히 차분해지는 시간 속에 파고드는 혼자만의 의미를 우물 안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가둬본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