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을 꿈꾸며 도착한 인도에서 방황의 방향을 찾다
스물여섯. 오래전 집을 떠난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 공영방송국에 사연을 접수했다. 운이 좋아서인지 아님 나빠서인지 그 사연은 방송국의 흥미를 끌었고 나는 방송국의 힘을 빌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살아 있는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송이 전국에 방영될 때 하던 대학공부를 중단하고 인도로 떠나고자 다짐했다.
철학의 나라. 깨달음의 나라. 바라나쉬에서 번뇌의 먼지를 씻고 삶의 찰나의 순간에도 인연과 윤회를 고뇌하는 나라. 그런 인도에 가면 지금 내 고통받는 삶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여기, 대한민국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마음도 있었다. 동정 어린 주변의 시선과 가벼운 위로가 없는 곳이라면 그곳이 인도든, 아프리카의 모잠비크든 어디든 좋았다. 이왕 방황하는 청춘을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에 그저 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렇게 나는 인도에서 해외인턴 생활을 하며 나를 표류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를 맞이한 것은 고고하게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이었다. 쉴 틈 없이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 사람과 차, 동물이 한데 어울려 굴러가는 도로와 코를 찌르는 향신료. 희로애락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인도인들 속에서 나는 이국이 아닌 이계에 떨어진 기분을 받았다. 내가 꿈꿨던 낭만이 묻은 치기 어린 표류는 인도라는 문화의 바다에서 현실이라는 부두에 정박된 채 출항조차 하지 못했다. 방황할 준비조차 되지 않은 녀석. 인도는 인도인들의 큰 눈을 빌려 내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방황이란 것도 결국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할 수 있다. 그것이 목적지든 아니면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한 길이든. 삶이란 긴 여정 속 그 어느 시점에서 내가 잃어버린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막연히 무언가를 잃었다는 생각에 방황을 꿈꾸며 도망치듯 인도로 왔지만 몇 달여의 인도 생활에서 깨달은 건 내가 뭘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어린 날 매몰차게 떠난 어머니, 대학졸업과 취업이라는 한국사회의 정해진 틀을 벗어나려고 했던 의지, 사전에 이미 어머니를 찾은 후에 방송분량을 위해 전국으로 나를 끌고 다녔던 PD로부터 깨졌던 인간에 대한 믿음. 그러나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도로를 점용한 소와 ‘나 여기 있소’ 라며 클랙슨을 울려대는 차들이 뒤섞인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보통의 출근길이었다. 그런데 출근차량을 운전하던 인도인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다짜고짜 지나가던 한 인도인의 귀싸대기를 올려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맞은 상대방도, 그리고 손을 휘두른 운전자도 아무런 말도 없이 다시 서로의 제 갈길을 가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물었다.
“토티, 왜 그런 거예요?”
운전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신의 길을 막아섰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니, 그러면 지금 현재 우리 차를 막고 있는 저 소떼에게는 왜 가만히 있는 걸까? 토티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덧붙여 말했다. 저 사람은 달리트, 이른바 불가촉천민이라는 것이었다.
불가촉천민, 단어에서 나타나듯 닿아서도 안 되는 천한 사람을 뜻한다. 인도의 신분제인 카스트제도에 포함되지도 못하는 제도 외의 계급이다. 그들은 인도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지만 주거와 직업, 그리고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상당한 제약과 차별을 받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대로 결혼을 할 수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원하는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가질 수도 없다. 단지 그들이 태어나기를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릴 수 없다. 같은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한다.
나는 그제야 내 안의 고민에 침잠해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인도의 차별에 눈을 떴다. 계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노동자,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눈만 마주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청소부,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 때문에 승진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무실 여직원. 그들은 내가 인간으로서 당연히 평등해야 할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차별당하며 그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차별이 비단 인도만의 문제일까? 우리나라에서도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지역을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대한다.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을 꼰대라고 비하하고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을 요즘 것들이라고 비난한다. 남성과 여성, 경영자와 노동자, 부자와 빈자 등으로 이분법적으로 서로를 구분하고 나와 다른 것을 적폐로 규정하며 혐오를 조성한다. 그렇게 차별한다.
세계적으로도 그 행위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행되는 학살과 타 종교를 배척하며 벌어지는 종교전쟁, 피부색을 이유로 차별하며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구분 짓고 국가를 기준으로 차별의 근거를 찾으려 애쓴다. 겉으로는 문화적 상대성을 얘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문화적 우월성을 저울침 삼아 무게를 잰다. 그렇게 차별의 근거를 만든다.
왜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할까. 왜 다름을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다름에서 파생되는 차별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아침 불현듯 만난 차별에서 태어난 이 화두는 6개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턴 기간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고민 속에서 마침내 내가 살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답”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무엇이 되기보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가 중요하다고 반문하던 “나”를 놓쳤다. 그랬던 나를 잃어버렸다.
6개월 후 인턴이 종료되는 날, 나는 한복과 갓, 짚신을 신고 Freeobow라고 적힌 피켓을 든 채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슴 가득히 인도에서 깨달은 “존중”의 가치를 안고서 말이다. 국가, 민족, 종교, 성별, 계급, 우리를 규정짓는 그 모든 것을 떠나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내 답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나와 다름이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존중의 가치를 품고 세상을 살아가겠노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그 답에 대한 정답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인도를 떠나 여행을 시작했다.
인도를 떠나는 날, 나는 비로소 방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