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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FREEBOW MAN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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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Apr 12. 2023

01. 안녕, 인도. 안녕, 세계야!

FREEBOW를 위해 인도를 떠나다  

“미스터 노, 그게 뭐야?”

점심시간에 한국에서 온 소포를 뜯는 내게 옆자리에 앉은 라자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물어왔다. 나는 박스 안에서 흰색 두루마기 도포와 갓을 꺼내며 한국의 전통의상과 모자라고 설명했다. 처음 보는 의상에 신기한 듯 한번 보여달라는 라자의 요청에 못 이긴 척 옷을 걸쳐 입으니 이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신 사진 찍기에 정신없던 그가 돌연 물었다.  

“원더풀 미스터 노! 근데 이 옷은 왜 받은 거야? 여기서 입으려고 하는 거야?”

“아니, 라자. 여기 인턴이 끝나면 나는 이 옷을 입고 유럽으로 갈 거야. 그리고 FREEBOW를 할 거야”

“FREEBOW? 그게 뭔데?”


FREEHUG가 서로를 안아주며 가슴에 담긴 따뜻함을 서로 나눠주는 캠페인이라면 내가 기획한 FREEBOW는 존중의 의미가 담긴 절을 서로 나누며 우리 본연에 내재된 존중의 가치를 서로 나눠주는 캠페인이다. 상대방과 나의 차이를 차별의 이유가 아닌 축복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존중이 필요하다는 내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계획한 운동이었다. 그리고 낯선 이 FREEBOW를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한국에서 한복과 갓을 주문했노라고 설명했다. 옷도 입었겠다, 캠페인 설명도 했겠다. 내친김에 즉석 해서 라자와 맞절을 했다. 어리둥절하며 흥미로워하던 라자가 다시금 질문했다.

“근데 이걸 왜 하려는 거야?” 

이때는 몰랐다. 앞으로 수백 번은 넘게 이 질문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을. 


“내가 널 존중하고 네가 날 존중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될 거야. 나는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FREEBOW 피켓에 들어갈 안내문은 그렇게 결정됐다. 


그러나 인도인인 라자에게 내가 왜 하필 지금 여기 인도에서 이 캠페인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얘기할 수 없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도 그렇지만 한국인인 나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도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국인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고 인도인이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을 이상하다고 할 수 없듯이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카스트제도의 계급사회와 종교와 민족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이 그들에게는 손으로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미스터 노, 넌 정말 멋진 친구야. 자유롭게 날기를 바랄게”


라자의 응원에 난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FREEBOW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의상이 준비되자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여행의 시작점인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편, 여행의 종착지인 이탈리아 로마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을 예약하고 유럽 내에서 한 달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유로버스를 예매했다. 유럽에서 들어가고 나가는 것만 정하고 어디로 어떻게 갈지는 그날그날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갈 생각이었기에 별도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다만 단 하나의 목표, 2012 명의 사람과 2012번의 맞절을 하겠다는 목표만 세웠다. 그 목표에 따라 존중의 가치를 세상에 퍼뜨리겠다는 목적만 가졌을 뿐이었다. 


막상 인도를 떠나려 짐을 정리하다 보니 한국을 떠나 인도로 오기 위해 짐을 싸던 6개월 전의 내 모습과 지난 반년간의 인도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사람에 상처받아 무작정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던 나, 그런 나를 특유의 미소로 반겨주었던 인도인들, 노프라버럼을 습관적으로 말하며 “왜 이게 문제가 없어?”라고 말하는 내게 “왜 이게 문제야”?라고 묻던 현장직원들과 외국인인 나를 손님으로서 집으로 초대한 사무실 동료들,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이곳에서 자신들과 계속 일하자며 권하던 인도인 관리자들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구멍이 숭숭 난 내 마음의 빈 곳을 다시금 사람으로 채워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인도는 내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 곳이기도 했다. 길거리에 불가촉천민이 죽어 있어도 누구도 그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사물처럼 대하고 지나쳤다. 높은 계급의 사람은 아래 계급의 사람을 마치 병장이 이병을 대하듯 함부로 대했고 그런 모습이 당연시되었다. 종교가 다르면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단순한 신체적 차이가 아닌 사회적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됐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인도의 모습에 아파했고 또 슬퍼했다.  


때때로 나는 왜 그럴까? 자문했다. 왜 현지에 있는 다른 한국사람들처럼 “저게 저들의 문화니까”라고 넘어가지 못할까? 그건 아마도 내가 차별을 겪어 봤고 그로 인해 누구보다 아파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그 차별 때문에 이곳 인도에 왔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당시 흔치 않던 맞벌이 집안에 가난한 가정이었던 나를 이유 없이 두들겨 패던 담임선생님. 학창 시절 엄마 없는 자식이라고 반 아이들 앞에서 나를 놀려 대며 대학진학을 무시하던 담임 선생님. 그리고 어머니를 찾는 방송이 방영된 이후 나를 멀리하던, 믿었던 대학 선배, 친구, 그리고 짝사랑하던 그녀.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이 되었던 지난 세월들이 인도인의 차별에 눈 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나를 눈물짓게 했다. 


나는 존중받고 싶었다. 나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게 아들로서 존중받고 싶었고 방송분량을 위해 피눈물 쏟던 나를 끌고 다니던 방송국 PD에게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싶었으며, 방송 이후 한순간에 태도가 달라져 동정으로 나를 대하던 친구들로부터 친구로서 존중받고 싶었다. 어쩌면 존중이란 것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가장 원하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인도의 차별에서 사람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차이를 차별이 아닌 축복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존중이 필요하다는 나의 가치관을 세우게 되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존중의 가치를 퍼뜨리는 FREEBOW를 기를 쓰고 하려나 보다. 


배낭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자기 연민은 이제 끝이다. 남은 화두는 다음에 인도로 찾아올 여행자를 위해 남겨둘 셈이다. 나는 인도에서 얻은 나만의 깨달음으로 내가 쓴 답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제 새 여행을 시작할 참이다. 그리고 그 언젠가 다시금 인도로 돌아와 그 결과를 인도에 들려주고자 한다. 그때도 인도는 나를 달래주고 또 다른 화두를 던져줄 테지만 말이다. 


안녕, 인도. 안녕, 세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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