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역사 11: 근대

17세기 영국의 과학, 정치, 무역

by 박종규

17세기 영국에서는 경제적 질문을 다루는 소책자들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경우 상인과 사업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한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출판한 것이다. 무역은 무역회사들(모험상인조합 Merchant Adventurers)과 동인도회사(East Indiampany)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회사들은 독점적 특권을 부여받아 전 세계를 향한 무역을 규제했다.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는 과학에 관한 17세기의 사고를 지배했다. 베이컨은 (신기관 Novum Organum, 1620)이란 책을 통해 실험적 · 경험적 과학의 강령을 제시했다. 그는 두 개의 원리에 기반하여 지식을 재건할 것을 주창했다. 자연사(자연에 관한 사실들의 상세하고 체계적인 수집)와 귀납법(수집된 사실들로부터 자연의 법칙을 도출하는 것)이 그것들이었다.


베이컨의 프로그램은 왕립학회 (Royal Society)에 의해 채택되었다. 왕립학회는 1662년에 찰스 2세 (Charles II)로부터 공인을 받았으며 그 시기 지도적인 과학자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 창립 회원), 뉴턴, 로버트 훅(Rober Hooke, 1635-1703),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새뮤얼 피프스(Samuel Pepys, 1633-1703) 등이 그 회원이었다. "누구의 말도 믿지 말지어다" (Nullius in Verva)라는 왕립학회의 모토는 권위에 의거한 논증을 거부한 베이컨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었다. (106-108 쪽)

근대 사상의 두 기원은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과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다. 베이컨은 경험과 관찰을 통해 귀납적으로 추론된 지식을 새로운 학문의 기초로 사용하였으며 데카르트는 직관적으로 자명한 원리에서 수학적으로 연역한 지식을 보편수학이란 통합과학으로 정립하였다.


근대 이전의 스콜라 철학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체계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모든 지식의 기초는 일종의 학문적 방법론인 ‘오르가논(기관론)‘ 즉 논리학이 근저에 깔려있다. 소위 서구 사상의 형식 논리는 오르가논(도구, 방법, 수단으로도 번역)에 제시된 절차를 따라 합리적 추론을 하는 것이다.


베이컨의 ‘신오르가논’은 중세적이고, 스콜라적 사변적 추론에 대하여 경험과 실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의 실용성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영국의 제반 학문 분야에 다양한 촉진을 가져왔다. 이 책은 과학적 탐구를 방해하는 4가지 우상의 제거를 위한 우상론과 귀납법에 대한 내용으로 저술되었는데 영국 왕립학회의 모토는 베이컨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이 학회는 처음부터 경제적 질문들을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다루었다. 베이컨은 상이한 교역들의 자연사 - 변경된 또는 만들어진 자연' - 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된 주요 인물은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1623-1687)였다. 경제학에 대한 페티의 철저하게 베이컨적인 접근방법은 ‘정치산술(Political Arithmetic)’이란 저서에 나타난다.


'정치산술‘을 쓸 때 그의 목적은 많은 통속적인 믿음과는 달리 영국이 이전보다 훨씬 더 부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수와 산술적인 계산에 근거한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달성하려고 했다. 영국의 부와 관련하여 페티가 주장한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토지(토지는 확실히 프랑스가 영국보다 많다)와 자본뿐만 아니라 사람도 부를 이룬다.


인구가 600만 명이라고 전제하고 사람들이 각자 매년 7파운드를 쓴다는 관찰에서 출발하여 그는 국민소득(national income)이 4,200만 파운드임이 틀림없다고 계산했다. 지대의 몫으로 800만 파운드를 제하고, 개인들의 재산 (주택, 선박, 가축, 주화와 상품 재고)에 대한 이윤 몫으로 추가로 800만 파운드를 제하면 2,600 파운드가 남는데, 이것은 노동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국민소득회계(national income accounting)로 나타난다.


다른 저작들에서 페티는 좀 더 상세한 국민소득회계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국민소득회계는 간단한 것이었지만, 커다란 개념적 진전이 있었다. 현대적인 용어법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국민의 지출(산출)과 국민의 소득은 등량이다. 국민소득은 모든 생산요소(토지, 노동, 자본)가 받는 지급액의 합계다. 모든 자산의 가치는 하나의 공통된 할인율에 의해 수령 소득에 연계된다. (예를 들어 토지의 가치에 대한 지대율은 자본의 가치에 대한 이윤율과 동일하다). 이것은 분명히 거대한 성과였다. 그러나 이 계산에 사용된 수치의 정확성은 매우 모호하다.


20세기 국민소득회계 창설자들은 그랜트, 페티, 대버넌트, 킹을 선구자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매우 크게 변동했다. 18~19세기의 경제학자 대부분이 그렇듯이, 애덤 스미스는 정치산술의 가치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그 결과 그것은 이후의 경제학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신뢰할 만한 국민계정 (national accounting)을 작성할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 국가의 자원들이 그 과업에 투여되고 나서부터였다.(108-114 쪽)

페티의 정치 산술은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계량 경제학으로서 통계학적 자료에 바탕을 두고 경제학적 개념을 수학적으로 계량화하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 이미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근현대 경제학이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갈릴레이의 ‘자연은 수(number)로 쓰여있다’는 말은 이미 고대 헬라인의 수학적이고 기하학적 자연관에 내포되어 있지만 근대의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미분과 적분의 원리나 해석 기하학을 넘어선 사영 기하학으로의 수학적 발전은 이미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조선시대의 경제 규모를 쉽게 표현하려면 예를 들어 연산군 시절 조정이 일 년에 거두는 총세금을 쌀의 양으로 환산하면 10만 석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인구수에 비례하면 국가총생산의 규모가 어떤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숫자는 경제적 사실을 가장 정확히 표현하는 도구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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