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역사 9: 근대

16세기, 근대적 세계관의 출현

by 박종규

르네상스와 근대 과학의 출현


중세 사회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의 여러 부분에서 봉건적 제도는 18세기와 19세기에도 존속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는 1861년까지 농노제가 철폐되지 않았다. 종교, 과학, 미신이 공존했던 중세적 세계관은 훨씬 더 오래 존속했다.


그러나 많은 측면에서 15세기는 근대 세계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의해 함락된 것으로써 상징되는데, 이 사건은 동방에서 로마제국의 종말을 뜻한다. 15세기의 후반에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했고 1498년에는 인도에 닿았다. 1492년에는 서인도제도에 닿았고, 그 후 몇 해 안에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세계는 더 이상 지중해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매우 극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발견들은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일어난 유럽 사회의 더욱 광범위한 변혁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예술적·학문적 · 문화적 개화(開花)로서, 이는 르네상스라 알려져 있다.


중세적 세계관으로부터 근대 과학의 세계관으로의 추가 이동은 다음 두 세기 동안 일어났다. 요한 케플러 (Johann Kepler, 1571~1630)는 티코 브라헤 (Tycho Brahe, 1546-1601)가 제공한 좀 더 정확한 천문학적 관찰기록에 근거하여, 태양이 그 초점 중의 한 곳에 위치한 타원 궤도가 데이터에 더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케플러도 우주에서 조화와 유형을 발견하려는 신플라톤주의적 탐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역시 움직이는 지구라는 사상에 대한 주요 반론에 해답을 제시하지도, 지구가 왜 도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것은 갈릴레오(Galileo, 1564~1642)의 일로 남았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별들을 관찰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연구 방법을 개발하고, 지구상의 물체 운동과 천체에서의 물체 운동 사이의 균일성을 가정했다. 마찬가지로 고전 저술가들로부터 사상을 발전시킨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는 천체들을 무한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입자로 보는 진전을 이루어냈다. 갈릴레오의 생각에 근거하여 데카르트는 관성의 법칙에 관한 최초의 진술을 했다.


그 후 이 체계는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1642~1727)에 의해 완성되었다. 뉴턴은 자신의 운동 법칙을 사용하여 행성의 운동뿐만 아니라 지표면상에 있는 물체의 운동도 해명할 수 있었다. 우주는 더 이상 신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역학적 법칙 (mechanical laws)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였다. 신은 움직임을 격발 시키는 데는 역할을 했을 수 있지만(신성한 시계공), 그 이후에는 신의 역할은 끝났다. (85-88 쪽)

15-6세기 유럽사회의 경제적 중심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이태리반도였고, 문화적 중심은 그 인근의 피렌체였다. 그 이후 상권은 베네치아에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영국의 런던으로 이동하였으며, 문화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파리가 중심이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은 교황권의 약화와 이슬람 문화권에서 일어난 고대 희랍 학문의 새로운 연구 그리고 서구 근대 민족국가의 출현과 연관이 있다. 특별히 천문학의 발달은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기인한 천동설의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결국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근대적 세계관이 태동했다.


천문학과 물리학과 해석기하학의 발전과 미적분의 발견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역학적 원리를 수학적으로 공식화하고, 그 공식을 바탕으로 인위적인 기계를 생산력의 기반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소위 산업혁명이 발생하게 되었다.


신석기 혁명 이후 오랫동안 생산력의 기초가 되었던 완력이나 마력은 증기기관을 필두로 한 기계적 생산력으로 대치됨으로써 상품의 대량생산 체제를 위한 예비 단계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후 경제학자의 관심은 중상주의를 거쳐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유럽 국민국가의 탄생


이러한 문화적·종교적 변화와 더불어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사회는 다양한 권력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사회였다. 이 점은 황제들(처음에는 로마 황제, 나중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과 교황들 사이의 기나긴 투쟁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이와 더불어 무수한 지방 공국들도 충성을 차지하려고 했다. 물론 오랜 세기 동안 군주들이 존재했지만, 강력한 국가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지배하지는 못했으며 그들의 권력은 자주 그들의 영토 안에 사는 귀족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왕들은 군사력도 독점하지 못했다.


그러나 15세기부터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여러 강력한 국민국가(nation states)가 출현했으며, 이 나라들은 그 거주민들이 국가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독점적인 군사력과 정치권력을 지닌 왕에 의해 통치되는 한정된 지리적 공간을 차지했다. 귀족들의 권력은 군주의 권력에 종속되었다. 이 과정은 국가의 경계가 확실했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차단되었던 영국에서 가장 많이 진전된 반면, 영토나 정치권력이 훨씬 더 크고 강력히 분산되어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상당히 늦게 진전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한 지리적 발견은 무역 유형을 변화시켰다. 원격 해상무역로의 개설은 거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서유럽 경제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카의 스페인 정복자들은 다량의 금과 은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14세기와 15세기를 통해 점진적으로 하락하던 가격은 16세기에 상승하기 시작했다.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이 변화했다는 것은 국가가 새로운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1597~160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가 가난한 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한 구빈법(Poor Laws)은 한 세기 전에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유럽의 경제적 균형에서 일어난 두 가지 중대한 변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첫째는 독립 도시국가(city states)의 쇠퇴였다. 16세기 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들은 각국의 수도였다. 1500년에 5만 명 이하였던 런던의 인구는 1700년에는 57만 5천 명가량으로 성장했다. 물론 다른 도시들은 그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니스는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에 비해 상대적 중요성이 떨어졌다.

두 번째 변동은 북해 연안국들의 번영의 증대와 지중해의 쇠퇴였다. 일부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17세기말에는 영국과 저지국(Low Country)들 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 세기 전의 상황을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92-94 쪽)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고 중서부 유럽은 게르만족이 세운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결국에는 여러 민족국가로 갈라지게 되었다. 소위 중국에서 건너온 나침판, 종이, 화약이란 발명품을 기반으로 해외 식민지 개척에 먼저 나선 국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스페인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스페인을 이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대륙의 종교개혁을 이용하여 로마교회에 대응하는 독자적인 영국교회(성공회)를 창립했다. 성공회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와 로마의 가톨릭을 절충하여 만든 영국국교로서 대영제국의 체제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한다.


더구나 영국은 암스테르담의 상권을 런던으로 가져와서 유럽경제의 중심으로 부상시키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이용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며, 신흥자본가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명예혁명에도 성공한다. 그러므로 근대 경제학이 영국에서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변방이었고, 프랑스의 속국이었던 영국의 상선과 군함은 근대 세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대영제국을 건설하였다. 영국인 뉴턴과 다윈 그리고 아담 스미스는 근대적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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