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역사 7: 중세

12세기 르네상스와 대학교에서의 경제학 1

by 박종규

르네상스 (renaissance)와 상업적 번영, 신흥 권력들 사이의 충돌(특히 교회와 국가 사이의 충돌), 봉건제도의 이완, 도시 중산계급의 출현 등과 연관하여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가 나타났다. 12세기 전반 피에르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는 이성(reason)의 사용을 옹호하고 검열에 반대했다. 이전에 무어인들이 지배했던 스페인 지역들에 대한 재정복을 통해 아랍의 지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이 경로를 통해 유럽인들이 그리스 고전을 재발견했다. 이븐 루슈드의 주석서가 열광적으로 수용되었고, 이들을 통해 서구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열기는 대학교라는 새로운 제도의 설립으로 귀결되었다.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에 최초의 대학들이 설립되고, 1400년경에는 53개의 대학교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이 시기의 경제학적 저작 활동은 이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관련된 학자들이 파리 대학교를 중심으로 기동적이고 국제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경제학-보통 '스콜라주의 (scholastic)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은 주로 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윤리적 질문들은 불가피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경제활동이 실제로 어떻게 행해지는가에 대해 생각하도록 요구했다.


경제학이 두드러지게 돋보인 것은 사람들이 영적인 길잡이를 찾으려 했던 사업관행들에 대해 많은 사제들이 문외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지침서의 한 예는 1215년경 토머스 오브 초범 (1163~1235)이 쓴 『고백에 대한 견해』 (Summa Confessorum)이다. 토머스가 상인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직업군의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s)를 검토하면서 경제학적 요소가 그 책 속에 포함되게 되었다. 고리대와 금전욕 모두 그의 일급 죄악 목록에 올라 있다. 그러나 그는 상업을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이런 견해는 이전의 저작들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상업은 무언가를 더 비싸게 팔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을 싸게 구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신도들이 하기에도 전적으로 정당한 일이다. 그들이 이전에 구매했고 나중에 파는 재화에 대해 어떠한 개선점을 보태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많은 지역에서 커다란 결핍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상인들이 어떤 곳에서는 풍부한 재화를 그것이 희소한 또 다른 어떤 곳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그 재화들을 구매하는 데 지출한 자본에 자신들의 노동, 수송을 비롯한 경비들의 가치를 추가해도 좋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그 상품에 무언가 개선점을 추가했다면, 이것의 가치도 부과할 수 있다." (70-71 쪽)

보통 르네상스라면 14-16세기에 걸쳐 서구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을 생각한다. 그러나 12세기에 이슬람권의 고대 희랍 문화의 수용과 연구 성과에 자극을 받은 스콜라 신학자들의 희랍 철학 연구,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는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지적 열풍을 초래하였다.


이 당시에 근현대 대학의 모태가 된 대학들이 이태리를 위시하여 프랑스와 영국에서 설립이 되었으며 위의 그림은 파리 대학교의 교육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콜라 신학의 대표학자로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의 신학적 구상에 반영하였다.


대학들이 설립되면서 주로 가톨릭 신학자나 수사들이 기독교적 공의를 기초로 한 경제윤리를 강의하였는데 초범과 같은 사제 신학자는 상업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이 중농주의에서 중상주의로 변화되는 과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었다.

스콜라주의 경제학의 주요 인물들은 (위의 그림에 나온)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00~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 1225~1274)로 간주되는데, 두 사람 모두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에서 식품과 신발의 비율이 농부와 신발 제조공의 비율과 같거나 신발과 주택의 비율이 신발 제조공과 주택업자의 비율과 같다면 정의가 지켜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구절은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농부와 신발제조공 및 신발 제조공과 주택업자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그누스는 신발과 식품의 가치는 신발 제조공과 농부가 지출한 노동 및 비용에 비례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으로서 필요를 끌어들인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면, 노동에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만약 침대 제조공이 자신의 지출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침대는 더 이상 생산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價値)는 재화에 대한 필요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생산하는 비용에도 관련되어야 한다.


마그누스는 윤리적 질문에서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 있는 모호한 구절을 기반으로 사회가 스스로 필요로 하는 재화들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가격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결론에 도달한다.(73-74 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농경사회와 해상무역에 기초한 고대 폴리스 국가의 경제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는 반면 12세기의 유럽 사회는 훨씬 더 역동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상업이 발달하면서 단순하 노동력에 의존하던 경제 시스템이 재화의 생산비용을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인 경제 활동의 구조에 적합한 분배적 정의를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변화하였다.


마구누스의 제자인 (위의 그림)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신학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보다 현실화하면서도 기독교적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스콜라 신학자 특히 수도회 학자들은 플라톤이 이상국에서 묘사하는 수호자 계급처럼 자신들은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 청빈과 근면이라는 기독교인의 미덕을 솔선수범했다. 하지만 부의 증가와 시장 경제의 활성화는 일반 시민에게 사유재산을 허용하면서도 부의 공익성에 관해 강조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는 가운데 12세기 르네상스 이후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봉건제와 가톨릭은 13세기말부터 진행된 화폐경제의 발달, 도시의 발전, 상공업의 발흥, 세속 문화의 형성, 종교 개혁의 열망 등과 같은 ‘근대의 봄’에 밀리면서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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