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역사 6: 중세

로마의 쇠퇴

by 박종규

고대 세계는 통상적으로 로마 및 로마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종말을 고했다고 여겨져 왔다. 이 과정은 오랫동안 질질 끌어온 것으로, 종말의 시작은 대체로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비잔티움)을 근거로 하는 동로마제국은 그 이후에도 1천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근대 세계는 15세기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르네상스의 세기로서, 유럽이 고전적 인문주의를 발견하고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극동으로 가는 항로와 신세계(New World)를 발견한 때다. 중요한 상징적 연대는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들에게 멸망한 1453년이다. 그 사이에 있는 시기를 중세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연대가 설정되는 중세는 유럽 역사에서 거의 1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심대한 경제적·사회적 ·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사회에서 사람들은 종교적 관점에서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변화를 이해했다. 여기서 열쇠가 되는 사건은 로마제국이 기독교(Christianity)를 국교로 채택한 일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Emperor Constantine, 272/3-337)는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 (346-395) 하에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고, 비기독교와 이단들은 박해를 받았다. 종교와 정치는 오랜 세기 동안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는데, 이는 지배 엘리트층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비정통 기독교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파 기독교(Arian Christianity,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에 대한 이단)는 시골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가 붕괴하고 이슬람이 나타난 이후 기독교 내부의 분쟁 대신에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파도처럼 밀려온 야만족(barbarian) 침입자들의 공격이 사태의 원인으로 흔히 이야기되지만, 로마제국의 붕괴와 관련해서는 경제적 문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국의 결정적인 시기는 3세기였다. 이 시기에 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동쪽의 침입자들에 묻어 들어온 역병(病) 때문이었다. (53-54쪽)

서양사에서는 로마제국의 흥망사를 중세사와 연관시키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제국의 성립과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과 이슬람 제국으로 인한 동로마 제국의 몰락까지를 다 살펴보아야 한다.


경제사의 관점에서 우리는 소위 생산과 분배라는 하부구조가 어떻게 로마제국 시대에 형성되고 쇠퇴했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지성사의 관점을 중심으로 경제구조의 틀을 분석하기에 칼 마르크스적이라기보다 막스 베버적이다.


헬라의 문화를 모방한 초기 로마와 로마 제국의 초기는 헬라의 다원주의를 그대로 도입하였기에 지역별로 전승된 다신론과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다원적 사회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후에 318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국교로 선포하자 그 후 로마제국은 곧 기독교제국이 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소위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드아학파의 이념적 대립 속에서 지식인층이 결집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결정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학파가 주장하는 예수의 신성을 포함한 삼위일체설과 양성론이 예수의 인간성을 중요시하는 안디옥학파보다 더 제국의 통치이념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금의 공급량도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아마 과거 금의 주요 공급원이었던 새로운 정복이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단순히 상업이 쇠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 공급의 하락과 더불어 동방과의 무역이 붕괴했다.

더욱이 제국은 오직 군사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었고, 도시에는 식량 배급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세금이 과중하게 부과될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당국은 단지 군대와 빈민들을 부양하기 위해 식량을 징발해야 했다.


돈이 필요한 경우에는 통화가 증발되어 화폐의 가치가 하락했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에는 화폐는 순은이었지만, 은 함유량은 250년에는 40퍼센트로, 270년에는 4퍼센트로 떨어졌다. 가격과 임금을 고정시키려고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의 유명한 301년 칙령으로 정점에 달한 여러 황제의 금융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inflation)은 계속되었다.


제국이 몰락하기 전 마지막 수년 동안 일어났던 중요한 경제적 · 사회적 변화 중의 하나는 도시의 쇠퇴였다. 이 도시의 쇠퇴는 중세에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무역이 쇠퇴함에 따라 서로마제국 도시들의 지위도 하락했다. 도시로부터의 전반적인 퇴각현상도 나타났는데, 이것은 성 제롬(StJerome, 347~420)과 같은 기독교 금욕주의자들에게는 속세의 재산을 버리는 일이 사막으로의 은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중세의 경제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앞 장에서 논의한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뿐만 아니라 다른 두 개의 사상적 조류, 즉 유대주의(Judaism)와 초기 기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구약의 시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54-55쪽)

역병과 금 공급의 부족과 은화 가치의 하락은 로마의 재정을 하락시켰고 인플레이션을 증가시켰다. 더욱이 로마 경제의 허브였던 도시국가들 중 식민지 도시들의 쇠퇴로 인한 경제적, 군사적 방어선의 느슨함은 게르만 용병들이 서로마제국을 침공하여 몰락시키는 것을 가속화시켰다.


서로마제국의 통치 이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기원이 된 헤브라이즘 즉 유대주의 혹은 유대교의 정신을 이해해야 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경제적 원리가 어떻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승되었는지를 발견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물론 농경제와 해상무역 그리고 통화경제와 상법에 기반을 두었던 헬라적 경제이념에 보다 공동체주의적 유대적인 경제이념이 어떻게 통합되었는가를 찾아내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분리시키는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다. 부는 이념보다 실제적이기에 부의 분배는 그 사회의 정치-경제 구조를 명확히 보여준다.


저자는 유대주의와 초기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 사상 속에 내재한 경제 원리를 찾아내어 그 사상이 적용된 시대와 사회의 밑그림을 그려낸다. 마치 설계도를 보고 건물의 구조를 복원하듯이 경제 원리를 발견하면 사회 질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막스 베버가 문화적, 정치적, 심리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행동과 사회를 이해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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