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역사 12: 근대

18세기 프랑스에서의 절대주의와 계몽주의 1

by 박종규

절대주의 국가의 문제들


17세기 영국에서 경제문제에 관한 저작의 확산을 야기한 상황은 프랑스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영국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봉건적 제도-몇몇 봉건적 의무들이 사실상 매매되는 상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온존했고, 왕은 절대권력을 지녔다.


부아길베르와 미라보 (Mirabeau)는 자신들의 경제적 견해 때문에 각각 유형과 투옥을 당했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심지어 왕족이 후원하는 살롱에서도 급진적인 견해가 표현될 수 있었고 또 표현되기도 했다. 정치적·사회적 비판도 일반 원리로 정식화되거나 다른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관행들에 대비하여 표현되는 것은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래서 17세기에는 경제문제에 관해 쓰는 프랑스인들은 드물었지만, 18세기 동안에는 그 수가 상당히 늘어났으며, 1750년대와 1760년대에 파리는 많은 지도적 인물들이 모여든 유럽 경제사상의 중심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정책의 골격은 17세기에 1661년부터 루이 14세(Louis XIV, 1643-1715년 재위) 하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장 바티스트 콜베르(1619-1683)에 의해 세워졌다. 콜베르는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경제문제에 관해 글을 쓰지 않았으며 그 주제에 관해 광범위한 독서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이 시기 동안 중요한 중상주의의 한 유형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의 주된 목표는 국민들의 부를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대내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나라를 통일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심각한 금융과 경제문제에 시달렸지만 콜베르의 정책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기근으로 인한 사망이 과거의 일이 된 것은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18세기를 통틀어 식료품 부족이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이런 일은 다른 지역들에서의 식료품 잉여사태와 동시에 일어나기도 했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격고정, 곡물투기 금지, 생산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강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정부는 문제의 핵심에 있던 국내의 식료품 이동에 대한 관세와 장벽을 제거하지 않았다. 또한 정부는 만성적인 금융적 어려움에 직면했는데, 이는 대개 루이 14세와 그 후계자들에 의한 군사적 지출 탓이었다. 국가는 끊임없이 파산 일보직전 상태에 내몰렸다. 국부의 대부분을 소유한 성직자와 귀족들 대부분은 직접적인 과세로부터 면제되었고, 세 부담 자체도 지극히 불균등했다. 징세는 자의적이고 불평등했다.(137-139 쪽)

절대주의(絶對主義, absolutism) 또는 절대왕정(絶對王政)은 군주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정치 체계인 전제정치의 한 형태이다. 사실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특색 지어 주는 독재정치 형태이지만 고대의 국가나 제국에서부터 왕이나 황제는 신과 다름없는 절대권력을 가지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으로 명명되었으며, 로마 제국에서 황제는 신의 아들로 동전에 표기되었다. 예를 들어 예수 시대의 주화에는 Tiberivs Caesar Divi Augvsti Filivs Augvstvs, 즉 시이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신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라고 새겨져 있으며, 중국에서도 황제는 천자天子라 불렀다.


이러한 전제군주정치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상징되는 시민혁명의 시대까지 심지어 오늘날의 몇몇 독재국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항상 경제와 연관되어 있기에 절대왕정이나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생산이나 분배 그리고 교역은 항상 내부의 사회적 갈등과 몰락을 초래한다.


특히 생산력의 변화에 기인한 생산관계의 변화는 사회의 상부구조 소위 권력질서와 그것을 유지하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변혁을 가져오며, 이는 정치/경제사상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18세기 초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가들


루이 14세의 경제정책에 대한 초기 비판가들 중의 한 명은 피에르 드 부아길베르(Pierre de Boisguilbert, 1646~1714)였다. 『프랑스 상론』과 그 이후 20년 동안의 다른 저작들에서 부아길베르는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경제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파멸적인 쇠퇴라고 보았다. 그는 소득이 이전 30년 동안 반감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의 출발점은 교환의 필요성이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교환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화폐의 사용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나 화폐는 그 자체로는 부를 창출하지 않았다. 화폐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활발하게 유통되어야 했다. 부아길베르는 화폐를 계속 유통하게 만드는 것은 소비였으며, 이는 한 사람의 지출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득이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소비와 소득은 등가(價)였다. 그래서 프랑스 소득의 하락은 소비의 하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야기된 것일까?


부아길베르의 대답은 과중한 과세, 돈을 좀 더 빨리 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지 않고 축장하는 부자들에게만 편중된 소득분배, 유산계급의 투자의욕을 떨어트리는 불확실성 등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부아길베르는 번영을 가격체계에 연결 지었다. 번영이 일어나려면 상이한 재화들 사이의 균형 또는 평형상태가 존재해야 하며, 가격들이 상호 간뿐만 아니라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과도 일정한 비례적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부아길베르는 국가가 아니라 자연만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자연에 맡겨두라(laissez faire la nature) -고 결론지었다. 구매자와 판매자는 모두 이윤에 따라 움직이지만, 구매하고 판매할 필요 사이의 균형이 양측으로 하여금 이성에 귀 기울이게 한다. 그래서 비록 개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에만 관심이 있지만,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보편 선에 기여할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안전과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었다.(140-141 쪽)

부아길베르의 경제이론은 시대가 점점 절대왕정의 권력 유지의 수단에서 시장경제나 화폐경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노정을 보여준다. 부의 편향과 빈자에게 불리한 과세제도, 재화들 사이의 가치의 불평등성 등은 자본주의 경제학을 좀 더 시장의 원리에 맞는 원칙들을 발견하게 하였다.


그가 결론적으로 제시한 ‘자연에 맡겨두라 ‘는 ‘보이지 않는 손’을 시장 경제의 원리로 발견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자유방임으로 시작했다가 일정 부분 국가의 관여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수정되었고, 이는 나중에 기본 복지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복지주의로 발전한다.


물론 서구 자본주의 내에서 공산주의의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냉전시대의 체제경쟁은 시장경제의 승리로 끝이 난 듯하였으나 신자유주의와 안보를 명분으로 한 21세기의 블록경제권으로의 재편과 국제금융질서의 불확실성은 초기 자본주의 경제 사상가의 고민을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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