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
삶에 대해 참 말도 많다.
“삶의 가장 숭고한 목표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가 한 말이다. 나머지는 그에 비하면 사사로운 항목들에 불과하다면서.
“그들이 가지런히 줄 쳐진 종이를 주거든
줄에 맞추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써라.” 후안 라몬 히메네스가 남이 줄 쳐 준 대로 살지 말라면서 던진 이야기이다.
“삶을 움직이는 것은 첫째도 열망 둘째도 셋째도 열망이다.” 쿠니츠가 전하는 말이다. 열망으로 가득 찬 자에게 변화는 끝이 없다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끝없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라면서 죽음 앞에 주눅 든 이들의 어깨를 도닥인다.
“삶과 죽음은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자연스러운 변화의 과정이다.” 삶과 죽음은 순환하는 것이며, 죽음은 또 다른 형태의 삶으로 변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삶과 죽음을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던진 이는 장자다.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라면서 죽음을 사유할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는 없으므로, 이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죽음을 슬쩍 옆으로 밀어낸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라며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묶는 이도 있다.
라즈니쉬다.
라즈니쉬는 죽음은 삶을 반영한다면서 말한다.
“삶이 아름다웠다면 죽음은 행복을 드러내고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었다면 죽음은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 될 것이다.”라고.
‘삶, 어떻게?’에 대한 힌트를 주는 듯싶다.
나가르주나도 슬쩍 귀띔을 한다.
“삶은 죽음의 온갖 원인 가운데 놓여 있다.”라고
붓다도 거든다.
“내가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친구를 위해, 적을 향해 온갖 나쁜 짓을 했었다.”라고.
고통과 눈물 한숨으로 얼룩진 삶은?
죽음의 모습이 궁금하다.
삶과 죽음 참 어렵다.
인생이 내 장단에 맞춰 춤추는 게 아니니.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
죽음을 만날 때마다 생각했다.
뭔지.
삶의 세월을 켜켜이 짊어진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지’
삶을 느낄 때마다 생각한다.
뭔지.
오랜 세월 삶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삶에 대해 알 수 있겠지.’
그런데 그 엄청난 미스터리는 전혀 모르겠다.
다행인 건 현명한 이들이 넘친다는 거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살라는
넘치도록 친절한 말들을 공짜로 일러주고
이런 삶 혹은 저런 삶은
이런 죽음과 저런 죽음으로 이어진다며 죽음에 대한 안내도 끝없다.
그럼에도 삶이 어려운 건
삶이 힘에 겨운 건
그리고 죽음이 두렵고
죽음 앞에서 움츠리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