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약속
약속은
거짓희망을 품게 하는 것인지
그저 불편한 것인지
치열함을 또 다른 빡빡한 일상으로 둔갑시키는 것인지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옥죄는 것인지
별일 없이 살아가는 백색의 시간에 시뻘건 물감을 흩뿌리는 것인지…
아니다.
밋밋한 일상에서 자신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를 끌어내는 일이고
하루 동안의 시간에 들어있는 오만가지 기쁨을 발굴하는 일이고
하루의 찬란함을 재발견하는 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날에 복된 욕망을 얹는 일이고
이미 있는 좋은 것들과 오래오래 함께 하는 일이고
자기를 실현하는 일이고
자기를 지켜나가는 일이고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고…
약속은
일상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작은 부활이다.
아내의 약속
갈비찜이 생각난다는 말에
아내는 해 먹자는 말 대신 어디 좋은 데 있는지 찾아보라며 대뜸 ‘내일’ 점심을 말했습니다.
‘그냥 집에서 해 먹지’라는 말이 목구멍을 쑤셨지만 ‘NO!’ 없는 답이 그저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얼른 컴퓨터를 켜고 주변 갈비찜 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안 되겠어!”
“다음에!”
“일이 생겼어!”…
마음 바꿈이 잦았기에 쉽게 바뀌는 마음에 못을 박으려 서둘렀습니다.
한 두어 집 살피던 중 아내의 통화 소리가 반쯤 열린 문틈을 비집고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어, 바빴나 봐, 답이 없어서”
“…”
“어 그랬구나, 이제 좀 괜찮니?”
“…”
“그래~, 그럼, 내일 좀 볼까?”
“…”
“그래, 그럼 내일 점심이나 같이 먹자”
“…”
“영희한테도 전화해 볼까, 같이 보지 뭐”
“…”
아내는 약속을 잡았습니다.
방금 전 나와한 약속은 단 5분여 만에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슬그머니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 앞에서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언가에 밀리는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웬일인지 마음은 참 잦은 일임에도 무뎌지지 않습니다.
그냥
무언가를 잃은 듯한 기분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듯한 기분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
‘지금 여기’에 있는 진짜 삶을 빼앗긴 기분
역할을 잃고 고독과 무료함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
삶의 의미를, 효용감을 잃은 듯한 기분
권태의 사막으로 홀로 쓸쓸히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
나를 필요로 하는 이도 그런 곳도 없는 듯한 기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된 듯한 기분
…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 금지된 또 하나의 상처가 만들어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