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니 ‘발품 컨셉’-커피]#부산(7)
부산 지하철 2호선 벡스코역에 정차하는 순간 승객 중 일부가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한다. 목표는 2016년 12월 운행을 시작한 광역전철 동해선. 아마도 운행 시간이 잦지 않은 터였을 듯 하다-나중에 확인하니 실제 배차 간격은 평일 기준, 15분에서 30분 정도였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낯선 환경에서 촉수를 내밀 듯 현지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부산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 덩달아 걸음에 속도를 냈다. 덕분에 오랜 기다림 없이 원하는 전철을 탔다.
차량 안에서 동해선 노선도를 보니 종착역이 흥미롭다. 부산에서 탔는데 종착지는 ‘태화강역’, 울산이다.
역을 지나칠 때마다 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많다. 평일 낮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한적한 전철, 드디어 도착한 곳은 ‘월내역’이다.
역 밖으로 나오니 전철보다 더 한가한 어촌 마을이 나온다. 정감 어린 간판도 보인다. 커피와 술을 함께 파는 ‘역전’ 다방. 어촌 마을과 제법 어울린다. 커피를 마시러 왔지만, 아쉽게도 ‘역전’ 다방이 목적지는 아니다.
월내역에서 1km도 안 되는 곳에 커피를 마실 곳, 목적지가 있지만 체감상 거리는 실제보다 멀게 느껴진다.
늘 그렇듯 ‘낯섦’이 유발하는 공포심과 경계심 탓이다. 인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때로는 차량의 위협을 감수하며 도로 위를 걸어야 하는 것도, 덩굴로 덮인 길가 집 앞 ‘특별순찰구역’ ’공폐가’ ‘출입금지’라는 팻말 속 내용도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기어이 도착한 목적지 ‘웨이브온’. 평일 낮 시간에 맞지 않게 주차장을 가득 채운 차량이 ‘기어이’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Relex on the Wave… 파도 위에서 휴식을’.
입구로 들어서기 전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조명 아래 적힌 문구(사진)다. 웨이브온이라는 이름에 대한 친절한 설명인 동시에 이곳을 찾는 이들이 경험했으면 하는 카페 주인의 바람이 담겨 있다.
괜한 기대감이 들면서도 얼마나 ‘그 설명’에 맞는지 벼르게 된다.
설명을 확인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 2m 폭의 뚫린 공간은 마치 카페 안에서 보고 경험하게 될 예고편을 액자 형식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액자 틀 안엔 하늘과 바다, 소나무가 들어있다.
그리고 카페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순간 본편이 시작된다. 어느 공간이건 풍경을 마주한다. 파도 소나무 시골길 해안가 그리고…
풍경을 바라보는 자세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누워서 누군가는 앉아서 누군가는 서서… 좌석을 채운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연령 성별까지…
월내리 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공간’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회색 빛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엇갈리 듯 얹힌 건물은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민간 부문 본상을 받았다.
이를 웨이브온을 건축한 이뎀도시건축 곽희수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땅과 밀착된 건축은 대지의 형상과 기준을 따르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그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쌓아 올린 콘크리트 덩어리(매스)는 다채로운 풍경과 접촉하도록 했더니 인간의 협소한 시각적 한계를 건축이 보완할 수 있게 됐다. 방문자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과 장소가 무한한 자연의 풍토로 확장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운이 좋았다. 평일 낮 시간이어서인지 공간마다 빈자리가 제법 있었다. 자리만 세 번이나 옮겼다. 2층, 3층 그리고 1층 외부 평상… 각 곳에서 다채로운 풍경과 접촉할 수 있었다.
웨이브온의 힘은 시선의 만족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앞서 ‘건축과 커피의 닮은 점’을 물었을 때 곽희수 대표는 카페라면 ‘환대’의 공간이 돼야 한다고 단언했다. 건축가의 생각대로 시간과 돈을 들여 웨이브온을 찾은 이들은 카페에서 대접받는 느낌을 받는다.
내부 공간은 1~3층 중앙을 전부 뚫어 층고를 높여 탁 트인 느낌이 들고 연면적 494.66㎡(약 150평) 공간은 훨씬 넓게 느껴진다.
어느 공간에 앉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배려도 놓칠 수 없다.
곽희수 대표는 “카페에 가면 사람들은 늘 가장자리에 앉는다. 그러다 보니 가운데 공간은 죽은 공간이 된다”면서 “모두가 밖을 보며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함께 한 이들과 편하게 대화해도 좋고 홀로 가서 풍경만 즐겨도 좋다. 풍경을 즐기는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다. 곽희수 대표의 시그니처이기도 한 평상(平牀) 위에서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평상은 어른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널찍한 마루다. 마루 위 빈백에 몸을 기대면 눈앞 해송이며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마당의 개념을 확장한 곽희수 대표의 평상은 2014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청주 에프에스원에서도, 2021년 기장의 또 다른 장소에 문을 열고 2022년 부산건축상을 수상한 코랄라니에서도 만날 수 있다.
루프탑에서도 파라솔 아래 빈백에 앉으면 또 다른 시선으로 기장 앞바다를 볼 수 있다.
“사용자의 감동이 없다면 건축은 기능적 공간에 불과하다. ”
곽희수 대표의 말이다.
건축주를 위한 배려도 남다르다.
곽희수 대표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차이를 두 개의 영어 단어로 정의했다. ‘Demand’와 ‘Require’. ‘요구’라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시선은 다르다. 건축주는 필요에 따라 요구(Demand)하고, 건축가는 건축주와 사용자가 무엇을 요구(Require)하는지 본다. 웨이브온에 건축주의 경제적 효율성은 물론 커피사랑의 마음까지 담은 이유다.
외벽 마감재인 노출 콘크리트에 타공한 비스듬한 타원형도 독특하다. 이를 웨이브온은 ‘Coffee Bean Shape Concrete Hole’이라는 제목과 함께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과 건축가의 만남은 직선의 결정체인 건물에 곡선의 미학을 심어 주었다”고 설명한다.
건축주의 커피 열정을 건축가가 커피 원두 모양의 콘크리트 구멍으로 표현한 셈이다.
곽희수 대표는"노출 콘크리트 타공은 국내에서 잘 쓰지 않은 공법이다. 보석처럼 세공했다"고 말했다.
경제적 요건도 만족했다. 하루 평균 웨이브온을 찾는 사람은 3000명이나 된다.
경치에 빠져있다가 잊고 있던 카페의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바로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을 때다.
카페의 본질인 커피 맛, 디저트의 맛을 위한 웨이브온의 노력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건물로 들어서기 전 바로 옆에는 직원의 출입만 허용하는 특별한 집 한 채가 있는데 바로 원두를 볶는 공간이다.
커피 메뉴는 고소함을 좋아하는 사람, 산미를 선호하는 사람까지 취향껏 구성했다. 웨이브온의 시그니처 음료는 ‘월내 라떼’다. “월내리 웨이브온에서만 맛볼 수 있는 베르가못 향이 풍부한 시그니처 라떼”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커피 본연의 맛을 보기 위해 과감히 라떼를 포기하고 브루잉 커피를 선택했다.
디저트도 공을 들인 티가 난다. 웨이브온의 상징색인 ‘파란색’에 맞춰 블루오션웨이브 케익을 주문했더니 진주를 품은 조개가 찾아왔다.
직접 착즙한 레몬즙으로 만든 레몬 타르트, 인절미 쉬폰과 아몬드 크럼블이 조화로운 인절미 쉬폰 케이크 등 모든 디저트 메뉴를 맛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다.
카페를 찾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신경 쓴 흔적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화장실 위치 등 찾는 사람이 많음에도 번잡하거나 혼잡하지 않은 건 구축된 시스템 덕이다. 먼저 들어올 때부터 절차에 따라야 한다. 놀이공원이나 지하철처럼 출구와 입구를 구분하고 게이트를 만들었다. 입장 게이트로 들어가면 앞서 있는 사람을 지루하게 기다릴 틈이 없다. 입장하면서 화장실 위치 등 제시된 카페 이용 방법을 읽다 보면 다음은 메뉴판이 나온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문 순서가 되고 마음 속에 정해 둔 메뉴를 주문하면 된다. 시간은 절약되고 불필요한 질문은 사라진다.
영수증은 공연 티켓의 기능을 한다. 뮤지컬이나 연주회 인터미션 때 화장실을 가려면 티켓을 챙겨야 하듯, 카페를 나갔다가 다시 입장하려면 영수증을 가져가야 한다.
카페에 자리가 없으면 직원을 통해 카페 외부 독채도 사용할 수 있다.
웨이브온이라는 브랜드 메이킹에도 애정을 쏟은 게 고스란히 나타난다. 컵이며 빨대 냅킨을 보면 파란 바다와 하얀 포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떠오를 정도로 청량감이 느껴진다.
접근 환경도 좋아졌다.
“이제 전철도 다녀요?”
동해선을 타고 갔다는 말에 곽희수 대표는 이렇게 반문했다. 2016년 12월 웨이브온의 문을 열었을 당시 동해선은 1차 개통을 했다. 웨이브온이 있는 월내역은 2021년 2차 개통 때 운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환대' 받는 공간은 건축 맛 그리고 시스템의 결합을 통해 완전체가 됐다.
곽희수 대표는 건축가는 건축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찾아주는 ‘파인더’라고 했다. 웨이브온도 파인더 역할을 하는 건축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인적이 많지 않은 해수욕장 절벽에 웨이브온이라는 뷰파인더를 대니 소나무와 바다가 풍경이 됐으니 말이다.
여기에 개인적 의견을 하나 더 보태자면… 파인더에서 나아가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줬다.
1층 외부 평상에 앉았을 때 문득 보인 풍경 때문이었다. 이 풍경은 마르셀 뒤샹의 1917년 작품 ‘샘(Fountain)’을 떠올리게 했다.
뒤샹은 당시 화장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평범한 남성용 소변기에 제작사 이름(R. Mutt)만 서명해 미국 독립작가협회가 주최하는 뉴욕 그랜드 센트럴 팰리스 전시회에 제출했다.
“이게 무슨 예술이냐”는 협회 위원들의 불평에 전시회 큐레이터는 ‘샘’을 전시장 한 구석으로 치웠다. 이후 작품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려졌고 존재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샘’은 “예술에서 중요한 건 대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개념을 만드는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20세기 이후 예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평가되며 예술이 됐다. 사물을 볼 때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배제한 채로 본다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의미도 부여했다.
현재 뒤샹이 만든 17개의 복제품이자 원본은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웨이브온 평상에 앉아 ‘샘’을 떠올리게 된 건, 색다른 풍경 덕이다. 해안가 풍경 너머로 원자력발전소의 회색빛 돔이 보였다.
문득 2017년 고리원전 1호기 가동 중단을 앞두고 기장의 발전소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역 주민들에게 원전은 일상의 풍경이었지만, 외지인의 입장에선 원전의 회색빛 돔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한 감정이 생경함보다 더 컸다.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에 1급 보안시설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웨이브온에서 보이는 원전은 그때의 원전과 달랐다. 풍경이 됐다.
평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둥근 콘크리트 돔의 원전을 거부감 없이 바라봤다. 루프탑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사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소변기가 전시장이란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된 것처럼, 원전은 커피향이 덧입혀지면서 색다른 풍경이 됐다.
웨이브온은 풍경만 바꾼 게 아니다. 지역도 바꿨다.
웨이브온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기장의 카페 문화는 확산됐다. 부산일보는 “임랑해수욕장에서 동부산 해변까지 펼쳐지는 20km 안팎의 해안길은 온통 카페 천지다. 흔히 ‘갈맷길 1코스’로 불리는 지점”이라며 "2010년 이후 기장군청에 영업 신고를 한 카페만 88곳(2021년 현재)에 이른다”고 했다.
스타 건축가인 유현준 교수가 건축한 카페 로와맨션, 이로재 출신의 가가건축 안용대 건축가가 설계한 메이크 씨 커피도 기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웨이브온에서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며 사진을 찍으니 어느 새 저녁 어스름이 됐다. 낯섦에서 오는 경계심은 어두울 때 극대화된다. 그런데 낯선 지역에서 가졌던 외지인의 경계심은 놀랍게도, 어둑해진 뒤 말끔히 사라졌다.
'월내역'으로 돌아가는 길. 1km의 거리, 10분의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환대하는 공간에서 마신 커피는 마음의 여유를 줬고 낯섦에서 오는 두려움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