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부록(3)
‘93’.
한 달 여 시간 동안 유럽에서 커피 마시겠다며 찾은 카페와 레스토랑 수다. 1300년대 문을 연 레스토랑부터 글로벌 프랜차이즈카페까지 종류도 내용도 다양했다.
마신 커피의 수는 방문한 카페의 수보다 훨씬 많을 듯하다. 나름 커피 맛을 보겠다며 찾은 곳들이니 에스프레소는 기본으로 마시고, 카페에서 추천하는 커피도 함께 주문했다. 때론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오던 중 다른 사람이 마시는 커피가 궁금해 다시 자리에 앉아 추가 주문하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는 양만큼 카페 경험이 쌓였고 새로운 게 보이기 시작했다. 공간의 형태, 메뉴판의 구성 그리고 카페가 가진 이야기에 따라 카페 안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점도 알게 됐다.
그렇게 유럽의 카페를 구분하는 기준이 생겼다.
영화 ‘미드나잇인파리’는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이 약혼녀와 파리를 여행하던 중 자신이 동경하던 시대인 1920년대로 타임슬립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그 시대, 한 카페에서 파블로 피카소, 살바토르 달리 등 미술계 인사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투르트 스테인, 피츠 제럴드 부부 등 문학계 인사는 물론 콜 포터, 조세핀 베이커 등 음악계 인사들까지 분야가 다른 예술가들을 만난다.
예술계 인사들의 교류가 일어난 바로 그 장소, 1885년 지금의 파리 6구 생제르맹 거리에 문을 연 카페 레뒤마고(Les Deux Magots)다.
영화 속 카페는 실제 그 시대 자유를 꿈꾸던 예술가들이 교류하던 곳이었다.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뜨겁게 예술을 논하고 시대를 이야기했다. 이는 레뒤마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164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이 문을 연 뒤 유럽 대륙의 카페 또는 커피하우스는 커피를 매개로 철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향유하는 공간이 됐다. 정치와 경제를 논하면서 정보를 얻는 창구 역할도 했다.
영국에선 1페니만 있으면 누구나 커피하우스에 입장해 정치와 사회적 논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평등과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하루 종일 커피하우스에 죽치고 앉아 정치적 견해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커피하우스 정치인’이라 일컫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귀족 샤를 루이 폰폴리츠 남작은 1728년 런던에서 본 커피하우스를 이렇게 표현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가는 게 영국인에게는 일종의 규칙이었는데, 그들에게 (커피하우스는) 비즈니스와 뉴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신문을 읽으며 종종 서로를 바라보는 곳이었다.” ([걷다 보니 ‘발품 컨셉’-커피]#부산(3) 참조).
이런 카페 문화는 21세기에도 ‘일부’ 카페를 통해 계속되고 있었다.
외부에서 일을 할 때면 주변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헤드셋을 착용해 왔다. 헤드셋을 통해 나오는 음악. 유튜브에서 찾은 별다방 실시간 매장 음악이다.
그런데 유럽의 ‘일부’ 카페에선 헤드셋을 찾지 않았다. 랩탑도, 스마트폰도 꺼내지 않았다.
음악 소리를 끄니 그제야 들리는 소리.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속닥이는 소리, 찻잔이며 접시에 포크나 나이프가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손님과 카페 직원이 주문할 때 주고받는 유쾌한 대화 소리는 덤이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어느새 음악이 된 셈이다.
그렇다고 음악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대놓고 들려준다. 영화 미드나잇인파리에서 콜 포터의 연주 장면처럼 카페들은 시간을 정해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대화 소리만으로 공간을 채우는 데 ‘음악의 부재’만 그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다.
테이블 세팅도 대화 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한 몫한다. 오밀조밀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정도로 빽빽하게 자리한 테이블 말이다.
벽면을 등진 채 홀 중앙을 바라보도록 놓인 테이블은 옆 테이블과의 간격이 넓어야 10cm다.
덕분에 벽면을 등지고 앉으려면 카페 직원이 테이블을 빼 줘야 했다. 파리 레뒤마고와 빈의 카페 모차르트를 찾았을 땐 자리에 앉은 뒤카페 직원에게 이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이건 테이블이 아니라 문이에요.”
테이블 간 간격은 옆 테이블 손님과의 간격을 의미하기도 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듯 착각하게 만드는 좁은 거리는 마음의 거리까지 좁혔다. 경계는 사라지고 대화는 수월했다.
덕분에 ‘나 홀로 여행객’도 외로울 겨를이 없었다. 파리로 신혼여행을 온 대만의 젊은 부부, 두바이에서 출장차 고향인 파리에 왔다가 휴일 커피를 마시러 왔다는 61세 노신사, 딸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 중이라는 미국 시카고 출신의 모녀 여행객….
같은 공간 안에서 바싹 붙어 앉은 테이블, 음악의 부재는 이들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대화의 주제도 다양했다.
대만에서 신혼여행 온 신부는 이화여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경험을 유창한 한국말로 해 줬다. 61세 노신사와는 아시아와 유럽의 근로조건과 은퇴연령의 차이를 교환한 뒤 적정한 업무량과 은퇴 시점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딸과 여행 중인 미국인 어머니는 모녀간 여행에 대한 행복감을 나누며 부모님과의 여행을 권유했다.
음악이 없고 옆 테이블과 가깝다고 해서 꼭 대화할 필요는 없다. 낯선 이들과의 대화가 멈추더라도 심심할 겨를은 없어서다. 카페 안에선 볼거리, 읽을거리로 넘쳐난다.
‘일부’ 카페는 토론과 대화의 장소에서 나아가 문화를 향유하며 신문 등을 통해 정보를 얻었던 과거 유럽의 커피하우스와 다르지 않다.
이는 앞서 폰폴리츠 남작의 1728년 런던의 커피하우스 설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물며 폴란드 크라쿠프의 게토에 생긴 ‘예술가 카페(Kawarnia Plastyków Café)’도 생계가 어려운 예술가를 지원하는 곳이면서도 공연과 전시회를 여는 예술의 공간이었고 신문과 책을 읽으며 정보를 교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 카페를 찾을 때면 눈길을 끈 게 있었다. 이제는 온라인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종이 신문이었다.
도서관에서나 봄직한 신문 스크랩은 카페에서도 왕래가 많은 곳에서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의 종류도 다양했다.
빈에선 프랑스 신문인 ‘르 몽드’를 볼 수 있었고-보기만 했다-파리에선 미국의 ‘뉴욕 타임즈’를 읽을 수 있었다.
신문 외에도 읽을 건 또 있다. 테이블에 올려진 메뉴판도 꽤 괜찮은 읽을거리였다. 하드커버로 양장한 두꺼운 메뉴판은 메뉴부터 소개하지 않는다. 대신 카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곳에서 일한 이들을 소개한다. 메뉴는 페이지를 한참 넘겨야 비로소 나온다. 커피와 차, 디저트와 식사 종류에 대한 설명과 만든 과정을 소개하기도 한다. 메뉴판은 말 그대로 카페를 알려주는 ‘역사책’인 셈이다.
아예 카페의 역사를 책으로 출간해 카페에 두는 경우도 있다. 테이블 위 QR코드를 찍으면 연결된 홈페이지를 통해 카페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카페도 있었다.
이쯤되면 ‘일부’ 카페가 음악의 부재, 빽빽한 테이블 셋팅과 이야기를 담은 메뉴판이라는 공통점 말고 진짜 공통점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듯하다.
바로 19세기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점.
**메인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