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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Jan 08. 2024

전쟁, 비엔나커피를 만들다

커피부록(4)

이해하려면 ‘경험’ 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관광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이 짧은 문장엔 관광청의 자신감이 응축돼 있는 듯 보인다. 이해해야 할 대상이자 자랑은 빈을 포함한 오스트리아의 ‘커피하우스’, 즉 카페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커피하우스를 경험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관광청 설명은 이렇다.


“…(단지) 카페인을 보충하기 위해 유서 깊은 카페를 들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커피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편안한 사색과 오락에 관한 문화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커피하우스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의 개념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유네스코도 이 같은 오스트리아의 커피하우스 문화에 주목했다. 2011년 오스트리아 커피하우스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일부’ 카페를 경험해야 할 이유다.


 그리고 경험해야 할 그 오스트리아 ‘일부’ 카페의 시작을 보려면, 16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은 비엔나커피와 크로와상을 만들었다”

튀르키예 전통 복장을 입은 쿨치츠키. 출처 : 바르샤바국립박물관

폴란드 국적의 한 남자가 지금은 튀르키예라 불리는 터키 전통 복장에 손에는 뿔을 들고 허리띠엔 돈 주머니를 맨 채 창문 앞에 서 있다.


 이 남성 이번엔 색다른 풍경 속에 있다. 복장은 그대로인데 유럽 복식을 착용한 사람들로 꽉 찬 실내 공간 안에서 커피잔과 주전자를 들고 있다.

 

 예르지 프란시스젝 쿨치츠키(Jerzy Franciszek Kulczycki)라는 길고 어려운 이름을 가진 이 남자,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역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쿨치츠키는 앞서 언급한 짧은 설명에서도 엿볼 수 있듯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다. 1640년(추정)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인 당시 폴란드의 삼비르 라이온(Sambir Raion) 쿨츠치치(Kultschytsi)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튀르키예 헝가리 루마니아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덕분에 동양무역을 위한 빈 상인협회인 오리엔탈 컴퍼니(Oriental Company)의 베오그라드 지점에서 번역가로 일하고 빈 근처 레오폴트슈타트에 정착해 무역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아예 튀르키예로 가 번역가이자 외교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무역업을 하던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진 건 빈에 있었던 1683년이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30만(추정) 대군을 이끌고 유럽의 중앙에 있는 오스트리아를 총공격했고 그해 7월 14일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의 성채를 포위하면서 ‘비엔나 전투’가 시작됐다. 당시 빈의 주둔군은 1만 1000여 명에 불과해 오스만 군은 보급로만 막으면 빈이 스스로 항복하리라 봤다.

영화 '비엔나전투 1683'. 출처 : 네이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트 1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두 달간의 포위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9월 초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만 군이 총공세를 퍼부으며 무너진 12m 틈을 통해 요새 안으로 들어오며 위기를 맞았지만, 함락 직전 전쟁 상황은 급변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 작센, 바이에른, 바덴, 스바비아의 독일군,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기병대가 참여한 카톨릭 신성연맹이 총사령관인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의 명령에 따라 후방 공격을 시작했다. 전세는 뒤집혔고 유럽을 다스리려던 오스만투르크의 꿈은 좌절됐다.


 바로 이 지원군이 오는 데 역할을 한 사람이 쿨치츠키였다. 그는 빈이 포위된 지 5주가 지났을 때 도시 방어 사령관이던 스타흐렘베르크 백작으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메시지를 외부로 보내는 메신저 역할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면 성채를 둘러싸고 있는 오스만 주둔군의 진영을 통과하는 방법 밖엔 없었다.


 그해 8월 13일 오스만 군의 옷을 입고 하인인 얀 미하워비츠와 함께 오스만 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독일의 작가 에버하드 베르너 하펠이 1688년에 쓴 책 ‘외래종의 외래종 백과사전(Thesaurus Exoticorum)’은 모습을 바꿔 적진을 가로지르던 쿨치츠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날이 조금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터키 텐트의 바다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는 동료와 함께 계속 전진했다….”


 외부로 나간 그는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로렌 공작 카를 5세와 접촉해 도시의 절박한 상황을 알렸고 오스만 주둔군의 진영을 통과하면서 얻은 정보도 전달했다. 같은 방식으로 빈으로 돌아온 그는 지원군이 올 거라는 소식을 전했고 이는 빈에 있던 군인과 시민들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결국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승리로 끝났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폴란드 국적의 영웅 쿨치츠키를 잊지 않았다. 시의회는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보상했고 레오폴트슈타트에 집도 줬다. 1년 뒤 빈 시민권을 주고 황제의 터키어 번역자로 임명도 했다.

 

 수많은 보상 중에서도 쿨치츠키에게 의미 있는 선물은 따로 있었다. 폴란드 국왕 소비에스키가 쿨치츠키에게 오스만 군이 퇴각하며 두고 간 전리품 중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의외의 아이템을 선택한다.


 바로 ‘이상한 곡물’이 들어있는 300개(?)의 포대였다. 모두들 이 곡물이 낙타의 음식이라 보고 버리려 할 때 쿨치츠키는 그 곡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전쟁이 나기 전 이스탄불에서 경험한 커피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 검은 음료의 매력을 모를 리 없었다.

쿨치츠키와 카페 풍경을 그린 유화 '"To the blue bottles”: old Viennese coffee house scene' 출처 : artnet

 커피콩을 확보한 그는 빈에 카페를 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씁쓸한 데다 신맛 나는 음료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제는 카페 주인이 된 쿨치츠키는 꿀, 설탕, 그리고 결국 우유를 첨가해 달콤 쌉싸름한 획기적인 커피 메뉴를 만들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비엔나커피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비너 멜란지(Wiener Melange)였다.  

 

지금도 카페는 커피와 함께 크로와상을 제공하는 곳이 많다.

 쿨치츠키는 카페에서 커피만 주지 않았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쿨치츠키는 오스만투르크 의상을 입고 손님들에게 초승달 모양의 빵 또는 과자를 제공했다.

 

  이 빵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크로와상(Croissant)’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우리가 터키를 먹어버렸다”는 자축의 의미를 담아 오스만투르크의 국기에 그려진 초승달 모양으로 빵을 만들어 이웃과 돌려 먹었다.


 그리고 이 빵을 음악 용어 ‘점점 더 세게’를 뜻하는 크레센도(Crescendo)의 프랑스식 발음인 크로와상이라 불렀다. 프랑스에선 초승달을 바로 ‘점점 커진다’, ‘자라난다'는 뜻을 가진 크로와상이라 했다


전쟁이 만든 비엔나커피와 크로와상을 먹고 마시는 오스트리아 커피하우스 문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21세기, 쿨치츠키 찾기”


 세월이 흘렀지만,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전 세계 커피가 있는 곳에선 숨은 그림 찾기처럼 쿨치츠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콜시츠키가세 모퉁이 건물에 있는 쿨치츠키 조각상.

 먼저 빈 4구 거리인 콜시츠키가세(Kolschitzkygasse)와 10구 거리 파보리텐슈트라세(Favoritenstraße)가 맞닿은 지점에 가면 오스만투르크 의상을 입고 커피를 대접하는 쿨치츠키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쿨치츠키 조각상이다.


 1862년 빈 시는 4구 거리에 쿨치츠키의 이름을 따 콜시츠키가세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 거리에 서 있는 건물에 카페 문을 연 주인은 1865년 건물 위에 쿨츠치크 조각상을 세웠다.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에도 그를 기리는 명판이 남아있다


 오늘날 커피 산업에서도 쿨치츠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럽 곳곳의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커피원두는 물론 설탕 커피잔 등에서 타르부슈(Tarboosh)라는 빨간색 터키모자를 쓴 꼬마 소년을 만날 수 있다. 이 캐릭터는 율리어스 마이늘(Julius Meinl)이라고도 알려진 율리어스 마이늘 인터내셔널의 로고다. 오스트리아 빈에 본사가 있는 이 회사는 커피, 고급 식품 및 기타 식료품을 제조 및 판매하는 업체로 쿨치츠키의 전통을 따른다고 강조한다.


 카페컨터 쿨치츠키(Kaffeekontor Kolschitzky)는 대놓고 쿨치츠키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회사도 쿨치츠키의 서거 325주년인 2019년 3월 세워졌다. 생두를 로스팅해 유럽 전역에 판매하는데 Kaffee는 커피, kontor는 무역회사 또는 상업지점을 뜻한다.


카페컨터 쿨치츠키(왼쪽)와 율리우스 마이늘 출처 : 카페컨터 쿨치츠키 홈페이지

 

 물론 이 회사가 커피만 판매하는 게 아니다. 바리스타와 커피 전문가를 위한 교육 센터를 운영하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커피 문화를 알려주는 커피투어(coffee walkers)를 진행하고 있다. 커피투어 진행자는 스페셜티 커피협회(SCA) 공인 트레이너이자 심사관인 뤼디거 에거스다.


 쿨치츠키의 흔적은 오스트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에도 있다. 2000년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서 커피광이자 음악가인 제임스 프리먼이 시작한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 커피(Blue Bottle Coffee)’다.


 쿨치츠키는 ‘비엔나전투’ 직후 빈의 슈테판 대성당 인근 싱거스트라세(Singerstraße)의 한 집에서 커피하우스를 열었다가 더 큰 건물로 이동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쿨치츠키가 두 번째로 세운 카페 이름은 ‘Hof zur Blauen Flasche’이었는데 이 이름을 짓는 데 아이디어를 준 건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레오폴디나 메이어다.


 두 사람은 결혼하기 전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만났다. 도시를 방어하다 부상을 입은 쿨치츠키를 메이어는 파란색 병에 담긴 약으로 간호해 줬다.

샌프란시스코 민트스트리트에 있는 블루보틀 커피 1호점.

  '푸른 병의 집'이란 뜻의 'Hof zur Blauen Flasche'은 여기서 나왔다. 이쯤 되면 미국의 블루보틀 커피라는 이름이 나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블루보틀을 만든 프리먼도 홈페이지에 “콜시츠키의 용감한 행동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블루보틀이라 지었다”고 했다.


 현재까지도 빈에 최초로 카페를 세운 사람, 크로와상을 개발한 사람 등 역사적 사실을 두고 논란은 있다. 하지만 빈은 공식 웹사이트에 쿨치츠키를 오스트리아 커피하우스 문화를 이끈 인물로 꼽는다.

 

 세계 최고의 커피 도시를 얘기할 때 오스트리아와 빈을 빼놓을 수 없듯 커피 문화를 이끈 사람으로 쿨치츠키를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참고  자료 : 폴란드 빌라누프 소비에스키 박물관, 폴란드 문화 및 국가유산부 산하 아담 미츠키에비치 연구소의 정보 제공 웹사이트 Culture.pl


**메인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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