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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Dec 16. 2023

커피, '삶의 가치'를 논하는 ‘갑.툭.튀.’

커피부록(2)

‘갑.툭.튀.’


 한때 신조어였던 ‘갑.툭.튀.’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나 물체가 나타났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의 줄임말이다.


 그런 ‘갑.툭.튀.’를 커피 컨셉으로 유럽을 다니며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런 경험은 10여 년 전 우연히 본 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했다. 2012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Caesar must die / Cesare deve morire)’였다.


 이탈리아 한 교도소의 재소자 교화 프로그램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영화를 기록이라 표현한 이유는 재소자들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메시지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난 뒤 교도소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담담히 전할 뿐이다. 메시지를 읽거나 감동을 느끼는 건 관객의 몫이다. 


 여행 중 이 영화가 떠오른 건 영화 속에서 ‘갑.툭.튀.’처럼 나타난 모카포트 때문이다. 그것도 감방 안에서. 영화를 본 뒤 재소자들조차 사용할 정도로 값싸고 형편없는 커피 기계라며 모카포트를 평가절하했다.

출처 : 네이버

 이런 그릇된 생각을 고쳐 잡게 한 건 이탈리아를 두 번째로 방문한 2014년 피렌체에서다. 모카포트하면 떠오르는 브랜드 비알레티 매장에서 직원은 “모카포트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일상”이라 자랑스럽게 말했다. 재소자를 포함해서.

 그리고 2019년 이 영화를 소개하는 해외 영화사이트에서 본 댓글은 선입견을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 Life meaning life. At least they get their own Moka pot.”


  아마도 ‘삶의 의미는 삶(Life meaning is life)’을 말하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 삶’에 최소한(at least)의 의미와 가치가 되는 게 ‘모카포트’ 그리고 커피였다.


 이처럼 유럽을 다니면서 ‘갑.툭.튀.’처럼 만난 커피는 커피 그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 사이 카페”


 여행지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갈 때면 나름의 공식을 적용한다. 어느 박물관이건 하루 만에 모든 걸 보는 건 불가능하니 그 박물관의 시그니처라도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박물관에 입장하면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이나 유물이 있는 곳으로 ‘직행’했다.

레오폴트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첫 일정인 레오폴트미술관(Leopold Museum)도 다르지 않았다.

 레오폴트미술관은 에곤 실레, 구스타프 클림트 등 20세기 전반의 오스트리아 화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현대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에서 나름 시그니처로 삼은 건 에곤 실레와 그의 작품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에곤 실레 컬렉션을 자랑하는 곳이니 당연했다. 3층에서 만난 그의 작품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 인간의 육체를 통한 성적 욕망을 자신만의 화풍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4층으로 갈 차례였다. 에곤 실레에게 영향을 준 구스타브 클림트의 작품과 독일어로 ‘제체시온’이라 불리는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제체시온은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문화적 황금기라 불리던 때를 이끌던 사조다.

 분리라는 뜻이 있는 제체시온은 이전의 시기, 또는 시대와 분리한다는 의미에서 가져왔다. 레오폴트미술관이 설명한 제체시온은 다음과 같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월을 일부 사람은 ‘폭풍우가 오기 전의 고요함’으로 묘사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모든 삶의 영역이 모더니즘을 향해 큰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스트리아에게 신나는 시기였다… 음악은 조화의 토대에서 벗어났고 그림은 (공식화된) 표현으로부터 해방의 길을 찾았다.”

1902년 14회 제첸시온 전시회에 맞춰 그 멤버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의자에 앉은 사람이 구스타브 클림트.

 이 같은 뉴아트 사조의 움직임은 오스트리아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프랑스는 ‘아르누보’, 독일은 ‘유겐스틸’이라는 명칭으로 뉴아트 사조를 이끌었다. 오스트리아 제체시온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 초대회장을 역임한 클림트였다. 에곤 실레는 그 영향을 받았다.


 뉴아트 형태는 아르누보의 거장인 알폰스 무하나 클림트의 작품만 떠올려도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회화나 조각, 건축은 화려하면서도 장식미와 곡선미를 강조했다. 


 그렇게 학습된 내용을 복기하며 계단을 올랐는데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19세기 건축가인 아돌프 로스와 그가 설계한 카페뮤지엄(CAFÉ MUSEUM)이 나타났다. 카페뮤지엄은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오스트리아 빈에 가면 꼭 찾아가라며 알려준 곳이었다(부산 6편 참조). 


레오폴트 미술관 4층에 가면 아돌프 로스의 전시공간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 ‘뜻밖’의 광경이라 표현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회화나 조각 등을 전시하는 공간이라는 편견을 깨듯 건축가를 소개해 놀랐다. 무엇보다 제체시온과는 결이 다른 길을 걸었던 건축가 로스를 제체시온의 작가, 건축가를 소개하는 공간에서 알리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로스는 현대산업사회로 넘어가던 시대정신을 건축과 가구에 투영했다. 그 방식은 무미건조하며 단순화된 형태였다. 그의 건축 방식을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만 했다. 레오폴트미술관이 설명한 당시 빈의 건축 형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빈은 1858년과 59년에 옛 도시 요새들을 철거한 뒤 건축 도시로 변화를 시도했다. 변화의 핵심엔 건축이 있었고 그에 맞게 주제도 설정했다. ‘역사적 건축 양식을 빈에 맞게 의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도시의 행정 건물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시청은 북유럽 고딕 양식을 따랐고, 인문학에 초점을 맞춘 과학 중심의 대학 건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건축 양식을 가져왔다. 의회 건물은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기원을 회상하기 위한 의도로 지어졌다.


  화려한 장식의 건축물들이 빈을 대표하고 있을 때 로스는 장식의 필요성을 무시한 건축물을 미하엘 광장에 만들었다. 그의 대표적 건축물인 로스 하우스였다. 온갖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다. 보수적 취향이 확고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 건물을 혐오했다. 비평가들도 벽의 중간까지 매끈한 대리석을 붙이고 장식 없이 단순하게 격자 형태로 배치한 창문을 두고 ‘눈썹 없는 창문’이라 조롱했다. 거센 비난에도 장식을 배제한 로스의 대담한 건축은 이후 많은 숭배자를 만들었다.


 레오폴트미술관은 그런 로스 하우스를 “증오의 대상이자 현대 건축의 이정표”라는 애정이 담긴 설명과 함께 전시 공간 한 켠을 카페뮤지엄의 내부 사진과 가구로 꾸몄다.

 

제체시온 전시관에서 본 카페뮤지엄(노란ㄱ건물). 지도에선 전시관과 카페의 거리가 160m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시관의 양배추 지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물관에서 만난 ‘뜻밖’의 광경은 카페뮤지엄이 있는 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ße) 거리에서  카페뮤지엄과 제체시온 전시관은 고작 160m 거리를 둔 채  자리하고 있었다. 각자의 특성에 맞게 시대를 담은 탓인지 두 건축물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제체시온 전시관은 이전 세대와 분리한다는 정체성을 남다르게 구현했다. 제체시온 대표 건축가인 요제프 올브리히가 기업가 칼 비트겐슈타인 등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지은 이 전시관은 화려한 금빛 지붕부터 눈길을 끈다. 


 올리브잎의 모양을 본 떠 만든 이 돔 형태의 지붕을 사람들은 ‘양배추 지붕’이라 부르기도 한다.


 건물 입구 위쪽엔 ‘그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이라는 슬로건이 황금색으로 새겨져 있고 입구 옆엔 제체시온 운동가들의 언론 기관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든 잡지 거룩한 봄(Ver Sacrum(Sacred spring))이 쓰여 있다. 


 제체시온 전시관의 금빛 지붕과 함께 화려한 건물들이 대로변에 즐비한 곳에서 카페뮤지엄이 눈길을 끌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밋밋한 외관 덕이다. 카페 내부는 물론 건물 외관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오죽하면 로스가 건축할 당시 시에서 건물이 밋밋하다는 이유로 건축허가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결국 로스는 장식 대신 창가에 화분거치대를 배치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승효상 대표는 “상대의 대화에 집중하며 온전히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됐다”고 부연했다.


 그리고 에곤 실레가 클림트를 처음 만난 장소 역시 바로 그 밋밋하기 그지없던 카페뮤지엄이었다.



“‘피아노의 시인’, 카페에서 음악으로 시를 읊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카페’를 만난 건 폴란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 일정의 마지막 날 아껴둔 장소에서였다. 쇼팽박물관(Museum of Fryderyk Chopin in Warsaw)이었다. 폴란드, 그중에서도 바르샤바의 쇼팽 사랑은 그야말로 무한대 같았다. 해외에서 오는 모든 사람들의 관문인 공항 이름은 쇼팽공항이었고 입국 게이트를 나가는 길에 바르샤바를 소개하는 사인보드의 주인공도 쇼팽이었다.


 그러니 바르샤바에서 쇼팽박물관은 꼭 가야 할 장소였고 박물관은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줬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는 쇼팽의 도시라 불러도 될 듯하다. 쇼팽박물관(왼쪽)은 물론 공항 이름도 쇼팽공항(오른쪽 위)이고 바르샤바를 알리는 공항의 사인보드 주인공도 쇼팽이다.

 일반적으로 회화나 조각, 공예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과 달리 음악은 실물이 없다 보니 전시에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다. 작곡가의 초상화나 사진, 사용하던 악기나 직접 그려 넣은 악보만 전시해도 충분하지만, 음악이라는 건 들어야 맛이니 말이다.

쇼팽박물관에선 쇼팽의 음악을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들을 수 있다.

 쇼팽박물관은 39년이란 짧은 생을 살다 간 천재 음악가가 남긴 수많은 곡을 ‘들을 수 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가령 피아노 위 악보대에 악보를 올려놓으면 피아노 상단의 영상에 연주자의 연주 모습과 함께 피아노에서 쇼팽이 작곡한 해당 악보의 곡이 흘러나온다. 쇼팽의 사진과 그 시기 문화를 소개하는 곳에선 원통형의 부스를 만들어 그 안에서 쇼팽의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각 전시실마다 다른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전시실에서 뜻밖의 카페를 만났다. 쇼팽이 살던 때 폴란드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육 문화, 음악 환경과 함께 살롱과 카페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구분해 상세히 설명했다.


 쇼팽이 활동하던 시절 바르샤바의 살롱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부유층이나 귀족들은 집에서 만남을 갖고 자신들의 정치적, 문화적 관심사를 공유했다. 이런 살롱 문화는 중요한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일부가 됐다. 살롱에서 쇼팽은 부유층과 귀족 앞에서 연주하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카페는 살롱과 달랐다. 개인 집에서 만나는 폐쇄적인 살롱과 달리 접근하기 쉬웠고 대중적이었다.

펠릭스 페차르스키의 '호노라트카 카페'(위)와 쇼팽박물관에서 소개한 카페 브레진스키. 출처 : 폴란드 문화재청

  쇼팽박물관은 바르샤바의 카페를 "젊은이들의 인기 장소였다”고 설명했다. 이는 젊은 예술가와 작가도 다르지 않았다. 카페는 국내외 정기 간행물에 접근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카페를 찾은 이들은 새로운 낭만주의 경향과 정보를 공유했다. 쇼팽도 카페 단골손님이었다.


  바르샤바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카페는 미오도바 거리의 ‘호노라트카(Honoratka)’와 코지아 거리의 '브레진스키(Brzezinska)'다. 쇼팽이 식사도 하고 연주도 했다는 호노라트카는 같은 이름으로 여전히 영업 중이고 식사도 할 수 있다.


 카페 브레진스키는 사라졌고 그 자리엔 영국의 커피 프랜차이즈인 카페 ‘네로’가 영업하고 있다.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카페 앞 11번 쇼팽 벤치다. 저지 포랭스키 교수가 디자인한 이 벤치는 쇼팽 박물관과 바르샤바 시의 협조로 바르샤바 시내 15곳에 설치됐다. 쇼팽과 관련 있거나 그의 도시생활과 연관된 곳이다.


 11번 벤치가 있는 장소는 1830년 11월 쇼팽이 역마차를 타고 오스트리아 빈과 프랑스 파리로 떠난 곳이라고 한다.

 이 벤치의 버튼을 누르면 ‘폴로네즈 Es-dur op.22(WIELKI POLONEZ Es-dur op. 22)’를 들을 수 있다.

 


“카페는 ‘숨구멍’이 됐다”


사실 폴란드 여행을 계획하기 전까지 폴란드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수도인 바르샤바, 쇼팽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촉발된 나라 정도였다.

바벨성(위)과 올드타운 중앙광장의 성모승천 성당.

 특히 크라쿠프는 폴란드에 거주하는 지인이 얘기해 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덕분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한 뒤 무지를 한탄하게 만들었다. 


 크라쿠프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고 올드타운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된 곳이었다.

 

 17세기 초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폴란드의 학문 경제 문화와 예술의 근거지가 된, 인문학의 집합체인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커피 여행의 메인이 돼야 할 카페는 저녁에 찾았고 낮이면 크라쿠프에서 가야 할 곳들을 다녔다. 

 크라쿠프 성모승천 성당이 있는 올드타운 중앙광장과 바벨성을 찾았다. 


 그 와중에 잊지 않은 장소가 있었다.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 중 최대 규모였던 크라쿠프 인근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냐우 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쓰인 독일어 문구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를 지나갈 때는 추적추적 내리는 늦가을 비 탓에 유독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리포와 4 거리에 위치한 오스카 쉰들러 팩토리 뮤지엄.

 수용소의 무거운 역사를 보고 이튿날 크라쿠프 시내에 있는 오스카 쉰들러 팩토리 뮤지엄(Oskar Schindler's Enamel Factory)도 찾았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들어선 쉰들러 뮤지엄은 다른 의미에서 놀라움을 줬다. 금속공장인 이곳에서 쉰들러는 약 1100명의 유대인을 구조했지만, 박물관은 유대인 구조의 과정이나 쉰들러 개인에 집중하지 않았다.


 나치 치하에서 참혹한 삶을 살던 이들을 설명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면서 전쟁이 만든 참혹하고도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설명하는 데 나온 게 ‘게토(ghetto)’였다. 


 게토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게토라는 개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나치 독일이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으로 알려져 있다.


바르샤바는 게토의 벽이 세워졌던 곳을 동판으로 알리고 있고 크라쿠프는 여전히 장벽이 남아 있다.

 바르샤바의 도로를 걷다 보면 ‘게토’의 벽이 세워졌던 장소를 동판으로 알리고 있었다. 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크라쿠프엔 여전히 그때 세운 벽이 남아 있었다.


 쉰들러 뮤지엄은 바로 그 게토를 설명하면서 한 카페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 점령지 지도의 특별한 장소’라는 제목으로 알린 이 카페는 토브조프스카 거리에 있었던 ‘예술가 카페(Kawarnia Plastyków Café)’였다. 


 쉰들러 뮤지엄에 따르면 1940년 2월 이 카페가 문을 연 진짜 이유는 커피가 아니었다. 생계가 어려운 예술가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다. 카페가 있는 건물 위층의 폴란드 예술가 협회 재산을 독일군이 약탈하는 걸 막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카페는 기부금으로 운영됐고 예술가들은 웨이터로 근무했다. 임금은 동일했고 근무 시간엔 무료로 식사도 할 수 있었다.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예술가들이 카페를 찾으면 할인해 줬고 아픈 사람에겐 무료로 식사도 제공했다. 자금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 보내는 의약품과 배송비에 사용됐다.


쉰들러 팩토리에 소개된 '예술가 카페'(위)와 폴란드 신문 '지엔니크 폴스키'에 게재된 관련 기사에서 카페에 있는 예술가들. 출처 : MHK

  예술의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콘서트를 열고 조각품을 전시했다. 어린이를 위한 인형극도 무대에 올렸다.

 1941년 2월부터 1943년 4월 사이 이 카페에서 가수와 연주자들이 총 100여 차례의 독주회를 열었다.


 그랬던 카페는 비극의 장소가 됐다. 1942년 4월 16일 나치 무장친위대와 비밀경찰이라 불리는 게슈타포가 카페를 급습하면서다. 쉰들러 뮤지엄은 많은 이들의 기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날 6시 게슈타포가 사람들로 가득 찬 카페를 급습했다. 


 모든 남자들은 벽을 따라 줄을 서라는 명령을 받았고 나치 무장친위대(슈츠스타펠 Schutzstaffel)인 SS 대원들은 그들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추방 대상자들의 등에 분필로 십자가를 그렸다… 


 체포된 이들 중에는 예술가도 있었다… 그리고 체포된 남성 대부분은 결국 아우슈비츠에 수용돼 총살형을 당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게토 안 카페는 전쟁 중에도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예술 활동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는 공간인 동시에 잔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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