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거부하고 과일은 환대합니다

엄마는 많이 아프고 나는 [과일을 먹는다]

by 소요

아빠가 외출했다. 장롱에서 화사한 소라색 봄 점퍼를 꺼내 입고. 매번 아빠는 옷 찾는데 애를 먹는다.


성춘이, 용주 태워서 가면 돼? 향자도 태워야 하나?


전화 통화하면서 언급되는 이름을 들어보니 격주에 한 번씩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다. 일요일 점심에 서로 돌아가며 밥을 산다고 했다. 요즘 부쩍 아빠의 외출이 잦아진다. 예전에는 나가래도 안 나가더니 요즘에는 조용히 나가는 때도 많다. 아빠가 자꾸 나가니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같이 사는 남편 같았으면 누구 만나냐, 왜 이렇게 자주 나가냐, 나만 독박 돌봄 하라는 거냐, 하며 티격태격했을 테지만 아빠에겐 그러지 안(못)한다. 나도 그랬고 또 그럴 것이다. 누구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365일 24시간 간병인으로 살다 간 우리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더욱 길어질 전망인 엄마 간병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단절과 휴식이 필요하다. 엄마를 재우고 혼자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가씨, 1층에 잠깐 내려올 수 있어요?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사촌 오빠의 부인들이다. 큰 오빠와 큰 언니가 주차장에 와 있다며 잠시 내려오라고 한다. 이럴 때 보통 아빠를 내려 보내곤 했다. 나는 웬만하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빠는 외출했고, 내가 내려가야 한다. 아무리 거동이 안 되는 와상환자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엄마를 혼자 두고 외출한 적은 없다. 그런 유혹은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고 오빠와 언니를 집에 들어오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아픈 엄마를 눕혀 놓고 다과를 준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래 나누고 싶지 않아서다. 엄마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도, 엄마의 상태를 두고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하는 것도 싫고, 우리 앞에 놓인 암울한 상황과 그 앞을 장식하게 될 위로하는 말을 듣기 싫어서다. 가까이 사는 큰 엄마와 사촌 오빠들도 문병을 오겠다고 했지만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처음엔 의사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다음에는 엄마가 거동도 안 되고 대화도 안 되니까 조금 나아지면 오시라고 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봄이 되면 엄마가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요원해지고 있다.


아가씨!


새언니가 부른다. 목소리는 절대 늙지 않는다. 언니도 70에 가까워지는 걸로 아는데 아직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옆에는 소주 냄새를 풍기는 사촌 오빠가 서 있다. 지난 추석 때 보고 오랜만에 본다. 참, 저 둘도 많이 늙었고 삶이 고단해 보인다. 매일 술 없이는 잘 수 없다는 사촌 오빠를 엄마는 늘 걱정하곤 했다.


고생이 많지?


아니라는 말은 못 한다. 정말 고생이 많다. 어떡하겠냐, 맞춰서 살아야지. 오빠 손에는 과일 박스 하나가 들려있다. 참외랑 토마토를 좀 샀다고 했다. 입에 침이 고였다. 으레껏 하는 위로하는 말은 줄이고 가서 참외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한방에 따른 식단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과일을 주지 않는다. 과일은 찬 음식에 속해 삼가라는 지침이 있어서 우리는 열심히 지침을 따르고 있다. 엄마가 못 먹으니 우리 가족 모두 과일을 먹지 않는다.


원래 우리 가족은 과일 귀신이었다. 사과도 한 사람에 한 알씩, 귤도 한 사람이 한 번에 대여섯 개씩 까먹어서 한 박스가 이삼일이면 바닥나곤 했다. 딸기는 정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고, 수박 한 통을 쪼개면 그날 저녁에 다 먹어치울 정도로 우리 가족은 과일을 좋아한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엄마가 가끔 과일 용돈을 따로 챙겨주었다. 용돈 아끼려고 과일 못 사 먹을까 봐, 또는 싼 게 비지떡인데 싼 거, 맛없는 것만 사 먹을까 봐 신경 써주던 엄마였다. 결혼해서도 과일을 종류별로 박스째 사다 놓고 먹어서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우리 집 엥겔지수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렇게 과일을 좋아하는데 최근 들어 과일을 먹지 못했다. 그러니 과일 사들고 오는 손님이 반가울 수밖에.

과일 박스를 풀어서 가장 예쁜 참외 두 개를 씻는다. 아직 덜 여물었는지 껍질이 딱딱해서 잘 까지지 않는다. 그렇게 달지도 않다. 하지만 나의 과일 허기를 채워주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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