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하는 빨간 맛
아빠가 밭에 갔다 오면서 까만 봉지를 들고 왔다. 뭐가 들긴 들었나 싶게 아주 빈약하다.
그거 뭐야?
보리수
보리수? 밭에 보리수나무가 있어?
응 있어. 근데 하루 사이에 누가 다 따 가고 한 줌밖에 없네.
하긴 보리수 열매가 워낙 따고 싶게 생겼다. 볼 때마다 예쁜 귀고리가 생각난다. 깊이 있는 빨간색에 햇빛에 비치면 반짝반짝 빛나서 눈길이 간다. 빛이 나는 건 앵두랑 비슷한데 앵두는 가지에 무성한 잎들과 함께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따기 번거로운데, 보리수 열매는 귀고리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서 따기도 좋다.
보리수는 호불호가 갈린다. 한두 번 호기심에 따먹을 수는 있어도 시고 달지 않고 맹숭맹숭해서 몽땅 따가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나지는 않는다. 보리수를 서리한 사람은 보리수 효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농약 안 치고 자연에서 해와 비와 바람으로만 자라는 것에 환장하는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일 수 있다.
엄마, 보리수 먹을래?
응, 먹을래.
엄마 손에 보리수 두 알 정도 올려주니 온몸에 강직이 와서 그렇게 안 올라가던 손을 움직여 입에 탁, 하고 털어 넣는다. 입은 병들고 아픈 엄마의 몸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생기 있는 곳이다. 보리수 들어간 입은 오물오물 신나게 움직인다.
우리 집(지금 내가 머무는 엄마 집 말고 남편과 딸이 살고 있는 집)에는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있다. 보통의 과실수들이 심은 지 몇 년은 지나야(그 환경에 적응을 해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보리수는 환경적응능력이 뛰어난지 심은 해부터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고, 작년부터는 크고 많이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보리수 열매에 환장한다. 작년 딱 이맘때 엄마랑 아빠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그 많던 보리수 열매를 엄마가 죄다 따먹었다.
난 이게 너무 맛있어. 이게 몸에도 좋다고. 특히 여자들한테.
따는 족족 입에 털어 넣으면서 쉴 새 없이 떠들곤 했다.
이건 농약도 안 친 거잖아. 이런 게 진짜배기라고. 이런 게 진짜 약이지.
고작 보리수 열매에 호들갑을 떨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옆에 단오를 향해 열심히 익어가고 있던 앵두도 홀랑 다 따먹었고. 앵두를 먹고 나니 소화가 잘 되고, 똥이 잘 나온다고 좋아했다. 보리수 익을 무렵에 우리 집에 오기로 했는데, 작년 늦가을부터 엄마는 저렇게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다. 엄마가 다시 우리 집에 놀러 올 수 있을까?
엄마 입이 아직 오물거리고 있다. 아까 입에 털어 넣은 보리수 두 알, 정확히는 씨앗을 씹고 있는 거다. 보리수 열매의 씨앗은 참 독특하게 생겼다. 딱딱하지 않고 씹으면 씹히고, 씹다 보면 실 엉킨 것 같은 섬유질만 남는다. 나는 엄마가 뭐든 움직이는 게 좋아서(그래야 살아있는 것 같아서), 씹는 게 뇌에 좋다고 한 것 같아서 씨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는 걸 놔둔다. 혹시 독성이 있을까 봐 찾아봤더니 그렇진 않고 말려서 약에 많이 쓴다고 나온다. 혹시 아나? 보리수 씨앗에 엄마 뇌를 낫게 할 성분이 들어있을지? 나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아닌데 엄마가 아프니까 자꾸 기적을 상상하게 된다.
밭에 보리수는 서리를 맞았지만, 괜찮다. 우리 집 보리수와 앵두가 엄마에게 오고 있는 중이니까. 며칠 전 딸이 보리수가 익었다면서 사진을 보냈길래 할머니 주게 따서 오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우리 집 보리수를 먹으면 작년 기억이 살아날까? 엄마가 거의 만병통치급으로 여겼던 보리수를 먹고, 이런 게 진짜배기라며 호들갑 좀 떨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주책 맞지만 귀여운 호들갑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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