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요유 Jun 01. 2024

환장할 것이 오고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빨간 맛

아빠가 밭에 갔다 오면서 까만 봉지를 들고 왔다. 뭐가 들긴 들었나 싶게 아주 빈약하다.


그거 뭐야?

보리수

보리수? 밭에 보리수나무가 있어?

응 있어. 근데 하루 사이에 누가 다 따 가고 한 줌밖에 없네.


하긴 보리수 열매가 워낙 따고 싶게 생겼다. 볼 때마다 예쁜 귀고리가 생각난다. 깊이 있는 빨간색에 햇빛에 비치면 반짝반짝 빛나서 눈길이 간다. 빛이 나는 건 앵두랑 비슷한데 앵두는 가지에 무성한 잎들과 함께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따기 번거로운데, 보리수 열매는 귀고리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서 따기도 좋다.


보리수는 호불호가 갈린다. 한두 번 호기심에 따먹을 수는 있어도 시고 달지 않고 맹숭맹숭해서 몽땅 따가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나지는 않는다. 보리수를 서리한 사람은 보리수 효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농약 안 치고 자연에서 해와 비와 바람으로만 자라는 것에 환장하는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일 수 있다.

우리집 앵두나무

엄마, 보리수 먹을래?

응, 먹을래.


엄마 손에 보리수 두 알 정도 올려주니 온몸에 강직이 와서 그렇게 안 올라가던 손을 움직여 입에 탁, 하고 털어 넣는다. 입은 병들고 아픈 엄마의 몸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생기 있는 곳이다. 보리수 들어간 입은 오물오물 신나게 움직인다.


우리 집(지금 내가 머무는 엄마 집 말고 남편과 딸이 살고 있는 집)에는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있다. 보통의 과실수들이 심은 지 몇 년은 지나야(그 환경에 적응을 해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보리수는 환경적응능력이 뛰어난지 심은 해부터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고, 작년부터는 크고 많이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보리수 열매에 환장한다. 작년 딱 이맘때 엄마랑 아빠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그 많던 보리수 열매를 엄마가 죄다 따먹었다. 


난 이게 너무 맛있어. 이게 몸에도 좋다고. 특히 여자들한테.


따는 족족 입에 털어 넣으면서 쉴 새 없이 떠들곤 했다.


이건 농약도 안 친 거잖아. 이런 게 진짜배기라고. 이런 게 진짜 약이지.


고작 보리수 열매에 호들갑을 떨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옆에 단오를 향해 열심히 익어가고 있던 앵두도 홀랑 다 따먹었고. 앵두를 먹고 나니 소화가 잘 되고, 똥이 잘 나온다고 좋아했다. 보리수 익을 무렵에 우리 집에 오기로 했는데, 작년 늦가을부터 엄마는 저렇게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다. 엄마가 다시 우리 집에 놀러 올 수 있을까?


엄마 입이 아직 오물거리고 있다. 아까 입에 털어 넣은 보리수 두 알, 정확히는 씨앗을 씹고 있는 거다. 보리수 열매의 씨앗은 참 독특하게 생겼다. 딱딱하지 않고 씹으면 씹히고, 씹다 보면 실 엉킨 것 같은 섬유질만 남는다. 나는 엄마가 뭐든 움직이는 게 좋아서(그래야 살아있는 것 같아서), 씹는 게 뇌에 좋다고 한 것 같아서 씨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는 걸 놔둔다. 혹시 독성이 있을까 봐 찾아봤더니 그렇진 않고 말려서 약에 많이 쓴다고 나온다. 혹시 아나? 보리수 씨앗에 엄마 뇌를 낫게 할 성분이 들어있을지? 나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아닌데 엄마가 아프니까 자꾸 기적을 상상하게 된다.


보리수 열매 씨

밭에 보리수는 서리를 맞았지만, 괜찮다. 우리  보리수와 앵두가 엄마에게 오고 있는 중이니까. 며칠  딸이 보리수가 익었다면서 사진을 보냈길래 할머니 주게 따서 오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우리  보리수를 먹으면 작년 기억이 살아날까? 엄마가 거의 만병통치급으로 여겼던 보리수를 먹고, 이런  진짜배기라며 호들갑  떨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주책 지만 귀여운 호들갑이 보고 싶다.

이전 01화 실종된 레시피를 찾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