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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n 02. 2024

결국 이효리가 나를 울렸네

낯설고 어색한 엄마와의 시간

엄마 울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도 보름 만에 만난 어린 딸 앞에서.


TV 보다가 우는 건 남편이 잘하고, 그런 남편을 어이없어하며 놀려먹던 내가 TV를 보다가 울고 앉아있다니.


나를 울린 프로그램은 이효리가 최근 시작한 ‘엄마 나랑 단둘이 여행 갈래’다. 제목만 봐도 뻔히 어떤 프로그램인지 각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눈물이 나다니. 뻔한 내용으로도 눈물을 빼는 방송국 놈들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엄마를 간병하는 신세가 되어 내가 약해진 탓인지 잘 모르겠다.  


엄마 왜 울어?


엄마도 할머니랑 여행 가고 싶어.

엄마도 할머니랑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엄마도 할머니랑 손 잡고 걷고 싶어.

엄마도 할머니랑 얘기하고 싶어.


지난 추석만 해도 그랬었다. 우리 가족 모두 안동에 놀러 갔었다. 고불고불 산길을 드라이브해서 병산서원에 가서 걷고 시장에 가서 문어도 사 먹었다. 고속도로가 막혀서 토 나오는 추억의 죽령재를 넘으면서 나는 손녀딸에게 들려주는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들었었다. 엄마는 죽령재를 넘어 시집왔다.


정작 눈물이 터진 건 이효리 모녀가 여행 가서 손잡 고 돌아다니고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얘기하는 다정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와 딸이 같이 있지만 같이 있지 못하고 겉돌고 서로 어색해하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그게 너무 진짜 같아서, 지금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아서.


나는 지금 엄마가 너무 낯설다. 물론 이효리와는 다른 이유다. 병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누워서 잠만 자는 엄마, 나에게 밥 해주는 엄마가 아닌 나에게 밥을 얻어먹는 엄마가 너무 낯설다. 나와 티키타카가 되는 엄마가 아니라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입을 꾹 닫고 침묵하고 있는 엄마와 있는 게 너무 어색하다.


가장 힘든  엄마의 말이 사라진 것이다. 처음부터 말이 사라진  아니었다. 처음에는 에 생기가 사라졌고, 말속의 다정함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때도 힘들었는데, 본격적으로 말들이 사라졌을  충격은 심장을 강타했고 극기야 심장을 떨어뜨렸다.


처음엔 장소의 말들이 사라졌고, 다음엔 시간의 말들이, 다음엔 그렇게 잘 외우던 숫자가 사라졌고, 그리고 모든 이름들이 차례로 사라졌다. 평생 금슬이 좋아 결혼하고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아빠 이름도, 그렇게 아픈 손가락이던 막내아들 이름도, 먼저 간 아들 큰 이름도, 그렇게 물고 빨고 예뻐하던 손녀 이름도, 쓰러진 이후 곁에서 24시간 수발들고 있는 내 이름도 사라졌다. 몇 번이고 내 이름 알려주고, 까먹지 말라고 당부도 하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엄마는 내 이름을 모른다. 이름을 모르는 건 괜찮다.


더 힘든 건 엄마다움을 완성한 엄마의 다정한 말들이 사라진 거다. 엄마는 배운 게 없어서 말 주변이 없다고 말을 삼가는 편이었고,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촌스럽고 투박했지만, 엄마의 말에는 태생적인 성품이 묻어나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사촌 언니가 그랬다. 작은 어머니한테는 자랑을 해도 늘 진심으로 좋아해 주시니까 마음 놓고 자랑을 했었고, 무슨 말을 해도 맞다 맞다 공감해 주시니 늘 편했다고. 지금은 그럴 사람이 없어서 너무 슬프다고. 자랑을 하던, 불평불만을 토로하던, 남의 험담을 늘어놓던, 엄마는 특유의 다정함으로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면 뭐 하나.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는데.

그러면 뭐 하나.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데.


이쯤 되면 다정했던 엄마와는 결별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엄마의 침묵과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조용한 엄마가 낯설고 어색하다. 변해버린 엄마, 아니 전혀 새로운 엄마를 언제쯤이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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