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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n 22. 2024

오이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잉여 오이 대란

마늘철이 지나자 오이철이 왔다. 아빠도 아침에 밭에 갔다 올 때마다 오이를 따 가지고 온다. 첫물 오이야 그냥 반으로 뚝 잘라서 생으로 먹어도 연하고 맛있다. 그다음은 찍먹.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고, 썰어서 무쳐도 먹고, 오이냉국으로 해먹고, 그리스식 오이샐러드 차지키 소스로 만들어 먹고, 서서히 저장음식으로 이동한다. 부추 팍팍 넣어 오이김치도 담가 먹고, 오이소박이까지 해먹으면 오이로 해 먹을 수 있는 건 다 해 먹은 것 같고, 오이가 좋아도 어떻게 매일 오이만 먹고사나 싶고, 슬슬 오이에 물려가고 한동안 오이가 안 먹고 싶어질 무렵, 곧 찬밥 신세가 될 것을 눈치챈 오이는 가출을 선언했다.  


오이, 하면 생각나는 사람, 오이를 반겨줄 사촌오빠에게 제일 먼저 갔다. 오이가 좋다고, 여름엔 역시 오이라며, 작은 아버지인 아빠에게 오이를 많이 심으라고 부추기며 밭농사에 필요한 농자재를 공급해 준 사촌오빠다. 그다음은 오이를 좋아하는 오빠를 낳은 큰엄마에게 배달되고, 그다음에는 주말에 다니러 오는 동생과 남편에게 돌아갔다. 동생은 회사 직원 중에 괴산이 고향인 사람이 있어서 가끔 시골에서 가져온 반찬을 얻어먹는데, 그 직원에게 답례로 오이를 줬다고 했다.


이제 오이는 친족관계를 떠나 이웃집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다가다 만나는 옆집에 오이 5개, 엄마의 좋은 친구이자 좋은 마늘을 소개해주는 먹거리 중개상인 동네 닭집 아줌마에게 5개,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방문하는 간호사님에게 5개가 돌아갔다. 누구든 만나면 오이를 안긴다.


우리  오이를 부지런히  출가시키고, 냉장고 야채칸이 깨끗이 비어갈 무렵 갑자기 오이가 떼로 굴러들어 왔다. 오이를 좋아하는 사촌오빠의 부인의 친구가 오이 농사짓는 이웃집에서 오이를 얻었다면서 나눠주겠다고 했다. 나도 바람도   따라갔는데, 오이가 자그마치  박스였다. 오이 농장에서 얻은 거라 우리와는 스케일이 달랐다. 언니와 내가 반반씩 나눠도 50개가 족히 넘었다. 기껏  출가시켰더니 숨겨놓은 새끼들이 줄줄이 나타난 기분. 아니 오이 어디까지 먹어봤냐며, 오이의 끝판왕은 오이지라며, 오이지도  해본 주제에 감히 오이에게 싫증을 ? 오이 맛 좀 제대로 보게 해줄게! 하며 쳐들어와 결투를 신청했다.


방법은 오이지 밖에 없다. 맞다. 오이의 끝판왕은 오이지지. 그래 한번 붙어보자!


그런데 솔직히 쫄린다. 오이지는 특히 자신이 없다. 제철 먹거리라면 온갖 걸 다 하는 엄마도 오이지는 안 담근다. 몇 번 해봤는데 골마지가 끼고 매번 실패를 하여 아예 안 담근다고 했다. 엄마도 포기한 오이지를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일단 인터넷으로 오이지 담그는 방법을 검색했다. 백만 스물여섯 가지도 넘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 듯했다. 대략 훑어본 결과 오이지는 크게 두 줄기로 나뉜다. 소금으로만 깔끔하게 담그는 전통식 오이지와 소금+설탕, 식초, 소주까지 방부제 역할을 하는 4종을 모두 다 때려 넣고 피클식으로 담그는 방법이 있다. 디테일로 들어가면 배율도 제각각이라 초보자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근데 갑자기 궁금증. 오이지에 설탕(물엿), 식초, 소주는 왜 넣게 되었을까? 결국 오이지를 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핵심인데, 어떻게 해도 잘 상하니까 설탕, 식초, 소주까지 다 때려 넣게 된 것으로 추측해 본다. 엄마도 전통식으로 해보다가 여러 번 실패했고, 설탕을 극도로 싫어하는 엄마는 설탕과 타협하지 못하고 오이지 만들기를 중단한 게 아닐까?


와, 이게 뭐라고 레시피 선택하는데도 반나절 소비.  심히 갈등된다. 일단 디테을은 그 다음 문제고, 큰 틀에서 소금만으로 전통식으로 오이지를 담글 것인가, 안전하게 온갖 것을 다 넣어서 상하지 않게 만들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같이 오이를 받아온 언니는 큰엄마의 레시피로 담근다고 했다. 큰 엄마는 다 때려 넣는 피클식이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안전한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자꾸 설탕 싫어하는 엄마가 눈에 아른거린다. 결정이 늦어지는 사이 냉장고 야채칸에 못 들어가고 현관에서 죽치던 오이는 더위에 시들시들 말라가고, 오이지를 담그는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하지도 지나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그래 결심했어. 소금만으로 전통식으로 오이지를 담가보기로 했다.


옆에서 보던 아빠가 안된다며, 엄마가 그렇게 하다 망했다며 말렸다. 내가 뭘 한다고 할 때 말리지 않는 아빠인데 나를 말리네. 이상한 오기 발동. 망하면 그냥 버리면 되지, 어차피 잉여 오이인데. 일단 한번 해보고. 큰소리 뻥뻥 쳤다. 절충 방안으로 방부제 역할을 위해 소주는 넣기로 했고 소금물에 잘 잠길 수 있도록 뒤집기 좋게 김장비닐을 사용하기로 했다. 엄마도 실패하고, 아빠도 말리는 오이지여서 쫄리는 마음과 엄마의 실패를 설욕하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오이지를 담갔다.


오이지는 말이 없다. 나만 몸이 달았다. 오이지를  자꾸 들여다보며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다. 망하면 버리면 된다고 큰 소리 뻥뻥 쳤지만, 망하면 정말 속상하고 쪽팔릴 것 같다. 과연 내가 엄마의 실패를 설욕할 수 있을 것인가. 아빠에게 거 보라고, 원리를 이해하고 하면 된다고, 큰 소리 뻥뻥 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여름마다 오이지를 담그게 될 것인가. 아니면 처음이자 마지막 오이지가 될 것인가. 열흘이면 결판난다. 개봉박두!

잘 익어가거니 잘 썩어가거나 둘 중에 하나지만 모양만은 오이지

성공할지 실패할지 기다려봐야 하지만 다양한 오이지 레시피를 공부한 후 설득 당한 오이지 레시피(이유를 알아서 설득되는 편이어서 이유도 함께 적음)

***오이지는 소금으로 절여서 두고두고 오래 먹는 게 핵심. 다양한 레시피들은 오이가 상할까봐 전전긍긍하며 만들어진 것으로 어떻게 무르지 않고, 하얗게 골마지 끼지 않고 오래 먹을 수 있는 오이지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며 맞춰져 있음(일단 원리를 이해해야 레시피를 선택하거나 변형할 수 있음)

1. 오이 중에 굵은 오이는 골라내고 작은 오이만 엄선한다.(굵은 오이는 소금이 중앙까지 침투하기 어려워 속부터 상하기 쉽다고 함. 시판용으로 오이지용 작고 가는 오이를 판다)

2. 오이를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뺀다(소금으로 아니고, 상처 내지 않게 조심조심-상처 나면 상하기 쉽다고 함)

3. 오이를 끓는 물에 데쳐낸다-넣었다 빼면 된다. (데쳐야 껍질 조직이 와해되어 소금이 더 빨리 침투된다고 함)

4. 김장봉투를 2겹으로 한 다음(혹시 찢어질까 봐 2겹) 오이를 바닥부터 한 층 씩 차곡차곡 쌓고 소금을 주먹으로 한 줌씩 쥐고 뿌려준다.(소금양은 50개에 대략 250g)

5. 소주 한 병을 골고루 붓는다.(원래 소금이 방부제 역할을 하는데, 오이에 침투하는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상할까 봐 알코올로 보완하는 것)

6. 비닐을 새지 않게 정말 꽁꽁 묶은 다음에 하루에 한번씩 봉지째로 뒤집어준다.(오이에서 서서히 물이 나오면서 오이가 물에 골고루 잠겨 있어야 상하지 않기에 뒤집어도 물이 새지 않게 정말 꽁꽁 묶어야 함)

7.25도씨 내외 상온에 두고 열흘이 지난 후 김치통에 옮겨 담아 김치냉장고에 보관한다.(하지 지나면 날씨가 무더워지기에 하지 전에 해야 상하지 않는다고 함. 상할까 봐 냉장고에 넣어버리면 소금이 녹지 않아 절이는 속도가 늦어지기에 적당한 온도에 빨리 소금을 침투시키는 것이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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