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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n 24. 2024

왜 하필 내가 중심인가?

돌봄의 세계에서 여성의 위치

그날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뇌출혈 수술이 끝나고 엄마를 중환자실에 눕혀놓고, 엄마의 보호자들-아빠, 나, 남동생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쓰렂기 전까지 뭘 먹고 뭘 하려고 했었는지 보일 정도로 엄마의 손길이 생생한 냉장고를 뒤져서 엄마의 반찬들로 대충 차린 식탁에 모여 앉았는데 정말 기가 막혔다. 남남처럼 어색하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쓰러진 충격 때문이 아니다. 엄마 없이 우리가 이렇게 모여 앉은 적이 없다. 엄마 없이 우리끼리 밥을 먹은 적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의 중심에는 늘 엄마가 있었구나.


모든 것은 엄마로 통했다. 엄마는 우리의 중심이었고 우리의 저수지였다. 이야기든 정보든 돈이든 감정이든 뭐든 엄마에게 모였다가 엄마에게서 다시 흘러나갔다. 엄마가 없으니 당연히 대화가 실종되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이 없는 편인 아빠와 남동생은 나보다는 덜 불편해보였다. 나는 심히 불편했다. 말없이 밥이 먹히지 않았다. 역시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침묵을 깨고 말을 시작한 것은 나였다. 내가 주로 말을 했고, 동생과 아빠는 내 말에 반응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생각 안 난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충격과 슬픔에 빠진 아빠와 동생을 위로하고 다독여서 잘 먹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은연 중에 내가 엄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발동한 걸까. 얼떨결에 엄마의 빈자리를 내가 메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우리 가족의 중심은 나다. 내가 엄마를 돌보는 주간병인이기도 하고, 우리 집안의 대소사를 이끌고 가는 리더가 되었다. 아빠와 동생은 모든 걸 나에게 물어오고, 나는 많은 것을 결정한다. 내가 먼저 생각하고, 내가 제안하고, 내가 논의를 주도하고 최종 결정을 내린다. 내가 집안일을 총괄하고, 아빠와 동생, 가끔 남편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협조를 요청한다. 밥상머리에서 하는 모든 일상적인 대화도 내가 주도한다. 누가 봐도 내가 대장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빠와 동생은 나를 잘 따른다. 나의 지휘체계에 순응하고 매사 모든 일에 매우 협조적이다. 엄마가 아프니 자잘한 분란은 있을 자리가 없고, 어릴 때부터 한 성깔 하던 나를 잘 알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내가 우리 가족의 중심이 되었을까? 어쩌다 보니 내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역할이 부담스럽고 책임이 무거울 때가 많다. 엄마도 그랬을까? 우리 집은 왜 여자가 중심인가? 우리 집뿐이 아니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범위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볼 때 집안일에 있어서, 특히 돌봄에서는 여자가 중심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일단 여자들이 오랫동안 집안일과 돌봄을 감당해 온 역사가 있고, 먹고, 자고, 입는 생활 문화와 언어 또한 여자 중심으로 발달되기도 하였으며, 겉으로는 가사와 돌봄의 분담이 많이 되었어도 여전히 집안일은 여자의 몫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적극적으로 대치하고 우리 집만이라도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나의 무의식에도 그런 의식이 꽈리를 틀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과는 육아와 집안일을 적절하게 나눠서 하면서도, 시키기만 하면 뭐든 잘 도와준다는 협조적인 남편과 살면서도 왜 내가 모든 것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리더 역할을 해야 하고, 남편은 돕는 위치에 있는 건지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니 그런 투쟁은 모두 뒷전이다.


엄마가 아프고 간병이 장기화되니 3인의 보호자 중에 여자인 내가 자연스럽게 돌봄의 중심이 되었다. 누구도 나에게 하라고 한 적도 없지만 누구도 나에게 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 그냥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우리 가족들은 적어도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오고 가며 마주치는 동네 어른들은 고생한다면서도, 딸인 내가 엄마 간병을 하는 것이 당연한 눈치다. 아무래도 돌봄과 집안일을 내가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동생은 나보다 훨씬 잘 버니까, 동생이 벌고 내가 간병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이렇게 나는 엄마의 간병인으로 살고 있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늘 고민된다. 돌봄에서 왜 여자가 중심이 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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