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요유 Jun 26. 2024

내가 알던 그 감자가 아니다

하지, 어김없는 감자의 계절

마늘 철이 가고, 오이는 아직도 한창이고, 하지가 지나자 어김없이 감자 철이 왔다.


감자 한 상자 사야겠지?

글쎄, 난 감자 안 좋아해서…


부모님과 달리 나는 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식감이 퍼석하고 수분기가 없어서 먹으면 목이 메고, 남들은 담백하다고 표현하지만 나는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감자를 안 좋아한다. 삶은 감자, 찐 감자, 구운 감자는 물론이고 감자탕이나 닭볶음탕에 들어간 감자 입에도 안 댄다. 그나마 내가 먹는 감자는 오븐에 구운 웻지감자인데, 엄마 집에는 오븐과 같은 첨단 조리기구는 없다. 내가 안 좋아하니까, 웻지감자를 할 수 있는 오븐도 없으니까 아빠가 감자 얘기를 꺼내도 시큰둥할 수밖에.


나는 엄마랑 다르다. 엄마는 본인의 입맛이나 취향은 늘 뒷전이고 남편이나 자식이 좋아하면 무조건 그 음식을 했을 것이다. 나는 엄마처럼 가족에 헌신적이고 나를 희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먹고 싶지 않으면 아예 하지 않는다. 음식도 내가 먹고 싶어야 한다. 지금 엄마에게 해주는 음식도 평소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몸에 좋다는 음식, 제철음식,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의 교집합 내에서 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감자를 안 좋아하니 감자 반찬을 한 적이 없다. 해마다 시댁에서 감자 한 상자씩 보내주면 괜히 안고 있다가 썩히기 싫고 싹 나면 그 꼴도 보기 싫어서 감자가 오기 무섭게 친구들에게 막 퍼주고 상자를 비우곤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자기 부모님이 보내준 감자가 모두 사라진 것을 알고, 소심하게 나 감자 좋아하는데, 하며 중얼거렸던 생각이 난다. 시부모님이 보낸 건데 단 한 알도 안 남기고 남 다 줘버려서 좀 미안했던 적이 있지만, 그래도 손이 안 가는 걸 어째.


약국 간다고 나간 아빠가 약봉지가 아니라 감자 한 상자를 들고 와 현관에 내려놓았다.


뭐야? 감자 샀어???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봉지도 아니고 감자 한 상자를 산 것에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다. 난 음식 썩히는 게 정말 싫다.


아니, 영민이네가  박스 줬어. 엄마 감자 좋아한다고. 엄마 쪄주라고.


할 수 없이 감자를 쪘다. 대체로 감자를 싫어하는데 제일 싫어하는 감자가 밥솥에 쪄서 밥풀이 붙어 있는 감자다. 하지만 엄마가 그 감자를 좋아하기에, 또 영민이네 아주머니가 감자를 쪄주라고 하셨기에 내가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큰맘 먹고 밭 하면서 감자 몇 알을 올려 쪘다. 그리고 껍질이 갈라져 잘 쪄진 감자를 뜨겁지 않을 만큼만 식혀서 엄마 손에 쥐어주었다.

밥솥에 찐 감자


엄마, 이거 감자야 감자. 영민이네가 엄마 쪄주라고 줬대.


감자를 엄마 손에 쥐어줬는데… 엄마가 두 손으로 감자를 감싸고 입으로 가져가서 맛있게 먹는 게 아닌가? 엄마는 숟가락질을 못한다. 밥도 내가 다 떠먹여 준다. 손에 마비와 경직이 와서 손을 잘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감자를 먹으라고 엄마에게 준 게 아니라 감자 만져보라고 준 거였다. 그런데 엄마는 감자를 두 손으로 쥐고, 입으로 가져가 한 입 베어 물고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야무지게 먹는 게 아닌가. 엄마가 감자를 먹는 모습이 다람쥐가 도토리를 두 발로 잡고 갉아먹는 것처럼 귀여웠다. 숟가락질을 못해도 손을 이용해서 먹는 건 할 수 있구나. 자주 감자를 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감자를 하도 맛있게 먹길래, 옆에서 맛있게 먹으면 뭐가 저렇게 맛있나 싶어서 먹어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여서 나도 큰맘 먹고(오늘 두 번째 먹는 큰 맘) 맛만 보려고 감자 반에 반을 갈라서 한 입 깨물었다. 엥? 내 기억엔 푸석푸석인데 쫀득쫀득했다. 소금도 안 넣었는데 그 자체로 간간했다. 감자가 원래 이런 맛이었나? 약 탄 건가?


감자 먹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 감자가 원래 어떤 맛인지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릴 때 할머니가 쪄주던 감자 맛이 나온다. 할머니는 감자 안 먹는 나에게 감자를 먹이려고 온갖 궁리를 하곤 했는데 감자를 으깨서(매시드 포테이토를 할머니는 감자범벅이라고 불렀다) 상추쌈으로 위장해서 먹이곤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감자를 먹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누가 감자를 권해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거부하곤 했다. 왜 이 맛있는 안 먹냐고 물으면 구황작물은 나중에 재난이나 기근에 시달리거나 전쟁 나면 정말 먹을 게 없으면 먹어야 하니 아껴두겠다며 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니 실로 감자는 오랜만이었는데, 내 머릿 속의 감자 맛과 달랐다.


감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종류가 다른 건가? 종자 개량 같은 게 있고도 남을 세월이다. 아니면 내가 늙은 건가? 나이 들면 옛날에 먹던 것이 그리워진다던데. 내 입맛이 변한 건가? 아니면 내 인심이 후해진 건가? 내가 변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 감자에 약 탔나? 암튼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감자를 다 먹고.

이전 26화 미라클 모닝이 위험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