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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n 28. 2024

노브라는 안 될까요?

너무 싫었고, 피하고 싶었던 불편함 속으로

새벽부터 시끌시끌하다. 달력 안 봐도 소리만 들어도 오늘 장날인 줄 안다. 엄마 집 앞에는 3, 8로 끝나는 날에 5일장이 선다. 장이 서면 나는 살 게 없어도 구경 삼아, 산책 삼아 나간다. 뭐 새로운 거 없나, 뭐 살 거 없나, 어슬렁거리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큰 오빠와 큰 언니(큰오빠 부인)다. 반가우면서도(그런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와, 싫다, 했다. 큰 오빠와 언니가 싫다는 게 아니다. 길에서 누가 나를 알아보는 게 싫다. 그게 싫어서 어릴 때는 큰길로 잘 안 다니고 골목으로 피해 다녔다. 그런데 오랜만이라 방심했다.


시골 생활이란 이런 것이다. (엄마 집은 농사짓는 깡시골이 아니고, 지방소도시 시내에 있지만, 서울 사람들이 시골이라고 부르니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바닥이 워낙 작으니(서울에 비해) 길 가다 보면 아는 사람 만나게 되어있고,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고, 아직까지 뭐 해서 먹고사는 누구네 자식, 어디에서 뭐 하는 누구네 몇째로 호명된다. 그래서 말도 조심하고, 행실도 조심하고, 복장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잘못하면 부모가 욕먹고, 부모 귀에 틀림없이 들어가게 되어있다. 어릴 때부터 이게 너무 불편하고 싫었다. 모범생들이야 괜찮다. 나처럼 남자깨나 만나고 좀 놀았던 애들이 문제다. 아예 홀랑 까져서 문제아로 낙인찍히면 또 그러던지 말던지가 되는데 애매하게 공부도 하고 어설프게 노는 나 같은 애들의 애로가 가장 크다. 그래서 인근 도시 또는 서울 가서 놀고 오고 그랬다. 대학 갈 때 이걸 벗어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큰 도시 익명성 속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았다. 인생이 참 아이러니하지. 그렇게 싫어하던 세계로 다시 들어오다니.


제일 불편한 게 복장이다. 시골이니까 막 입어도 될 것 같지만, 내 체감상 시골 사람이 옷에 더 많이 신경을 쓴다. 아마 가다가 지역이 좁다 보니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니까 남의 시선에 더 민감하고, 시골 사람이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닐까 혼자 추측해 본다. 옛날에 메이커라고 부르는 브랜드에도 굉장히 신경 많이 쓰고 비싼 아웃도어 브랜드 흔히 보인다. 그런 거에 신경 안 쓰는 엄마도 오죽하면 나한테 집에 올 때 찢어진 티 쪼가리 입고 오지 말고 옷 좀 신경 써서 입고 오라고 한 적도 있다. 누가 나 옷 입은 거 보고 한 소리했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하도 옷 얘기를 하니까 엄마도 신경이 쓰여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내 의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효리 스타일이다. 무대 의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효리가 어디 나와서 얘기하던데, 자기는 잠자던 옷을 입고 생활하고, 그 옷으로 외출도 하고, 또 그 옷을 입고 그냥 잔다고. 내가 딱 그렇다. 물론 이효리야 뭘 입어도 이효리지만, 나는 이효리도 아니면서 이효리처럼 입고 다닌다.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하는 직장에 다닐 때는, 그러니까 돈 버는 모드일 때는 또 정색하고 차려입긴 하지만, 원래는 편하게 입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이야 당연히 일(엄마 간병)할 때도 편하고, 그 옷으로 잠도 자야 하니까 헐렁함은 필수고, 헐렁함 속에 당연히 노브라다. 왜? 나는 지금 엄마 간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한 사람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죄어오는데 브라까지 나의 가슴을 죄어오게 할 수 없다. 그래 좋다. 요게 집안에서는 당연히 괜찮지만 집 밖에서도 괜찮은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채 노브라로 친척을 만났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뭐 어쨌든 만났고, 속이야 어떻든 반갑게 인사하고, 당연히 엄마 안부 묻고, 좋을 거 없는 엄마 상황 전하고, 걱정하고, 드시는 건 잘 드시냐, 잘 드신다, 뭘 잘 드시냐, 뭐든 잘 드신다, 뭘 좀 사줄까, 아니다, 뭐 사러 가는 길이냐, 사실은 오빠와 반대 방향으로 가기 위해 생각해 낸 아이템이 두부여서 두부 사러 간다, 그래? 그럼 두부 내가 사줄게, 두붓집으로 방향을 틀고, 두부 사러 가서 아빠가 도토리묵 좋아한다며 도토리묵도 한 모 사주고, 갑자기 도토리묵 무칠 때 넣을 깻잎 좀 준다고 인근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데려가고, 깻잎에 그 옆에 있던 꽈리고추에 호박까지 하나 얻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까만 봉지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비주얼


결론은 빈손으로 나가서 뭘 잔뜩 얻어서 들어왔다. 이게 시골생활의 매력이자 불편함 되시겠다. 비율은 9대 1. 어릴 땐 너무 싫었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8대 2 정도로 바뀐 것을 느낀다. 세월이 흘러 나도 나이가 들었고, 이제 게을러져서 피해 다니고 변명하는 것도 다 귀찮고, 엄마 아파서 간병하러 내려와 있는 나를 보고 옷이 어쩠네, 노브라네, 하지도 않을 것같고, 또 누가 그집 딸 그러고 다니더라, 어쩌고 말한들 꿈쩍할 나도 아니고,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래라, 할 수 있는 여유와 맷집도 생겼다. 이게 나이 듦의 매력이자 편함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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