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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n 29. 2024

뭘 그리스까지 가나

모든 얘기가 내 얘기 같고

엄마 집에 와서 본격적으로 간병을 시작할 무렵밖에 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시립도서관에서 하는 시민교양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격주에  번씩 하는데 주제  흥미로워서   땡땡이치고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듣고 있다. 주역부터 시작하여 겸재 정선, 90년대 한국의 신세대, 색채로 보는 영화, 풍경의 인문학, 일본과 한국, 인공지능을 지나 오늘 ‘고대 그리스 비극을 통해  갈등의 양상과 해소라는 제목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리스 비극이 그리스신화와도 연결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그래 이번에 그리스 비극에 대해서 들어나보자며 기분 좋게 가서 분명 재미있게 듣고 있었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나는 게 아닌가. 물론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지는 않았다. 나만 아는 조용한 눈물이었다. 비극이니까 비극적이어서 눈물이   아니다. 그리스 비극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비극과는 다소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내용이 비극적이라고 한들 슬프다고  수는 는데 왜 울컥했을까? 내가 울컥했던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그중에서도 발췌되어 강의에서 언급된 내용은 이렇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 속하는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준 죄로 그로 인해 제우스로부터 결박된다.  

코로스/당신은 당신 자신의 불운을 똑같이 돌보지 않으면서 인간을 정당한 도를 넘어 도와주어서는  돼요. 나는 여전히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바로 당신이  결박에서 풀려나 또다시 힘에 있어서 제우스보다 약하지 않게 되리라고.

프로메테우스/막강한 운명이 아직은 그렇게 되도록 그때를 정하지 않았어요. 우선 무한히 혹독하게 나를 고난과 고통으로 굴복시킨 후 난 자유를 얻을 것이고. 총명한 재주는 저 멀리 필연 아래에 있소.


이 내용이 왜?  실연을 당하면 모든 노래 가사가   얘기 같다고 하지 않나. 내가 지금  그렇다. 노래 듣다가 정말 내 얘기인 것만 같아 많이 운다. 특히 엄마 들으라고 틀어놓는 트로트 가사는 인정사정없즉각적인 눈물을 뽑아낸다. 트로트야 그렇다 치자. 우리 문화, 우리 정서를 담아서 전통 가요라고 부르니까. 그런데  멀고 오래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얘기 같을 줄이야. 너무 멀리  것도 맞고, 앞뒤 얘기  잘라먹고 나한테 해당되는 얘기만 크게 들리는  확증편향것도 맞는데, 지금은 쉽게 시공간을 초월하고 이성적인 사고만 할 수 없는 게 내 현실이다.


강의자료에 실린 암포라에 그려진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모습을 보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면서 피똥을 싸고 있는데 슬프게도 그게 엄마 모습 같았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듯 엄마는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존재다. 그 자유는 당시 사회 관습적으로 허락된 자유를 뛰어넘었다. 살림이 궁핍하여 물질적 자유를 주지는 못했지만, 정신적 자유만큼은 보장했다. 어릴  주위 어른들은 엄마에게 딸한테 살림  가르치고 책만 보게 한다고  그렇게 키워서  하냐는 소리를 많이 했지만 엄마는 꿈쩍  했다. 손에   방울  묻히고 가만 뒀더니만 하란 공부는  하고 남자나 만나고 돌아다닐 때도 엄마는 나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대학  가고  장사 한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그러라고 했다.(그래서 속으로 계모인가 생각했다) 배낭여행 갔다가  나라에 눌러앉아 살겠다고 들어오지 않을 때도 하고 싶은  마음껏 하면서 자유롭고 살라고 했다.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엉뚱한 일을 시작할 때도 속은 썩었을지언정 아무 소리  했다. 처녀가 임신을 해서는 아이는 낳을 거지만 결혼을  한다고  때도 임신은 축복이라며 축하한다고 했다. 주위에서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엄마가  맞았다.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마음대로 정말 자유롭게 살았다. 나에게 자유를 안겨준 엄마 자신은 평생 자유롭지 못했고, 나이 들어 이제  자유로울 만하니까 병들어 자유롭지 못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던 딸을  작은 도시, 작은 아파트에 가두고 자유를 앗았다.


지금까지 엄마는 나에게 동시대 최고라고 자부할  있는 자유를 선사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지금부터는  자유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엄마에게 나의 자유를 헌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몸도 그러고 있는데 가끔씩 엄마가 심히 원망스럽다.


이러려고 나에게 자유를 줬나.

이럴 거면 자유의 달콤함을 알게나 하지 말지.

도대체 언제쯤 나는 자유로워질  있나.


하루종일, 하루에도 몇 번씩 양가감정에 시달린다.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고 엄마에게 헌신하자고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자유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운명에 순응한다. 막강한 운명이 아직 그렇게 되도록 때를 정하지 않았다고. 우선 무한히 혹독하게 나를 고난과 고통으로 굴복시킨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총명한 재주는  멀리 필연 아래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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