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요유 Jun 28. 2024

회색의 무지개다리를 지나

호위무사와 함께 학교에 갑니다

엄마?

응, 이제 학교 가?

응, 근데 오늘 늦잠 자서 조금 늦었어. 빨리 걷고 있는 중이야.

어제 늦게 잤어?

아니 일찍 잤는데, 늦게 일어났어.

아빠가 안 깨웠어?

응, 안 깨웠어.


아니, 이... 사람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하면서 속에서 부글부글(하지만 혼자 딸과 지내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잔소리는 못하겠지)


어디쯤이야?

회색의 무지개다리 지나고 있어.


회색의 무지개다리는 다리가 아니다. 이사 올 때만 해도 없었던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고가식 고속도로인데, 하필 딸이 학교 갈때  아래를 지나야 한다.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거기를 지날 때가 많은데, 고속도로 어쩌고 설명도 구차하고,  지점이  등굣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삭막한 풍경이라 빨간 머리앤이 그러듯이 이름을 붙이면 좀 나을까 하여 딸이 붙인 이름이다. 낭만 좋아하는 딸도  다리는 어떻게 해도 낭만적일 수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오늘 아침엔 뭐 먹었어?

미역국

미역국? 어제도 먹었잖아?

응, 미역국 이제 좀 지겨워. 그래도 아빠가 끓여준 건데 그냥 꾸역꾸역 먹었어.

에고,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줘야 되는데…

아니야. 그래도 아빠가 잘해줘(사줘.. 도 있을 것이고)

오늘 학교 급식이 콩나물밥에 불고기 퀘사딜라더라. 학교 가서 맛있는 거 먹어.


매일 아침 딸 학교 급식 메뉴를 살펴본다. 정작 같이 살 때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떨어져 살다 보니 딸이 뭘 먹고 다니나 궁금해서 매일 챙겨서 보고 아침에 급식 메뉴를 딸에게 알려주고 대화 소재로 삼는다.


학교 급식은 대체로 맛있는데, 가끔 조합이 이상한 거 같아. 콩나물밥에 퀘사딜라라…

영양소를 골고루 맞추려다 보니, 또 애들 입맛이 다양하니까 한식, 양식 섞어서 하는 것 같아.

그러겠지. 근데 뭐 공짜밥인데 뭘 불평하겠어. 그냥 감사하게 먹어야지.

그래, 집에서도 그렇게 골고루 못 먹잖아.

맞아. 열심히 먹어야지. 근데 애들이 급식을 잘 안 먹어서 걱정이야.

아… 그래도 넌 밥 잘 먹으니까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너무 좋아. 공부 잘하는 것보다 밥 잘 먹는 게 더 좋아(사실은 공부도 잘하면 더 좋겠지만… 너무 욕심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참, 어제 급식하다가 다연이 엄마랑 현규 엄마 봤다. 배식하러 오셨더라고.


다연이 엄마는 딸 초등학교 때부터 최근까지 피아노 레슨을 했다. 최근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 피아노 레슨을 못하게 되었고 딸도 10년을 조금 못 채우고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반가웠겠네.

응, 반가웠어.

다연이 엄마 보고 뜨끔하지는 않았어?

왜? 피아노 연습 안 해서?

응.

안 뜨끔했는데.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면서 다연이 엄마는 딸에게 지브리 악보집을 사주면서 일주일에 한 곡씩 연습하라고 했고, 딸은 약속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편이라서 지킬 줄 알았는데, 내가 알기로 한 번도 안 했다. 피아노에 먼지가 잔뜩 쌓였겠지. 피아노 뚜껑이라도 닫아 두라고 할걸.


방학 때 하지 뭐.

그래 연습해서 엄마 좀 들려줘. 너 피아노 치는 소리 듣고 싶어.

그래.


큰소리로 약속했지만 안 할 거 같은 느낌적 확신이 들었다. 어렸을 때 나의 피아노 선생님은 긴 자로 손등을 때리면서 엄하게(?) 레슨을 하는 선생님이어서 피아노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딸의 피아노 선생님은 그냥 즐겁게 음악을 하고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선생님으로 골랐고, 그 덕분인지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까지 피아노를 쳤다. 대개 많은 친구들이 중학교에 가면서 피아노를 그만두는데, 딸은 늦게까지 피아노를 친 편이긴 하다. 딸이 받은 (아직까지는) 유일한 사교육이었고, 오래도록 피아노를 쳤으면 했는데 중단해서 아쉬워서 어떻게 하면 딸이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근데 오늘 호위무사가 바뀐 거 같네. 소리가 달라.


 등굣길에는 옆에 작은 산이 있어 그런가 새가 많다. 전화할 때도 새소리가 새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많이 들린다. 처음엔  목소리가 새소리에 파묻혀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듣다 보니 딸의 등굣길을 지켜주는 호위무사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새들이 널 지켜주는 호위무사 같다고 하자, 딸은 감정이입이  되는지 별로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눈치챈 딸이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편하면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해 주었다. 이팔청춘의 나이가 되면 부모의 기분을 헤아려 맞출 줄도 안다.

 

그러네. 참새가 아니라 직박구리가 온 거 같은데.

아빠한테 물어봐.

어떻게 물어봐?

녹음해서 들려줘봐.

응, 알았어.


남편은 우리   전문가이다. 눈이 좋아서 맨눈으로도 새를  발견하고, 무슨 새인지 식별하고, 새소리만 듣고도 무슨 새인지 안다. 그 덕분에 나와 딸도 새에 관심이 생겨, 주위 사람에 비해 새에 대해 좀 아는 편이고, 새를 보면 새도감을 뒤적이며 이름을 알아내려고 애쓰고, 한때 우리는 10배율짜리 싸구려 망원경 하나 들고 탐조를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좋았는데, 그런 날이 다시 올까?


근데, 엄마, 엄마(호들갑 모드), 뮤지컬 시카고 알아?

너무 잘 알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중에 하나야.

(너무나 반갑고 신나는 목소리로) 그래? 봤어?

응, 봤지. 근데 갑자기 시카고는 왜?

아... 그게... 요즘 시카고가 떡상 중이거든. 지금 학교에 다 와서 나중에 말해줄게.

그래, 밥 잘 먹고 좋은 하루 보내고.

응, 엄마도 할머니랑 잘 지내.


뮤지컬 시카고는 내가 최애 뮤지컬이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봤고,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봤고(물론 배낭여행이라 돈이 없어서 진짜 꼭대기층 기둥으로 시야가 가려지는 자리에서 봤지만), 한국에서도 봤고(연애시절 남편이 생일선물로 보여줬다), 공짜 표가 생겨서 또 봤고, 영화는 10번쯤 봤다. 근데 뮤지컬 시카고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딸이 왜 갑자기 뮤지컬 시카고 이야기를 왜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