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과 한계의 중요성
엄마?
응.
시험 끝나고 잘 놀았어?
응.
뭐 하고 놀았어?
노래방 갔다가 마라탕 먹고 방탈출카페 갔다가 빙수 먹고 그랬지.
마라탕 인기는 여전하네.
응, 딱히 먹을 게 없어. 마라탕 아니면 떡볶이야.
방탈출카페는 좀 비싸서 못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근데 이번에 이벤트 가격으로 만 원이었어.
그 정도면 그렇게 비싸진 않네.
근데 이번에 아빠한테 돈 많이 썼다고 한 소리 들었어.
얼마나 썼는데?
2만 7천 원인가?
아, 많이 쓰긴 썼네.
나도 내가 돈 벌어서 쓰고 싶어. 내돈내산 하는 게 내 로망이야.
그럼 좋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대?
엄마, 아빠 돈은 내가 번 돈이 아니니까 쓸 때 조금 죄책감이 있어.
그래? 그런 생각하는 줄 몰랐네. 그래도 성인이 돼서 너 스스로 벌어서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가 널 키우고 지원할 책임이 있는 거니까 죄책감까지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너 평소에 돈 많이 안 쓰잖아. 물론 네가 너무 큰돈을 요구하고 쓴다고 하면 그건 못해줄 수도 있어. 그땐 엄마가 말해줄게.
딸이 돈 쓰는 데 있어서 죄책감까지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소유욕이 별로 없어서 부담스러운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한 적이 없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늘 소박한 걸 원하고 했다. 아직까지 옷이나 신발 같은 것도 욕심이 없고. 유일하게 딸이 큰돈을 쓰는 데는 아이돌 앨범 사는 것이고, 티켓팅 실패로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이유 콘서트를 가게 되면 그게 제일 큰 소비가 될 것 같다. 아이가 큰 소비를 한 적이 없어서 아이가 뭘 한다고 했을 때 크게 제한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기특하고 고맙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은연중에 소비에 대해 죄악시하고 야박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닌지 뒤돌아보게 된다. 남들은 하나밖에 없는 고명딸인데 옷도 좀 좋은 걸로 사주고 학원도 보내고 하라는데, 나는 아이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아직까지 없고 사실 그럴 능력도 안 된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돈을 아예 안 쓰는 건 아닌데 주로 쓰는 돈은 여행, 책, 영화, 콘서트, 스포츠 같은 소위 말하는 문화적 경험에 대한 소비인 것 같다.
나 용돈을 받아서 쓰고 싶어.
그래? 그건 당장 하면 되지.
내가 한 달에 쓸 수 있는 돈의 크기를 알아야, 내가 그 안에서 쓰고 안 쓰고를 결정하면서 쓸 수 있을 것 같아. 아빠 카드는 얼마까지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쓸 때마다 고민이 돼. 나는 이번에 시험 끝나고 이 정도는 써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돈 썼다고 잔소리 들으면 기분 안 좋고. 그냥 한 달에 얼마 이렇게 정했으면 좋겠어.
초등학교 때 한 달에 5천 원인가, 용돈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용돈을 쓸 때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딸이 다녔던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없어서 직접 학용품 살 일도 없고, 가까이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당시 딸은 군것질을 잘 안 할 때여서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초등학생일 때는 친구들과 놀더라도 주로 집에 와서 놀았기 때문에 돈을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이제 보호자 없이 밖에서 만나다 보니 돈이 필요해진 것이다. 지금은 아빠 카드를 쓰고 있다.
한 달에 얼마가 적당할 거 같아?
글쎄, 한 5만 원? 근데 그 용돈 안에 문제집이나 콘서트 티켓도 포함되는 건가?
용돈의 범위를 정해야겠네. 엄마도 얼마가 적당한 금액인지 좀 고민되긴 하는데, 각자 생각해 보고 결정하자.
다시 생각해 보니 아빠 카드의 투명함이 불편했던 것 같다. 카드의 장점은 애가 무엇을 얼마나 쓰는지 즉시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딸에게는 실시간 감시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 용돈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쓰면 되니까 투명한 불편함은 사라진다. 이번에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에게 규칙과 한계, 그 안에서 자율성과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없으니 필요 이상 불안해하고,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는 것 같다. 빨리 합리적인 용돈의 범위를 결정해서 용돈제로 바꿔야겠다. 그런데 얼마를 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