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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Aug 27. 2024

사람이 냉장고일 수는 없어

냉장고 수리를 지켜보았다

그날이 왔다. 엄마집에 와서 엄마 간병인으로 살며 사람 만나는 사회생활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 딱히 저장될 게 없던 캘린더에 오랜만에 저장된 그날, 과양 이 날이 오려나 싶을 정도로 아득히 먼 미래 같아 보였던 그날이 왔다. 가장 더웠던 여름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사람보다 냉장고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내가 알기로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냉장고가 더위를 먹었는지 작동을 멈춘 것이다.


AS를 신청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아빠가 먼저 ARS로 시도하다가 콜이 많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 셀프로 점검을 해보라는 반복재생되는 멘트에 손을 들고, 마침 옆에 있던 손녀딸에게 네가 한번 해보라며 시켰고, 그래도 손녀딸은 할아버지보다는 나은지 전화번호를 남기는 것까지 했다고 했다. 내일이면 즤집으로 떠날 딸이 전화번호를 남겨봤자 소용없는 일이어서 내가 시도했고, 나도 전화번호까지는 남겼다. 다음날 오후에서야 콜백 전화가 왔고, 무려 3주 뒤에나 방문할 수 있다는 말에 망연자실했지만 어쩌겠나 싶어서 그날을 캘린더에 저장해 두었다. 냉장고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지만 또 다 살게 되어 있다. 냉장고에 있던 것을 김치냉장고로 옮기고, 가능한 먹고 버리고, 가능한 저장하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중에 처서가 지났고, 이제 좀 살만 하다 싶을 때 그날이 되었다는 알람이 울렸고, 기사 분이 오시겠다고 전화한 지 5분 안에 도착했다.


기사 분이 오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앞으로 빼내려고 했다. 하필 아빠는 외출 중이고, 나는 허리가 아파서 도울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니에요. 냉장고는 가볍거든요, 하면서 냉장고 안과 밖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더니 앞으로 당기기만 했는데 냉장고가 정말 가볍게 쓔웅하면서 튀어나왔다.


냉장고는 생각보다 가볍구나.


가볍다는 말이 굉장히 좋게 들렸다. 나는 요즘 무게움에 짓눌려있다. 엄마 간병을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무거운 엄마의 , 각오보다 훨씬 무거워진 엄마 돌봄에 대한 책임감, 딸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무엇보다    건사하는 것도 너무 힘든  삶의 무게가 가벼움을 동경하게 만든 걸까:


기사 분이 냉장고 뒤쪽에 털석 주저앉아  가지 체크하더니 현관에 두고  박스를 꺼내오면서 콤프레셔를 새것으로 교체하겠다고 했다. 기간  콤프레셔 교체는 무상이라고 했고 콤프레셔 교체는  40 정도 걸린다고 했다.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무상 교체여서 마음이 너그러워졌는지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고, 다행히 엄마도 깨지 않고 가볍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있기도 그렇고, 집안 일을 하기도 그렇고, TV 보기도 그래서 거실 구석에 가서 책을 읽기로 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사랑의 역사라는 흥미로운 제목인데, 제목과 달리 진도가   나가서  오래 붙들고 있는 책이었다. 읽고 있던 부분은 남자 주인공의 하나뿐인 아들이 신문 부고란에  것을 보았고 아들 장례식에 가기 위해 양복을 사러 다니는 장면이라 슬슬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냉장고 수리가 끝났다고 했다. 1시간이  걸린  다. 빨리 끝났네요, 라고 말했더니 냉장고를 가동해 보고 냉기가 나오는 것까지 확인하는 것까지 1시간이라고 했다.


전원을 꽂자마자 하얀 불이 새집처럼 환하게 들어왔고, 참았다는  냉기가 쏟아져 나오는  느껴졌다. 정상가동되려면 이틀이 걸린다고 했는데, 1시간 만에 얼음이 얼었다. 생각보다 가볍고, 교체도 쉽고, 돈도  들고, 빨리 정상 작동되는 냉장고를 보는데 이게 이럴 일인가 싶을 정도로 감개가 무량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 부품만 교체하면 바로 정상이 되는, 이런 생각까지 가려는  사람이 냉장고일 수는 없지, 하며 되돌아왔다. 엄마가 아프고, 회복 불능해 보이고, 돌봄이라는 무겁고 어려운 길을 가다 보니 냉장고 수리하는 것만 봐도  생각이  드는구나. 가벼움을 갈망하면서도 나에게 지워진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애를 쓰는  자신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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