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요유 Aug 26. 2024

까만 눈물

내일이면 괜찮아질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번엔 까만 눈물이었다. 정말 새까맣게 타버린 눈물이었다.


 사갈까? 회사 일이 바빠 2주만에 오는 동생이 물었고, 소꼬리를  오라고 했다. 얼마 전부터 동생이 서진이네라는 프로그램에서 보고 여름에 몸이 축났을 엄마 몸보신을 위해 소꼬리로 꼬리곰탕을 한번 하고 싶어 했고, 나는 더위가   꺾이고 나서 하자고 미뤄놓았다가 이번에 하자고 했다.


동생이 여러 번 물을 갈아주며 3시간동안 핏물을 빼고, 지방 제거하고 손질해서 한번 끓여내서 불순물을 없앤 다음 다시 깨끗이 씻고 본격적으로 끓이기 시작한 게 오후 3시쯤. 다행히 우리 집 베란다에는 화력 좋은 큰 가스버너가 있어서 곰탕을 끓이기 좋다. 적어도 반나절은 고아야 하는데 일찍 자는 나와 아빠 대신 동생이 밤늦게까지 지키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에 나가보니 바닥이 미끌했다. 뚜껑을 열었더니 뽀얀 국물이 제법  우러나 있었다. 방송에서 이서진이 밤새 기름을 계속 걷어내는  따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베란다 바닥이 미끄러웠구나. 아침 먹고 청소할 거라고 했다.  냄비를 가져와서 아침에 먹을 곰탕 국물을 반쯤 덜어내고, 동생은 뼈에서 고기를 발라낸 다음 솥에 다시 꼬리뼈와 물을 채워서 다시   끓이기로 하고 아빠에게 버너에 다시 불을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는 허리가 아파 잠시 휴식차 방에 누웠고, 어젯밤 늦게  동생은 늦잠을 잤다. 나는 방에 누워서 베란다에서 펄펄 끓고 있는 곰탕 소리를 듣고 있었다. 불이  센가? 끓는 소리가  요란했고,  줄이면 좋겠는데, 이따 나가서 줄여야지, 생각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벌떡 일어나 뭐가 탄다, 소리를 질렀고, 가장 가까이 있던 아빠가 나가서 불을 껐다. 이미 새까맣게  타버렸다. 불이    다행이었다. 아빠가 뚜껑을 여니 판도라 상자라도 열린  온갖 역겨운 냄새가 뿌연 연기에 실려 무섭게 퍼지 시작했다. 베란다를 면하고 있는  방에 연기가 자욱했고, 걷잡을  없는 속도로 거실을 지나 문을 활짝 열어놓은 현관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복도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아니기를 바랐지만 탄내 때문에 불이   알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나가서 말해야 하나,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옆집에서 찾아왔다. 문이 열려있었으니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갑자기 사람이 우리 현관에 사람이 나타난 셈이었다. 나는 잠옷 바람이었고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혹시 여기 뭐 타고 있나요?

네, 뭘 좀 태웠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러면 됐어요. 불 난 줄 알고 놀라서요.

아, 죄송합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엄마도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아픈 사람 엄마 말고 사람이 셋이나 있었는데 곰탕 솥을 태워먹다니. 부끄럽고 어이없고 속상하고 화나고 미안하고 실망스럽고 절망적이고 온 세상이 나를, 또는 우리를 저버린 느낌이었다.


방에 들어가서 엉엉 울었다. 아니 엉어,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숨죽여 울었다. 하지만 아빠도 동생도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도 울고 싶었을 것이다. 아픈 엄마 먹이겠다고 피곤한 동생이 눈 비벼 가며 밤새 정성스럽게 끓인 걸 홀랑 태워먹다니. 동생에게 미안했다. 또 주말 아침부터 아파트 주민들 놀라게 만들고 먼저 나가 안심시키고 사과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타버린 것은 솥만이 아니다. 내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다듬고, 우리고 또 우린 우리의 정성과 마음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았다. 까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세상이 이렇게 나를 배반하나. 안 그래도 엄마 아파서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사람을 두 번 죽이나. 너무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까맣게 타버린 솥은 아직 열어 보지도 못했고, 치울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내일이면 괜찮아질까. 그래도 내일은 치워야겠지.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면


이전 06화 우리집 깻잎논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