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
갑자기 몸이 떨린다. 한기가 느껴지고 재채기가 났다. 아침부터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지 찬 바람이 방으로 밀려 들어와 얼굴과 이불 위로 가라앉기 무섭게 이불을 뚫고 살갗 속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위잉, 하고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다가 방으로 쳐들어와서 귀를 따갑게 하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냄새지?
딸 영서가 내 주위에서 킁킁거리며 말했다. 분명히 혼잣말일 텐데도 내 귀에 확성기를 대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렸다. 영서는 요즘 부쩍 무슨 냄새가 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때마다 나는 죄스럽다.
나는 안다. 영서가 냄새에 얼마나 예민한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화학적이고 인위적인 냄새를 병적으로 싫어해서 향수나 방향제, 섬유유연제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집에서 우리가 싫어하던 냄새가 많이 난다. 더 싫어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싫어하는 냄새를 이용하는 것이다. 영서를 힘들게 하는 그 냄새는 나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영서는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아침부터 환기를 하고, 부지런히 뭔가를 살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나를 열심히 씻기고 내 몸에 뭔가를 듬뿍 바른다. 칙칙, 칙칙, 소리가 나면 코를 막고 싶다. 나는 저 냄새들이 싫지만, 싫어도 싫다고 말할 수 없다. 설사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영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참는 것이다.
오늘 누가 오는 모양이다. 영서는 아침부터 청소를 가열하게 하는 날에는 집에 누가 왔다. 한참을 정신없이 돌아가던 청소기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는 걸 보니 이제 청소가 끝난 모양이다. 잠시 뒤 전화가 울리고 영서는 정중하게 네 알겠습니다, 했다. 얼마 후 초인종 소리가 들렸고, 영서가 슬리퍼를 바쁘게 끌고 나에게서 멀어졌다가 찰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그 뒤로는 영서와 엇박자로 둔탁하게 걷는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
엄마, 선생님 오셨네.
오랜만에 듣는 영서의 예쁜 목소리다. 지난주부터 한의사 선생님이 오시는데 그때 영서의 목소리는 달라졌다. 영서 특유의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선생님을 맞이하고, 선생님과 함께 내 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이 퉁퉁 부은 내 다리에 침을 놓는 동안 영서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엄마 아파? 엄마 아프면 말해, 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솔직히 당황했다. 영서가 나에게 다정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럴 일이 없었기에 영서의 다정한 말이 나에게 향하는 것이 어색했고 영서의 따뜻한 손길도 낯설었다.
딸 영서의 목소리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남편과 셋이 있을 때, 아들까지 넷이 있을 때, 사위와 손녀가 왔을 때, 그리고 손님이 왔을 때 모두 다르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 건조하고, 남편과 있을 때 퉁명스럽고 자주 짜증을 낸다. 뒤로 갈수록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상냥해지고, 친절해진다. 처음에는 좀 충격받았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 순식간에 변하는 목소리가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 신기할 정도였다. 처음엔 서운하기도 했고, 내 처지가 서글프기도 했고, 솔직히 배신감도 들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냉랭할 수가 있나. 어떨 땐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고, 이중인격자, 괴물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영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아이들을 키울 때 아이들에게 늘 친절하지 못했다.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아이들 잘못이 아닌데도 감정적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홧김에 엉뚱한 아이 등짝을 찰싹 때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영서가 나에게 그러는 것이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안쓰럽고 이해가 되었다. 이제는 누가 집에 오면 좋다. 영서에게서 예쁜 목소리가 나오니까. 그때만이라도 영서가 평화로웠으면 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싫어하는 냄새도 참을 수 있다. 조금 추워도 괜찮다. 영서가 나에게도 다정했던 그때가 그립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없겠지? 그러니까 선생님이 자주 왔으면 좋겠다. 잠시라도 영서가 예쁜 마음이 되고 예쁜 말이 나오게. 나한테도 그렇게 해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 딸 영서는 지금 충분히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