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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 인생의 트러블 메이커

by 휴지기

지난 주말, 경기도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운 좋게 금요일에 휴가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인 교외체험활동을 써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학교 제일 싫어하는데 학교 제일 성실하게 다녀'라고 투덜대는 아이에게는, 방학이 아닌 평일에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기쁜 일이다.


금요일에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들뜬 마음 때문에, 심지어 차가 아니고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기대 때문에 아이는 목요일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금요일 아침에 깨우지도 않았는데 새벽부터 스스로 일어났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챙겨 백팩에 넣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좋은 일들이 여럿 있는데 아이의 짐을 아이 혼자서 들 수 있다는 것도 그 좋은 일 중에 하나였다. 어렸을 때는 나와 아이의 짐을 모두 하나의 캐리어에 넣어 내가 끌고 다녀야 했다. 캐리어와 아이를 한꺼번에 챙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와의 여행은 나에게는, 여행이기 이전에 노동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행 느낌이 났다. 마음도 짐도 크게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우리는 기차 안에서 각자의 책을 읽었다.


기차역에서 내려 우리는 근처 롯데몰로 가 점심을 먹고 책을 산 후 카페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사실 우리의 여행지가 경기도가 된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여행을 할 거면 자기 일하는 쪽으로 와 주말을 함께 보내자고 했었다. 이혼 서류를 제출한 마당에 남편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에 많이 웃는다.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남편과 있으면 어쨌든, 나도 많이 웃는다. 웃는 것보다 더 많이 화내고 절망한다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역시, 언제나 그렇듯 남편은 약속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아이는 카페에서 지겹다며 몸을 배배 꼬았고, 나는 전화를 해서 재촉했다. 왜 안 오냐고, 왜 아직도 출발을 안 한 거냐고, 만나기로 한 시간에도 출발을 하지 않은 남편에게 잔뜩 짜증과 화를 퍼부은 후 남편은 도착할 수 있었다.


남편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서 작업이 늦게 끝났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니가 그렇지 뭐, 어떤 것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고, 그 예상하지 못했던 수두룩한 문제들과 사건들 때문에 너랑 내가 이렇게 된 거겠지.'라고 한껏 비난해 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 큰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인생의 트러블 메이커, 남편은 그 역할을 이번 여행에서도 충실히 이행했다.


금요일 밤에 담배를 피우고 온다면서 잠깐 나갔다 온 남편의 얼굴이 썩어있었다. 그렇다, 말 그대로 썩어있었다. '썩은 표정'의 예시로 들 수 있을 만큼 정석으로 말이다.


내가 물었다.


"왜? 또 무슨 일 있어?"

"......"

"말해. 무슨 일인데?"

"나 지금 타는 차 렌트잖아. 그거 요금 미납돼서 시동이 꺼졌어. 혹시 몰라서 시동 걸어봤는데 안 걸려. 혹시 몰라서 아까 전화해놨었는데.... 아, 다음 주에 해결해 준다고 했는데..."


우리의 숙소는 경기도 오이도였다. 오이도에서 차가 멈춘 것이다. 게다가 여행 첫날밤이었다. 남편이 차를 쓸 수 없다면 우리는 이후의 여행을 할 수 없었다. 당장 이틀 후 기차역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결해. 지금 당장 해결해'라고 말했지만, 그래서 남편은 여전히 썩은 얼굴로 해결해 보겠다고 숙소 방을 나갔지만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삼십 분 뒤, 남편은 조금 더 썩은 얼굴로 숙소 방으로 들어왔다.


"해결했어?"

"아니"

"얼만데?"


결국은 묻고 말았다. 얼마냐고.... 이게 우리의 루틴이었다.


남편이 사건을 일으킨다. 나는 해결하라고 닦달하며 애태운다. 남편은 해결하지 못한다. 내가 해결해야 할 돈이 얼마냐고 묻는다. 결국은 내가 해결해 준다.


이번에도 내가 해결해 주었다. 물론, 내가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다. 빚을 져서 해결을 해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행 중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차를 쓰지 못하면 우리는 여행을 할 수 없으니까, 아이가 밤잠을 설쳐가면서 설레고 기대한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우리의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그 순간을 지키기 위해 적금을 깨고 대출을 받고 차를 팔아 남편에게 돈을 대 주었던 것 같다. 그 순간을 지키기 위해, 그 순간의 안온함과 평온을 지키기 위해, 그 순간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나의 선택들이 결국은 나의 인생 자체를 깨트려버리지 않았나 싶다. 남편에게 돈을 해 줄 때에는 지키고 싶어 그랬다지만 사실은, 두려웠던 것 같다.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 그래서 문제를 애써 보지 않고 계속 최선을 다해 미뤄두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터질 문제를 미루느라 나의 온 에너지를,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많은 것들을 허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은 나의 트러블 메이커, 남편을 치워야 나의 인생에 트러블이 그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남편에게 내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난 후에야, 가진 것을 모두 다 쏟아 붓고 난 후에야 이런 결행을 했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나는 원래 겁이 많고 멍청한 걸.... 그리하여 실제로 당하지 않고서는, 내 몸으로 직접 겪어내지 않고서는 알지 못하는 걸....


내 손으로 내 발등을 찍은 거니 내 손을 원망해야지 도끼를 원망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싶다. 이제와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그냥 발등에 피를 흘리며 걸어갈 밖에... 그저 붕대로 대충 발등을 감싸고 가야 할 길을 가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인생, 만만치 않다.




글을 쓰고 있는 토요일 오전, 카페에 캐럴이 울려 퍼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에 메리했던 기억이 있었나 생각해 본다.


매해 메리하기를 기대하지만, 나의 크리스마스는 외롭고 쓸쓸했던 적이 더 많았다. 자꾸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니 내 크리스마스가 더 외롭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메리하길, 따뜻하길, 풍요롭길.... 헛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또 기대해 본다.


메리 크리스마스, 행복한 크리스마스, 더불어 로맨틱한 크리스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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