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이라는 소설 일부이다.
가난한 유학생이 외국인의 입주 가정부가 되어서 창밖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떤 여름 오후. 스러지는 햇빛 아래 나무의 긴 그림자가 마치 자신의 인생의 퇴락처럼 힘겹게 빛과 모양을 유지하려 애쓰며 바래가던 날, 어머니는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상실의 세계를 보아버렸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빤히 알고 살아야 한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틀을 지켜야 하고 더 이상 동의하지 않게 된 이데올로기에 묵묵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세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 잡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두운 극장의 의자에 앉아 모든 것이 흘러가고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고통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전될 것이다.
소설은 '류'와 '요셉'의 이야기, '류'의 엄마와 '류'의 아빠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을 두 번 읽으면서 나는 계속 '류'의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했고, '류'의 엄마에 관한 서술에 밑줄을 쳤다.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에 넘어가 함께 유학까지 갔지만, 거기서 외국인의 입주 가정부가 되어야 했던 여자.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나무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자기 인생의 퇴락을 직감하는 여자.
결혼하고 나서는 저런 단어들에 마음이 쓰인다. 스러지는, 퇴락, 애쓰며 바래가던, 상실, 쓸쓸할, 고통, 고독 이런 것들... 위의 서술이 '류'의 엄마가 아니라 내 이야기인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이상하게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약간은 안심이 된다. 나만 쓸쓸한 게 아니다, 나만 애쓰는 게 아니다, 나만 퇴락해 가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인스타를 안 한다. 인스타를 보면 다들 화려하고 찬란한 순간을 보내는 것 같은데 나만 초라하고 나만 바래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버텨내야 하는 순간순간이 더 외롭고 힘겨워지기 때문이다. 인스타 속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비싼 풀빌라에도 자주 가고 맨날 그렇게 비싼 옷과 가방들로 치장을 하는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게 너무 억울하다.
기도할 수 있는 모든 순간, 예를 들어 보름달이 떴다든지 일출을 본다든지 사찰 연못에 동전을 던지든지 하는 순간, 하다못해 등산 가다가 돌탑을 마주친 순간에도 나는 언제나 남편의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 넘게 기도했으면 이제 들어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응답은 받은 적은 없다. 잦은 고통이 침전되어 고독이 되었다. 고독한 나는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글처럼 나는, 그리고 우리는 쓸쓸할 줄 빤히 알고 살아야 한다.
뭐 어쩌겠는가? 방법이 없다. 절대 태연할 수 없는 인생, 태연한 척하며 그냥 그렇게 사는 수밖에.
아침부터 아들에게 장난을 치다가 니킥으로 턱주가리를 얻어맞은 남편은(물론 아들이 일부러 때린 건 아니다. 남편의 장난에 허우적거리다가 무릎으로 남편 얼굴을 자기도 모르게 치게 된 것뿐) 골이 띵하다고 하면서 슈퍼에 가서 양지고기와 떡을 사 왔다. 새해니까 떡국을 끓여주겠다면서 말이다.
가난한 남편은 자꾸 요리를 한다. 그럴 때마다 퇴락의 속도가 조금씩은, 느려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