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의 계절

by 마음자리
2.jpg 부산의 여름바다


연인에게 선물 받은 노란 장미가 뿜어내는 향기가 마음의 공간을 메우니까 꼭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대한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을 곱게 걸러 건네고 싶은 마음은 속닥하고 포근한 것이어서, 쉬이 짐작하지 못할 슬픔을 간직한 이들과 그런 마음을 나누고 싶다. 한번 풀어헤친 마음을 닫지 않고 성실하게 사랑을 전하는 내 연인에게도 이같은 소망을 속삭이고 싶다.


튀지 않게, 잔잔하게 보낸 9월의 두번째 주말이었다. 아침과 밤의 공기에선 낯설게 차가움이 느껴지지만, 정오 즈음에는 여름의 햇살이 비추는 가을의 초입이기도 하다. 작정하고 찾은 미용실에서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흡족한 펌을 하고, 펌을 하는 네 시간 내내 반듯하고 조용하게 자리를 지켜준 오빠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오랜 기다림 후에도 조도가 알맞은 곳에서 저녁 식사를 마련해주는 그 다정함에서 사랑을 느끼고, 그가 사온 꽃과 함께 맛있고 건강한 것을 해먹는 시간에서도 사랑을 느끼고, 내 손을 움켜쥐는 그의 섬세한 힘에서 사랑을 느끼고. 그렇게 사랑으로 어린아이가 되는 주말을 만끽했다.


시원하게 탁 트인 전경이 기분 좋은 부산역 광장을 함께 산책하면서, "이제 오빠가 이렇게 여기를 내려오는 것도 몇 차례 남지 않았다. 그렇지?"라고 얘기하며 새삼 놀라웠다. 앞으로 그가 이곳 부산으로, 그러니까 그의 자취방에서부터 여섯 개의 지하철 정류장을 거쳐 서울역으로, ktx 특유의 좁은 좌석이 품은 무료함을 어떻게든 견디며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향하는 것도 많으면 여섯 차례 정도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기분이다. 서울에서의 자취방은 넓고 쾌적하기가 가뭄과도 같은데, 과분한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겹쳐나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물씬 앞서나가는 것이다.


부산은 뭐랄까 내게 애증의 도시와도 같은 곳이다. 외로움으로 점철된 무정한 하루를 겨우 나기도 하고, 오래 품어왔던 바램들에 다가서는 용기를 살기도 하고. 이를테면 갑자기 맞닥뜨린 슬픔이 몸과 마음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던 무수한 밤들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의기소침해졌던 수많은 나. 그러나 동시에 열심히 번 돈으로 나의 첫 피아노를 구입하게 된 일과 재즈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 잊어가는 스페인어를 다시 시작하게 된 것과 평생 시도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헬스를 시작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맥주병을 탈출하게 된 기념비적인 전환. 슬픔에서부터의 회복을 기대하게끔 하는 첫 상담을 앞두고 있는 것까지.


무엇이 가장 큰 의미였느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떤 미움과 화해한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 미움은 너무 오랜 시간 나를 괴롭게 한 것이어서, 너무도 오래 미워하고 미워해서 마음이 헐어버리곤 했다고, 그렇게 모난 마음과 화해하게 된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날을 세우게 되는 것만큼 아픈 아픔도 없을 것인데 그 고통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경이롭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이상 원망하지 않고, 구김살 없이 사랑하게 된 일이야말로 가장 불가해한 행운인 것이다. 미움에는 어떠한 힘도 없다는 것을, 상처 속에서 끝없이 헤매는 일은 경계 없는 늪을 헤집고 다니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사랑은 또다른 사랑을 꿰어내고, 미움이 조금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크고 작은 변화를 발아해내고 있다. 이 생소한 변화로 인해 비로소 삶은 묵은 슬픔과 작별하게 된다. 사랑의 부재와 존재로부터 늘 무언가가 빚어지는 것이다.


생소하고 충만한 삶을 오래도록 살면서 더 완연한 나이고 싶다. 낡고 소란한 이 도시에서 보낸 여덟 번의 계절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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