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고려연방의 출범과 함께 남북출입사무소도 철거되어 남과 북을 구분하던 경계선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고려연방의 국민이라면 범법자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거주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규모의 이동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랜 세월 남북으로 나뉘어서 살아온 만큼 서로 신중하게 상대를 탐문하면서 천천히 하나가 되어갔다.
코리아평화공원으로 명명된 비무장지대는 전쟁과 분단의 상징처럼 그 잔흔들이 남아있었다.
도처에 파묻혀있던 350만 발 이상의 지뢰를 파헤치는 작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의 어느 중견기업이 개발하여 투입된 거대한 불도저모양의 최첨단 지뢰제거기의 작업속도는 놀라웠다.
시속 30킬로의 속도로 지나갈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제압된 지뢰들이 고구마줄기처럼 빨려 나와 그 추한 몸뚱이를 드러냈다.
전체 구간에 투입된 지뢰제거기의 수가 무려 수백 대에 이르렀다.
한시라도 빨리 분단의 상처를 지우고 싶어 하는 대고려연방 국민들의 염원으로 작업은 밤낮없이 강행되었다.
명색이 대고려연방정부가 출범하였지만 기존의 남북한정부가 공존하는 현실에서는 상징적인 모습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남북한의 양 정부에 의해서 통일을 언제든지 한낱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대고려연방의 첫출발은 외교 체육 산림분야 등 극히 초보적인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권한들이 남북한의 정부로부터 이양이 유보되었다.
그래서 십 년의 불안정한 유예기간은 완전한 통일로 나아가는 준비기간일 뿐 통일의 완전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9월 초에 실시된 전국지방자치선거는 대고려연방의 정치, 행정체제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열한 개의 메가시티 광역권으로 행정단위가 재편됨으로써 그동안 중앙정부에 집중되어 있던 권한들이 주자치정부로 빠르게 분산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십 년의 유예기간이라는 불안정성이 오히려 지방자치를 강화시키는 역동적인 결과로 작동됐다.
열한 개의 주자치가 빠르게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서 십 년의 유예기간이 무색해지는 현상들이 점차 굳어졌다.
이렇게 되자 남북한의 기존 정부는 국방과 화폐발행권, 국세의 징수권 정도만 가질 뿐 대부분의 권한들이 빠른 속도로 지방정부로 이양되었다.
기존의 남북한 정부가 스스로 권한을 내려놓은 탓도 있었지만 이제 통일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는 연방국민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사회현상이었다.
통일이라는 위상의 파워는 그 자체만으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남북한의 모든 군인과 경찰 소방대원 등 일체의 공무 제복을 단일화시켜 통일의 상징성을 공유하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특히 남북군대의 징병제 폐지와 부사관 중심의 지원병제는 국방정책의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인생의 황금기인 이십 대의 특정 시기에 의무적으로 징집군인이 되어야 했던 것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슬픈 비애였다.
그러나 이제 자원하는 젊은이들만이 직업군인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군대의 수준이 질적으로 향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연스럽게 청년실업의 문제도 해소되는 2중의 효과를 노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막상 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시너지 효과들이 사회곳곳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대고려연방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11월의 가을내음은 예년보다도 훨씬 더 진한 향내로 다가왔다.
퇴근 무렵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던 윤 비서관이 고풍스러운 전통찻집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커피가 있는 찻집 풍경’이라는 나무간판은 여전히 묵직한 목문 위에서 삐꺼덕 소리를 내면서 바람결에 흔들렸다.
“비서관님! 여깁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장 팀장이 늘 앉던 안쪽 구석자리에서 윤 비서관을 불렀다.
“일행분이 계셨네!”
장 팀장이 동행한 사내와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인사드리지! 청와대에 계시는 윤 비서관님!”
“처음 뵙겠습니다, 위규태라고 합니다!”
자리에 앉으며 장 팀장이 규태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이번에 북방사 연구소의 인턴으로 채용된 신입연구원입니다,
비서관님! 알고 보니 이 친구가 글쎄 독도전쟁의 산증인이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흑군파의 칼부림으로 사망한 학생이 이 친구의 동아리 후배였다고 하는데 자신들이 진짜베기 삼일특공대였다는 겁니다!”
순간 규태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다케시마수복결사대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은 후배 준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침울한 표정의 규태를 위로하려는 듯 장 팀장이 또다시 규태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을 때 이 모습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윤 비서관이 말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일본도에 맞서서 대나무 막대 하나로 맞서 싸웠던 그 용기가 대단했습니다!
그 당시의 심정이 어땠나요?”
머리를 숙이던 규태가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바로 삼일특공대였다 아입니까!
그때는 겁나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 땅을 저거 땅이라고 빡빡 우겨대는 쪽빠리새끼들을 박살 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장 팀장이 놀랍다는 듯이 다시 규태를 바라봤다.
“삼일특공대? 우리 팀에게 영감을 준 원조 삼일특공대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그때 우리는 삼일운동 110주념기념 상황극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내하고 후배 두 명이 맡았던 역할이 일본헌병을 혼내주는 삼일특공대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다케시마가 저거 땅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길래 연극할 때의 복장상태 그대로 달려가서 금마들하고 한판 붙었뿟다 아입니까?
그랬던 내가 다시 삼일특공대에 들어왔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규태는 오랜만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싶었지만 이제 갓 시작하는 인턴이라는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오늘은 이 정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 팀장이 다시 규태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하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자기 집을 제대로 찾아온 거잖아!
원조 삼일특공대답게 우리 팀을 접수해 버리라고!”
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규태를 응시하던 윤 비서관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독도연구소가 아닌 북방사 연구소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군요?”
굳이 누가 묻지 않더라도 스스로라도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던 차에 잘되었다는 표정이다.
“남북대학생들의 백두산정계비 탐험 행사 때 겪었던 여러 경험들이 마음을 이쪽으로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규태는 더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서 머무르기로 인내하는 중이다.
규태가 끝내 자신의 입을 다스렸을 때 은하를 구하기 위하여 생사를 넘나들었던 미니탐험대의 무용담을 두 사람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사이 전통찻집이라는 서정적인 분위기와 절묘하게 대비되는 익숙한 향기가 다가왔다.
갓 볶아낸 구수한 커피 향을 온 사방으로 풍기면서 투박한 머그컵에 담긴 아메리카노가 오래된 원목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맛있게 드세요!”
언제나처럼 단정한 개량 한복이 잘 어울리는 이 집 여사장의 자태와 친절한 미소는 커피 맛을 돋우는 기분 좋은 립서비스였다.
모두는 미소로 화답하며 커피 잔을 들었지만 유독 규태만큼은 한마디를 더 보태고서야 직성이 풀렸다.
“한복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여전히 미소로만 답할 뿐 이 집 여사장은 더 이상의 인사말 없이 조용히 물러났고 모두는 은은하게 우러나는 녹차향의 분위기 속에서 아메리카노의 깊은 맛을 향유했다.
“장 팀장! 우리 팀은 아직 해체되지 않았다는 것 알고 있지?
앞으로도 마무리해야 될 일들이 많을 테니까 긴장들을 풀면 안 돼!”
이때 장 팀장이 뭔가 중요한 대화를 하려는지 자리를 바짝 당겨 앉았다.
“연방정부가 들어선 지 이제 겨우 5개월이 지났을 뿐인데도 북쪽의 장마당 어디에서도 북한돈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는답니다,
모두가 한국 돈으로만 거래가 되고 있다는 것은 실물경제는 이미 종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윤 비서관은 언제나처럼 장 팀장이 내어놓을 대안을 기다리며 태연하게 커피 잔을 들었다.
역시 이번에도 윤 비서관의 예상은 적중했다.
“더 늦기 전에 통일화폐를 발행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참에 남북 양쪽의 중앙은행 기능들을 연방정부로 이양시켜서 대고려연방의 위상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조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실행의 단계를 한 단계 더 높이자는 말인데 본격적으로 실행계획 3으로 진입하자는 말인가?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
“돌아가는 현장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작금의 시장 상황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게 우리의 내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시장은 그때가 무르익었다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화학적 결합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칫 시장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다가 연방과 민심이 서로 동떨어진 방향으로 나아갈까 봐 오히려 그것이 걱정입니다,
민심의 바로미터인 시장을 믿고서 시장과 함께 보조를 맞추는 것이 정답일 것 같은데요”
“시장의 상황이 우리 내부의 지표다!
그래서 민심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옳은 말이긴 한데 말이야"
삼일특공대의 실무를 관장하던 장 팀장의 입에서 드디어 한반도실행계획의 제3단계를 주문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십 년의 유예기간을 거치는 동안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던 문제가 바로 통일화폐의 발행과 남북한 군대의 통합문제다.
어차피 어느 한쪽의 일방에 의한 통일이 아닌 바에는 화폐와 군대의 통합은 대단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통일의 마지막 종결 편이었다.
하지만 이 두 조각의 통합 과정에서 만에 하나 파열음이라도 발생한다면 수습이 불가능한 사태로 비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결하고자 했던 것인데 문제는 북쪽에서조차 북한중앙은행에서 발행한 화폐의 사용을 꺼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날 저녁 늦은 시각,
윤 비서관은 민 대통령의 업무가 끝날 때를 기다려 대통령 집무실을 찾았다.
민 대통령은 언제나처럼 윤 비서관을 집무실의 소파로 안내하여 편안하게 독대했다.
대통령은 마음이 편한 사람들과 대화할 땐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는 습관이 있었다.
오늘도 묵직한 금테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윤 비서관이 내게 독대를 신청하는 날에는 언제부턴가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또 무슨 굉장한 이야기로 날 놀랠킬까 하고요,
그래요, 이제는 놀랄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대통령은 가벼운 농담으로 윤 비서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오늘은 보고서 없이 그냥 제 의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 통일 화폐의 발행을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이 상태대로 북쪽의 경제를 더 방치하다가는 큰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북쪽지역의 장마당 어디에서도 이미 북한원화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경제만큼은 남쪽시스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북쪽사람들의 심리가 이 같은 현상을 만든 것 같습니다,
이제 더는 화폐개혁을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정부가 존속되는 십 년의 유예기간 동안 충분히 예상된 문제였습니다만 생각이상으로 시장이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민 대통령이 팔짱을 낀 채 소파 뒤로 등을 붙이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윤 비서관이 잘 봤어요,
우리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북쪽 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른 게 문젭니다,
윤 비서관의 지적대로 통일화폐를 발행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북쪽의 상황을 호전시킬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임시방편이겠지요,
국민들의 경제활동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과학적으로 작동하는 심리현상이에요,
이렇게 된다면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 될 거라고 봐요,
그래서 마지막 두 조각의 퍼즐을 혼란 없이 끼워 보려고 십 년의 유예기간을 두었던 것인데…”
지금 민 대통령은 윤 비서관이 우려하는 바로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체재를 떠받치던 그나마의 경제 시스템이 무너진다면 이제 남는 것은 군대뿐이다.
곧 무너질 나라의 군대는 오합지졸로 변하기 마련인데 핵을 보유한 군부가 혼란에 빠진다면 대고려연방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같은 대통령의 염려를 모르지 않았던 윤 비서관이 부릅뜬 눈으로 대통령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대통령님! 차라리 한반도실행계획의 단계를 높이는 것을 고려해야 될 것 같습니다,
위험이 두려워서 시간을 지체하기보다는 속전속결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는 것이 연착륙을 유도하는 방책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두 조각을 말이지요?”
“십 년의 유예기간에 얽매이다간 그동안의 통일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화폐의 종속 현상이 길어진다면 필연적으로 대고려연방의 통일정신이라 할 수 있는 상호존중과 배려 평등 같은 가치들이 훼손될 터인데 최악의 상황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나머지 두 조각중 우선 한 조각이라도 먼저 끼워 맞추어서 예상되는 혼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자는 말이지요?”
“네, 그것도 철저하게 상대의 자존심을 고려한 방식이어야 합니다!
다소간의 잡음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남북한 동률의 화폐교환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통일화폐가 남북화합의 진정한 상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며칠 후 민 대통령은 연방정부청사로 사용 중인 평화의 집에서 정 위원장을 만났다.
연방대통령이 합석한 이날의 최고위급 회담에서 민 대통령은 통일화폐의 발행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는 우리 연방 국민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금쯤 통일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위원장님과 연방대통령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단, 기존의 구권과 새로 발행될 통일화폐와의 교환가치는 남과 북이 동등하게 일대일로 한다는 전제입니다!”
최대한 북쪽을 배려하려는 민 대통령의 말에 연방대통령은 안도했지만 정 위원장은 머리만 끄덕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연방대통령이 정 위원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좀 이른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공평한 교환조건이라면 남북모두에 다 같이 이로울 것 같은데 위원장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갑자기 통일화폐 이야기가 등장하자 정 위원장으로서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다시 특유의 미소 띤 얼굴을 회복한 정 위원장이 두 대통령을 번갈아서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두 분 대통령님들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근자에 들어 우리 조선화폐가 여기저기서 외면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 문제로 적잖이 고민을 했더랬습니다,
경제만큼은 솔직히 우리가 남쪽에 비해서 초라한 것이 현실이다 보니 대책을 마련하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럴 때 민 대통령님께서 먼저 통일화폐 말씀을 해주시니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말하기가 좀 그랬는데 신구화폐의 교환조건에 대해서도 배려하여 주시겠다고 하니 우린 뭐 찬성입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정 위원장이 웃으면서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두 대통령도 함께 따라 웃으며 이 어려운 주제를 생각보다는 싱겁게 해결해 버렸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이미 내용적으로는 한국화폐가 북한화폐를 흡수해 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행하는 새로운 통일화폐의 발행은 시한부 생명의 북한정부로서도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조치가 되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대고려연방을 이끌어가는 3인의 회합체를 언론에서는 연방최고회의라는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연방법에 명시된 공식적인 회의기구는 아니었지만 이후 그 위상은 자연스럽게 대고려연방의 실질적인 최고회의로 부상되어 갔다.
그야말로 지구촌을 뒤흔들었던 격동의 2030년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반도가 그 중심에 있었다.
85년을 기다려온 대망의 통일위업도 달성했고 이제 이웃 일본정도는 미국이 감싸고만 돌지 않는다면 몇 번이고 주저앉힐 수 있는 넉넉한 국방력도 갖추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2030년의 마지막 태양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2031년 1월 1일을 기하여 연방정부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통일화폐가 전면적으로 통용되었다.
그동안 남북한의 중앙은행에서 발행되었던 구권과의 교환비율을 차등 없이 동등하게 교환하는 문제는 사실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남쪽사회 내부의 거센 비판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직 뚝심 하나로 민 대통령이 밀어붙인 결과였다.
심지어 야당에서는 차기 연방대통령을 염두에 둔 민 대통령의 정치적인 술책이라고 까지 몰아붙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되자 민 대통령은 연초 KBS로 생중계된 국민과의 대화시간을 이용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대고려연방은 경제 군사 문화 등 지금까지의 모든 차이를 극복함으로써 서서히 하나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남과 북에서 발행되었던 모든 구권은 일체의 차별 없이 신권과 동일한 가치로 교환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고려연방 민주공화국의 통일정신은 평등한 남과 북의 조화로운 공존으로서 우리 모두는 이제 똑같은 대고려연방의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대고려연방의 기치아래 마침내 한 식구가 되신 존경하고 사랑하는 팔천만 국민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내년 5월 9일까지인 저의 잔여 임기를 마친 이후엔 일체의 선출직에 나서지 않고 대고려연방의 평국민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정 위원장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남쪽의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에 실린 민 대통령에 대한 신랄한 비판 기사를 읽고 있었다.
옆자리에 서있던 정숙을 돌아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다.
“독도전쟁이 끝나고 대북특사 편에 편지를 보내왔을 때 내가 뭐라고 답장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당신을 믿어볼 테니까 내게 진심을 보여 달라고 했더랬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가 저이한테 낚였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정말 사심 하나 없이 민족통일의 여정을 투벅투벅 걸어가면서 굳이 날 보고 같이 가자고 손을 이끄는데 내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었겠느냐 말이야!
너는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참여해야 될 사람이야,
민 대통령 같은 분을 보면서 배워 두는 게 좋을 거야!
얕은 수작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말이야, 사실은 우리 인민들도 다 알아,
진심은 언제나 인민들의 지지를 받는 법이니까!”
이것으로 악화일로에 놓여있던 북쪽 다섯 개 주의 경제에도 숨통을 틔울 수 있게 되었다.
85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자유시장과 계획경제라는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하던 각기 다른 독립된 국가들이었다.
주변 강대국들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두 독립국은 기어이 자신들의 힘으로 평화통일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기적을 만들 수 있었던 특단의 비밀병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같은 민족을 포용하려는 민족정신이었다.
자신들 집단의 이익과 손해보다는 같은 민족이기에 통 크게 양보할 수 있다는 민족정신이 한반도 통일의 진정한 원동력이 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대고려연방은 선진적인 어떤 롤모델이 있을 리 없었다.
오로지 대고려연방 특유의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화폐발행의 방식에서도 세계는 떡하니 놀란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연방정부의 통일화폐는 지폐나 동전이 아닌 전자화폐로만 발행하여 통용되었다.
이것은 달러나 유로화 엔화 인민폐에 대응하는 국제적인 결재수단으로써의 위상까지 고려한 대고려연방의 야심 찬 조치였다.
전자화폐를 시범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화폐와 병행해서 사용하는 보조적인 통용수단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에 대고려연방은 세계 최초로 전면적인 전자화폐의 사용을 시작함으로써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빅3 경제권에 진입하고자 하는 야심 찬 결의가 엿보였다.
통일화폐의 발행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북쪽 다섯 개 주의 경제에 숨통이 트이자 이 틈을 이용하여 정 위원장은 그동안 내밀하게 준비해 왔던 특단의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어차피 대고려연방의 탄생으로 북쪽 지역의 계획경제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 경쟁구조에 취약한 북쪽의 인민들이 향후 치열한 경쟁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필요했다.
이것을 위한 선제적인 조치가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모든 집단농장과 국영기업을 소속 구성원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가히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것은 정 위원장이 아니고선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집단농장은 몇몇의 가족 단위를 묶어서 책임 생산하는 소규모의 가족경영들이 이미 정착되어 있었다.
가족단위로 구분하여 경작하던 해당 토지를 그 구성원들에게 지분등기의 형식으로 농장의 소유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집단농장의 향후 운명을 구성원들의 자율에 맡겨서 그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지만 북쪽 다섯 개 주에서 해산을 결의한 집단농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 영농조합의 형태로 전환하여 집단농장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변화된 세상에 적응해 보려고 몸부림쳤다.
반면에 국영기업들은 모든 소속원들에게 공정하게 주식을 배분하여 그 직원들이 주인이 되는 종업원지주사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처럼 국가의 보호 속에 있던 국영기업들이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엄혹한 경쟁세상에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국가로부터 배정받아 거주하던 주택도 자신들의 사유재산으로 등재되기 시작하여 적어도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무주택자가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그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었지만 온실이 벗겨진 겨울한파의 위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사람 정 위원장의 결단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하더라도 탄탄한 권력기반을 소유한 그 자신의 왕국이었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양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스스로 내려놓았다.
인민들의 요구도 없었고 연방의 강요도 없었지만 자신의 왕국을 지탱하던 경제적인 기반들을 자신의 인민들에게 아낌없이 되돌려주었다.
절대 권력을 지닌 왕국의 주인이 그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인류역사를 통틀어서 그 자신의 결단만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자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선제적으로 결단을 단행하면서 이후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정 위원장에 대한 애잔한 마음들이 더욱 확산되었다.
남과 북이 통일되자 신년 해돋이의 명소들이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명소는 단연 백두산의 최정상 장군봉이었다.
해돋이의 인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장군봉에는 역전의 미니탐험대원들도 끼어있었다.
통일화폐의 발행으로 어수선하던 신정 때는 경황이 없었지만 구정 연휴를 맞이하여 모처럼만에 그들의 방식대로 다시 만났다.
두툼한 겨울등산잠바의 오른쪽 주머니 안에서 경은의 왼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규태가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거들 결혼은 언제나 할 거냐? 올해 안에는 해야지?”
경은과 달리 자신의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있던 진숙이 빙긋이 웃으며 상윤을 바라봤다.
“급할 게 뭐가 있네? 난 아직 프러포즈가 뭔지도 모르는데!
너네들 시집장가 다 보내주고 아주 천천히 한번 생각이나 해 보지 뭐!”
이때 경은이 토란진 표정으로 상윤을 바라봤다.
“상윤 오빠 뭐예요! 아직도 프러포즈를 안 했단 말이에요?
그럼 잘됐네요! 지금 여기서 당장 하세요? 프러포즈!
진숙언니가 고무신 바꿔 신기 전에…”
싱글벙글 웃으면서 규태까지 거들고 나섰다.
“여기 정말 좋네, 프러포즈하기에 죽여주네!
퍼떡 분위기 잡고 한번 해봐라, 프러포즈!”
두 사람이 프러포즈를 하라고 재촉하자 상윤이 머쓱한 표정으로 왼쪽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상윤이 꺼내든 것은 작은 반지 케이스였다.
그렇잖아도 상윤은 규태의 조언으로 오늘을 위한 나름의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케이스를 열자 가느다란 금반지 하나가 광채를 뽐냈다.
잔뜩 감동 어린 눈빛으로 몸들 바를 몰라하던 진숙에게 상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숙동무! 내가 오늘 동무한테 끼워주고 싶어서 어제 평양백화점에서 큰맘 먹고 산 건데 말이야,
빛깔이 정말로 곱지 않네? 어떻게 내가 직접 끼워줄까?”
이 같은 엉성한 프러포즈에 규태는 뭐가 재밌는지 돌아서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지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돌변한 경은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 뭐야 이거! 언니 절대로 받아주면 안 돼요!
세상천지에 이런 밋밋한 프러포즈가 어디 있어요?”
규태가 상윤의 무릎을 가리키며 눈짓으로 힌트를 주고서야 상윤이 마지못해서 무릎을 꿇고 앉더니 사정하듯 말했다.
“내 죽을 때까지 오직 진숙동무만 사랑할 테니까 나랑 결혼하자우!”
앞뒤 다 잘라먹은 단도직입적인 프러포즈 멘트에 여전히 진숙의 반응이 없자 상윤이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평생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살 테니까 제발 결혼해 주시라요! 진숙동무!”
바로 이때였다. 백두산의 기운을 듬뿍 안은 새로운 태양이 힘차게 솟아올랐다.
진숙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일어난 상윤이 진숙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대고려연방에서 가장 높은 땅 백두산장군봉에서 거행된 이 날의 해돋이 프러포즈는 주변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해돋이 행사가 끝나자 네 사람은 자연스레 천지로 이동하여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세찬바람을 맞으며 백두산의 기운을 맘껏 흡입했다.
상윤이 하늘을 향해서 두 팔을 힘껏 뻗어 올리며 걱정되는 말투로 소리쳤다.
“통일화폐가 발행됐다고 맘 놨다간 낭패가 될 수도 있어!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고 가열차게 밀어붙여야 돼!”
규태도 큰 소리로 소리쳤다.
세찬 바람이 불어 칠 땐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해봐?”
상윤은 규태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일행들을 다음 코스인 백두산정계비로 인솔해 갔다.
천지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소리 때문에 차분한 대화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정계비 주변도 넘쳐나는 인파들로 붐볐다.
남북대학생탐험대에 의해서 6.4미터의 거대한 백두산정개비가 설치된 이후 백두산을 찾는 이들의 필수 답사 코스가 되었다.
이제 중국 땅을 밟지 않고서도 백두산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자 남쪽사람들은 오히려 금강산이나 백두산을 더 많이 찾았다.
오늘도 인파의 칠할 이상은 남쪽 여섯 개 주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고 한결같이 뿌듯한 표정으로 통일을 실감했다.
산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백두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를 경은과 진숙이 발견하고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찬바람을 막아주는 양지바른 언덕배기였는데 자세히 보니 이곳은 낯익은 장소였다.
작년 이맘때 백두산부대가 자신들을 구출해 주었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면서 벌러덩 더러 누웠던 바로 그 장소였다.
새록새록 긴박했던 당시의 기억들이 피어나자 모두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감사하고 싶어졌다.
경은이 등산 가방을 열어젖히자 먹을거리가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다.
온갖 종류의 비스킷들이 가지런히 펼쳐졌고 보온 물통에서 따른 따끈따끈한 아메리카노 커피가 잔들에 채워졌다.
상윤이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 뒤 천지에서 하려던 이야기를 차분한 음성으로 풀어놓기 시작했다.
북한군부의 동향에 대한 최신 정보였는데 한마디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북한군의 청년장교로 근무 중인 상윤의 친구들 전언에 따르면 조만간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십 년의 유예기간을 거친다는 미명하에 남북군대의 통폐합조치를 계속 미루다간 대고려연방의 앞날은 한마디로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구정연휴를 마치자마자 규태는 드디어 인턴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삼일특공대의 정식 연구원으로 발령받았다.
이제 제법 마음의 여유를 회복한 규태는 팀 내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면서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다.
삼일특공대의 월례회의를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던 장 팀장을 규태가 따라나섰다.
규태와 함께 팀장실에 들어선 장 팀장은 원두커피 머신에서 내린 커피를 들고 응접 소파에 마주 앉았다.
“뭐! 북한군부와 관련된 중요 정보라고?”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규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방정부 안보실에서 5급 사무관으로 근무 중인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요,
인민군장교로 복무 중인 친구들이 많아서 최근 북한군의 동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징병제가 폐지된 이후 북한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서 한마디로 위태위태한 지경이라고 합니다,
사병은 충원이 안 되고 경제사정이 안 좋다 보니까 부사관이나 장교들의 급료조차도 제때 지급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칫 내부반란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되는 실정이라 하고,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친중국 성향의 일부 장성들이 저들 간에 패거리를 지어서 어울려 다니는 모양입니다,
저러다가 군벌집단으로 변질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청년장교들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장 팀장은 지금 규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대단히 어렵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십 년의 유예기간까지 두면서 뒤로 미뤄두었던 퍼즐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파열음의 전조증상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최후의 퍼즐로 남겨두었던 두 조각 가운데 그나마 통일화폐의 발행문제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 문제였다.
상존하는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봉합만 한채 마냥 방치한다는 것은 상처가 곪아 터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남겨두었던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마저도 끼워 넣어야 할 타이밍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 왠지 모를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사실 장 팀장은 진작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정책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남북의 군대가 별개로 상존하는 상황에서는 명분만 있다면 언제라도 또다시 갈라설 수 있다.
특히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늘 불만이 많았던 북한 군부의 일부 세력이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제3단계의 한반도실행계획을 마무리 짓기까지는 어쩌면 대고려연방의 깃발도 한낱 허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삼일특공대는 통일화폐가 발행되기 시작했음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아니하고 이 어려운 정책과제를 은밀히 수행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윤 비서관이 가지고 온 삼일특공대의 정례보고서를 벌써 세 번째 꼼꼼하게 정독하던 민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3월 중순의 청와대 경내는 지난겨울을 이겨낸 초록 새싹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면서 생명의 신비를 맘껏 자랑했다.
‘삼일팀은 이제 마지막 퍼즐을 끼워야 될 타이밍이 다가왔다고 했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렇다고 좌고우면 하면서 마냥 시간을 끌다가 자칫 정 위원장조차도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면…’
몇 차례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민 대통령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기다리던 최 실장이 들어왔다.
윤 비서관의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은 기무사와 국정원을 통해서 관련 정보의 사실여부를 파악하라고 지시했었다.
지금 국가안보실장은 두 기관에서 올라온 정보내용을 취합하여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대통령님의 우려가 맞았습니다,
이 상태대로 더 방치했다가는 통제가 불가능한 군벌집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양쪽군대의 통합작업을 당장이라도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 두 정보기관의 공통된 결론이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라서 자칫 어설프게 대응했다간 큰 혼란에 휩싸일 수가 있어요,
남북 각기 내부적으로 딴소리라도 난다면 크게 어려워집니다”
최 실장이 한걸음 더 앞으로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말하려고 했다.
“대통령님! 인민군대의 현재 사정을 정 위원장께서도 당연히 파악하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대통령님께서 정 위원장을 독대하셔서 조용히 담판을 지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죠,
연방대통령께도 말씀드리지 말고…”
“그렇습니다, 인민군대 내의 반통일 세력들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합니다!
자칫 실기한다면 엄청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대단히 위중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과 정 위원장 두 분께서 따로 만나신다면 주변의 관심을 끌 수도 있으니까 제 생각에는 직통전화로 협의하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대통령은 이내 결심이 섰다는 표정으로 최 실장을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최 실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 위원장의 집무실로 직통전화를 걸었을 때는 밤 열 시를 넘기고 있었다.
두 정상 간의 통화는 삼십 여분 동안 이어졌지만 의견충돌로 인한 큰 소리도 없었고 정 위원장 특유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정 위원장 본인도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대통령님의 우려를 털어낼 방안에 대하여 저도 시간을 가지고 심사숙고해 보겠습니다,
통일정부까지 세워진 마당에 제게 무슨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살펴보아야 할 몇 가지의 일들을 살펴본 후 결단을 내리갔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 연방에 위원장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 민족에겐 크나큰 다행이지요,
위원장님께는 늘 고맙고 미안하지만 말입니다,
오직 우리 연방의 내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계시는 위원장님의 결단을 후일의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다음순간 정 위원장의 침묵으로 일순간 정적이 이어지자 대통령은 호흡을 멈출 정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정 위원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대통령의 호흡은 다시 시작되었다.
“대통령님께서는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신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며칠 고민을 해본 후 답변을 드리갔습니다!”
오늘따라 무겁게만 느껴지던 직통전화기를 내려놓은 정 위원장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실 진즉부터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통치수단마저 내려놓는다면 정 위원장으로서는 그야말로 모든 걸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의당 보통의 왕국 주인이었다면 갈 때까지 갔으면 갔지 아직도 멀쩡한 자신의 왕국을 스스로 내려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 위원장인들 왜 회한이 없었을까 마는 이 시점에서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향한 항해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진실로 위대한 대고려연방을 갈망했기에 이제 마지막 남은 최후의 보호막마저 걷어 올리기 위한 장고에 들어갔다.
2031년 4월 9일,
임시 연방의회 의사당으로 사용 중인 자유의 집 앞마당에서는 독도대첩 2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2년 전 오늘은 괴물 ICBM에 탑재된 TNT 5000만 톤의 수소폭탄을 폭발시켜서 전 세계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바로 그날이다.
일본 상공을 유유히 날아서 홋카이도 동쪽 태평양의 어느 지점을 강타했을 때 일본열도는 그야말로 84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미국은 북미 간의 전면적인 핵전쟁을 벌일 만큼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 치욕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독도 앞을 가로막고 있던 미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일본영해로 철수하자 독도 점령을 목전에 둔 일본 자위대의 모든 전력도 덩달아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이것으로 사쿠라가 흩날릴 때 일본이 작정하고 일으켰던 독도전쟁은 마침내 종결되었고, 우리 민족의 막둥이 영토는 다시금 우리 민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방정부는 한반도 통일 후 처음으로 거행되는 독도대첩 2주기 기념식을 다분히 주변국들을 의식하면서 성대하게 치르고자 했다.
연방대통령의 축사에 이어서 정 위원장이 단상에 올랐을 때 확연히 달라진 그의 모습에서 모두는 놀랐다.
최근 한반도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던 정세의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 탓이었을까,
체중도 적당히 감량되어 확실히 사십 대 중반의 연륜에서 풍기는 중후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일본이 우리 땅 독도를 침범했을 때 팔천만 인민들은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영토를 지켜냈습니다!
이제 우리 대고려연방이 나아가고자 하는 앞길을 가로막을 장애물 따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고려연방은 광개토대왕 이래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 국력의 원천은 우리 연방이 보유한 세계최고 수준의 무력입니다,
그리고 그 무력은 북과 남의 용맹스러운 군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불멸의 진실입니다!
오늘 나는 독도대첩 2주기라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또 한 번 구국의 결단을 단행하고자 합니다!”
예정에 없던 정 위원장의 폭탄선언으로 장내는 물론이고 TV로 시청 중이던 팔천만 국민들을 잔뜩 긴장시켰다.
노련한 정 위원장은 자신의 말을 경청하던 장내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최대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정 위원장의 목소리 톤이 최대치로 높아지면서 마치 백두산호랑이가 포효하듯 우렁차게 말했다.
“오늘 이 시각부로 영웅적인 북과 남의 두 군대는 위대한 대고려연방의 군대로 통합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통합의 모든 실무절차를 오늘 중으로 종결지어서 명실 공히 대고려연방의 통합군대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동안 철통 같은 보안 속에서 민 대통령과 정 위원장 사이에서만 진행 돼온 남북 군대의 통합 문제는 어제저녁 연방최고회의에서 극적으로 합의되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마지막 한 조각을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상황인식을 세 사람이 공유했다.
결단의 몫은 온전히 정 위원장에게 있었다.
대고려연방의 출범과 함께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했던 북한군부는 시간이 갈수록 불만이 누적되어 갔다.
이러한 북한군부의 불만은 정 위원장이라는 독특한 권위에 의해서 억지로 눌려지고 있었을 뿐 마땅한 해결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는 법, 째깍째깍 다가오는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를 그도 듣고 있었지만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단과 동시에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유지돼 왔던 정 씨가의 왕국을 이제는 정말로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위원장은 끝내 고독한 결단을 단행했다.
아직 군부만큼은 정 위원장의 통제 하에 있었던 관계로 그 누구와 협의하는 절차도 없이 오직 그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결단을 내리기 전, 정 위원장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잠들어 있던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하여 자신의 결정을 보고하는 요식행위까지 갖추었다.
금수산태양궁전에서 돌아온 정 위원장은 곧장 민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고 저녁 무렵 평화의 집에서 긴급 연방최고회의가 소집되었다.
연방최고회의에서 정 위원장이 제시했던 남북군대의 통합방식은 인민군대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답게 파격적인 방식이었다.
남북한의 군대를 통틀어서 별 두 개 이상의 장성들은 금일 자로 전원 퇴역조치하고 소대급 이하의 남북병력을 절반씩 섞어서 긴급 재편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이 조치는 정 위원장이 연단에 올라서는 순간 단행되기 시작하여 연설을 마쳤을 때는 명령서가 남북군대의 모든 예하 부대에 하달되어 있었다.
연설을 마친 정 위원장이 연단 아래로 내려오자 연방정부의 통합국방부장관이 깍듯이 거수경례를 한 후 정 위원장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군통합작전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북한군의 핵무기 통제 부대를 연방정부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다.
연방 국방부 직할의 특별보안부대 요원들이 핵무기를 통제하던 인민군 부대에 일시에 들이닥친 상황에서 정 위원장의 육성명령이 직접 하달되었다.
특별보안부대장이 건네는 휴대폰에는 정 위원장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드러나 있었고 핵무기 통제 부대장은 진땀을 흘리면서 거수경례를 했다.
정 위원장은 화상통화로 신분을 확인한 부대장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부대장! 지금부터 인민군대의 총원수로서 내가 내리는 명령을 이행하시오!”
“네! 총 원수님의 명령을 즉각 이행하갔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 공화국의 핵무력은 연방정부에서 직접 통제하게 될 것이오,
연방정부에서 파견 나온 요원들에게 부대를 개방하고 그들의 요구에 적극 협조하시오!”
정 위원장이 작성한 주요 부대의 숫자만 십여 군대가 넘었고 해당 부대장들에게 일일이 직접 화상통화로 명령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취했다.
피를 말리는 긴장 속에서 진행된 북핵통제부대의 연방정부 접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정 위원장은 특별보안부대가 임무를 완료할 때까지 통합국방부 청사에 마련된 영상모니터로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작전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었을 때 정 위원장의 이마와 깍지 끼워진 양손에는 흥건하게 땀방울이 맺혔다.
시종일관 정 위원장의 옆 자리를 지키면서 작전상황을 지휘하던 통합국방부 장관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자신의 손수건으로 스스럼없이 정 위원장의 이마를 닦아주려고 했다.
이때였다. 정 위원장의 바로 뒤에서 장산곶매의 눈으로 주변을 감시하던 곽 사령관이 장관의 손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정 위원장의 호위사령관으로서 당연한 그의 소임이었다.
정 위원장이 호방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장관이 내민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우리 곽 사령관은 말이야, 열이면 열 가지가 다 좋은데 매사에 융통성이 없는 것이 문제야!
이제 같은 편이 되었으니 친하게들 지내라우!”
곽 사령관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린 정 위원장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이며 손바닥을 닦은 후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장관! 이제 우리의 핵무력을 연방에 모두 넘겼으니 앞으로 무탈하게 잘 관리하시오!
아 그리고 이 손수건은 내 깨끗이 빨아서 이후 만나게 되면 다시 돌려 드리겠소”
“고맙습니다 위원장님! 위원장님의 결단으로 이제야 온전한 통일이 완성되었습니다,
위원장님께서 안전하게 넘겨주신 핵무력은 앞으로도 대고려연방의 안위를 지키는 특등 수호신으로 그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장관의 말이 끝나자 통합국방부 청사에 모여 있던 모든 문무관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장관과 함께 거수경례를 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바로 정 위원장이었고 저 만치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연방대통령과 민 대통령도 박수를 치면서 정 위원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한 곽 사령관의 눈가에서는 촉촉한 눈물이 맺혔다.
핵무기통제부대의 연방 이관 작전이 완료되자 소대급 이하의 남북병력을 강제로 혼합시키는 남북군대의 통합작업도 속속 작전완료 보고가 올라왔다.
자정이 임박한 시각, 드디어 남북군대의 물리적 통합작전이 완료되었다는 최종보고가 올라왔다.
짧은 시간 다소 무리하게 남북의 양 병력을 혼합하는 과정에서 열혈 청년들 간에 있을 수 있는 소소한 충돌들은 더러 있었지만 이렇다 할 큰 충돌 없이 모든 작전이 완료되었다.
독도대첩 2주기 기념식장에서 정 위원장은 오늘 중으로 남북군대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질 것임을 선언했었다.
자정 임박 5분 전에야 최종 보고가 올라왔고 연방정부청사 2층의 비좁은 통합국방부에서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자로 통합국방부의 제1,2 차관으로 임명된 북한의 국방상과 남한의 국방부장관은 통합국방부 장관의 좌우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환호성에 답했다.
그 맞은편에는 연방대통령을 중심으로 정 위원장과 민 대통령이 좌우에 선채 환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다.
잠시 후 통합국방부장관의 구령에 맞추어서 모든 문무관들이 3인의 연방최고회의 수장들에게 남북군대의 통합작전이 완료되었음을 보고한 후 절도 있는 동작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핵무기 통제 부대를 이렇듯 신속하게 연방정부의 통제 하에 접수한다는 것과 남북의 양 군대를 물리적으로 반반씩 섞는다는 발상은 정 위원장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렇듯 정 위원장은 마지막까지 대고려연방의 안착을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자 했다.
십 년에 걸쳐서 완만하게 진행하려던 대고려연방의 완전한 통합작업이었지만 채 일 년 만에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마저 그 일정을 대폭 앞당겨서 맞추어버렸다.
이 시기 통일의 주역들이 참고할만한 그 어떤 롤모델도 없었던 것은 어느 한쪽의 치우침도 없이 오롯이 평화적으로 달성한 동등한 통일 작업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각기 서로 다른 두 체제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문제에 있어 이론과 실전의 차이는 실제로도 엄청났다.
실무에서는 한번 트여버린 통일의 물꼬를 인력으로 조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통일과정에서 불어나버린 물길을 조정하고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도도한 물길에 몸을 내맡기고 함께 떠내려가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연방화폐의 등장은 북한사회를 변화시키는 큰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기존의 북한 구권과 동등한 가치로 화폐교환이 이루어지자 북쪽 다섯 개 주의 경제는 일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이즈음 시장경제의 참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번 맛 들인 시장경제의 중독성은 이제 통일이전의 시스템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회현상으로 나타났다.
연방군대로의 통합작업이 대체적으로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구 북한군의 위상변화 덕분이다.
연방군대의 근무조건과 복지는 구 남한 군대의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에 기존의 북한군대에 비해서는 월등하게 상향된 조건이었다.
징병제가 폐지된 군대는 이미 그들의 평생직장이었으므로 복지시스템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남쪽에 비해서 청년실업률이 비교적 높았던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부사관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연방군대에 자원하려는 청년들이 많았다.
이렇게 되자 남북의 군대를 반반씩 혼합하는 물리적인 무리수를 두었음에도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일이십 대 청년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던 대고려연방주의에서는 남과 북을 구분하려는 편협주의를 꼰대라고 조롱하면서 경멸하기 시작했다.
남과 북의 구분보다는 세계 3대 강국을 목표로 하는 선민의식이 자리를 잡았고 지역 간 갈등보다는 오히려 세대 간의 갈등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급군인들의 사정이었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어느 날 갑자기 연방군대로 재편되면서 강제로 예편된 장성들의 수가 남북을 통틀어서 무려 수백이 넘었다.
그중에서도 북한군의 퇴역장성들은 이런 사태가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한때는 선군정치의 최선봉에 섰던 자신들이었지만 통일의 결과물로서 군대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할 줄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자신들을 통일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불만은 점차 연방정부로 향했다.
이럴 때 자신들이 직접 나서 북한군부의 재건에 성공한다면 통일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점차 확산되고 있었던 독버섯의 진원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친 중국 성향의 퇴역 군부세력이 도맡았다.
작년 7월 역사적인 대고려연방의 통일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화합차원에서 대폭적인 사면 조치가 이루어졌고 그 틈에는 박철 일당도 끼어 있었다.
박철 일당이 배양한 독버섯들은 사십여 년 전 독일의 통일과 함께 해산됐던 동독군대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그렇잖아도 불안감을 느끼던 군부 인사들의 마음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십 년의 유예기간이 끝나는 대로 인민군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유언비어의 효력은 북한군부의 기강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정 위원장은 아직 자신의 권위가 살아있던 적절한 시기에 놀랍고도 대담한 방식으로 정면 대응했다.
기습적인 군통폐합조치로 불시에 일격을 당한 독버섯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해보고 곧장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이런 전격적인 방식으로 남북의 군대가 통합될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이 받은 충격과 허탈감은 곧 극도의 분노로 변해갔다.
점차 연방정부에 반기를 드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대고려연방의 통합을 위협하는 반연방 적대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래도 구 남한지역은 진보와 보수로 나뉜 두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오랜 관행처럼 굳어져 있어 대체로 관리가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
이에 반해서 북쪽 다섯 개 주는 오랜 세월 3대에 걸친 단일지도체제에 적응되어 있었던 관계로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들이 구 남한지역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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