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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Sep 10. 2024

아버지의 벽

12회

오래된 상가들을 이리저리 돌아서 마침내 최 씨가 운영하는 부동산중개소에 도착했다.

은하의 아버지 배 교수는 거기에 딸린 방 하나를 수리해서 ‘연변 조선인 향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삐거덕~ 소리가 길게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은하를 따라 들어간 사무실은 담배연기가 자욱한  평 남짓한 부동산 사무실이다.


이때 60대 초반의 중년 남자들 세 명이 장기를 두다 말고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아저씨들, 안녕하십니까?”      

은하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목례로 인사하자 다들 반갑게 은하를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헌칠한 키에 비쩍 마른 체격에다 콧수염까지 길러서 더욱 촌스럽게 보이는 사내일어나면서 은하를 반겼다.      

   

“야, 반갑다야. 우리 은하 한 2년 만이지? 그새 더 예뻐졌네. 북경물이 좋기는 좋은가보다야.”      

“최 씨 아저씨, 건강하신 모습 뵈니까 무척 반갑습니다.”      

“이제 아주 내려온 거지? 근데 같이 오신 이 신사 분은 누구신가? 우리 은하 애인이신가?”      

바로 이 사람이 조금 전 은하로부터 들었던 최 씨라는 사람임을 느낌으로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얼굴 어디에서도 자신의 딸로 인한 어두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저씨의 실없는 농담 때문에 얼굴이 다 빨개집니다.

예, 아저씨 보고 싶어서 아주 내려왔습니다. 참, 선생님. 인사하십시오.

여기 계시는 최 씨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 친구 분이시고, 이쪽 두 분은 우리 동네에 사시는 이웃 아저씨들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윤준노라 합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다들 내 얼굴을 한 번 더 유심히 들여다봤지만 그다지 반가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저씨,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아마 자고 있을 거야.

요즘은 몸이 예전 같지 않은지 소주 몇 잔만 마셔도 몸을 못 가누니 쯪쯪!

한 보름쯤 됐을 거야.

한 달 전에 있었던 분기토론회 건을 따지겠다며 창우가 다녀간 뒤부터 평소 안 하던 낮술을 한두 잔씩 하더니만,

요사인 거의 매일 거르지도 않네.

둘이서 다퉜다더니만 속이 많이 상하는 모양이야.

이제 우리 은하가 왔으니 몸 좀 챙겨드리라고. 저렇게 술을 못 이겨서야, 원!”      


최 씨의 안내로 좁은 통로를 지나 사무실 안쪽에 붙어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술과 담배에 찌든 쾌쾌한 냄새가 방 안으로부터 확 풍겨 나왔다.

그러나 방안만큼은 가지런히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서너 평 남짓한 작은 방에는 낡은 장롱하나에 제법 큰 앉은뱅이 나무책상이 놓여 있다.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운 서가에는 중국의 새로 나온 역사교과서며 고구려 발해와 관련된 각종 연구발표 논문들과 관광안내 책자들이 종류별로 빼곡히 정돈돼 있었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벽에 걸려있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동북삼성이 잘 나타나있는 대형지도였다.

백두산을 따라 토문강 송화강 흑룡강까지 붉은색으로 선을 그어놓았는데 그것은 동간도지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선 안에 파란색 붓글씨로 고토회복(故土回復) 지역이라고 적어 놓았다.     

한눈에도 배 교수란 분이 예사로운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봐, 배 교수. 일어나 봐. 은하가 왔어.”      

은하 아버지는 온기도 없는 방바닥에 이불 한 짝만을 깔고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최 씨가 옆구리를 여러 차례 흔들어 깨우부스스 일어나더니 자리에 앉았다.

며칠 동안 깍지 않은 수염에다 술에 찌든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부릅뜬 황소의 눈처럼 힘이 넘쳤다.      

   

“자 그럼 대화들 나누라고.”      

최 씨가 방을 나가자 비좁던 방안이 다소 넓어 보였다.

은하 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두툼한 두께의 오래된 검정색 뿔테안경을 쓰고서야 나를 알아보았다.

은하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세요.”      

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윤준노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그는 뿔테안경을 왼손으로 들어 올리며 그 큰 눈동자로 노려보듯 쏘아보았다.      

“그렇게들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요, 너도 앉거라.”      

   

은하가 장롱에서 방석 하나를 내어와 나에게 권했다.

난 방석 위에 앉았으나 은하는 맨바닥상태 그대로 반 무릎을 한 채 내 옆자리에 앉았다.      

“윤 선생이라? 그래 우리 은하와는 어떤 관계이신지?”      

딸과 함께 온 낯선 남자에게 던지는 당연한 첫 질문이었지만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를 몰라 당황했다.

은하가 대신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한동안 그렇게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윤 선생님은 한국에서 오셨어요. 동북아역사재단이라고 한국정부 산하 기관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공무가 있어 연길에 오셨는데 아버지를 만나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배 교수는 은하로부터 나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말을 들은 후,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다 말고 물끄러미 날 다시 쳐다봤다.

담배를 피우겠느냐는 눈치였다.

정말 담배 한 대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난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은하야 거기 창문 좀 열어라.

환기를 시켜야겠다. 방이 좁아서 환기가 잘 안 돼.”      

은하가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방안의 쾌쾌한 냄새가 삽시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녹차를 준비하러 은하가 부엌으로 간 사이였다.

은하아버지가 큰 성냥갑에서 꺼낸 성냥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천장을 향해서 길게 연기를 내어 뿜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라…. 거기서 일하시는 연구원이시다….

그건 그렇고 한국에서 중요한 공무 차 오신 분이 바쁘실 텐데,

하릴없이 지내는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오셨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 민족의 올바른 대응책에 대하여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습니다.” 


내가 은하아버지의 질문에 답하는 사이, 은하가 다시 들어와 소복이 쌓인 재떨이를 휴지통에 비우고는 책상 위며 주변을 물걸레로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준비된 자그마한 찻상을 가져와 방 한가운데에 놓았다.

그제야 방안이 뭔가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은하가 따르는 차의 향기가 방안 가득히 퍼지자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던 내 마음도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은하아버지의 권유로 마신 차 맛은 북경에서 자주 마셔서 익숙한 중국차와는 확실히 그 맛의 차원이 달랐다.  


“어떻소? 백두산 자락에서 자라는 야생차요. 올봄에 내가 직접 따왔지.

시중에서 파는 중국차와는 맛의 깊이가 근원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그렇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우리 은하와는 어떻게 만났소?

윤 선생의 연배를 보아하니 결혼은 하신 것 같은데…”      

자신이 진짜로 묻고 싶은 궁금증을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는 태도다.

은하가 나에 대해서 설명했던 요식적인 설명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 간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아버지로서의 보호본능이었다.


배 교수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작년 이맘때까지 북경대 국제관계대학원에서 교환연구원으로 1년간 공부하고 있을 때 알게 됐습니다.

제 나이는 우리 나이로 마흔둘입니다만 부끄럽게도 아직 미혼입니다.”      

“아버지 제가 말씀드릴게요.”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은하가 대신 끼어들어 설명하려고 했으나 배 교수는 엄한 표정으로 제지했다.

나로부터 직접 들어서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할 참이다.      

   

“은하는 가만있거라. 윤 선생한테 묻고 있지 않느냐.

선생, 과년한 딸아이를 일가친척 하나 없는 생면부지의 북경에 보내놓고 아비로서 어디 마음 편할 날이 있었겠소?

사실 한국관광객을 상대하는 관광가이드라는 직업이 좋게만 볼 수가 없지요.

오늘 또 이렇게 느닷없이 선생을 모시고 나타나니 내 솔직히 당황스럽소.

그러니 아비로서 궁금한 점이 어디 한둘이겠소? “     


은하로부터 한국 남자들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우리 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파헤치려는 그의 추궁에 나는 진땀을 흘렸다.

배 교수는 그의 황소 같은 큰 눈동자를 드러내며 서슬이 퍼럴 만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윤 선생한테 이런 말하기가 좀 그렇소만,

여기 연변에서는 한국에서 성공한 총각이네 홀아비네 하면서 순진한 처녀들을 망쳐놓고 도망가는 작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소.

실정이 그렇다 보니 액면 그대로 윤 선생을 대하지 못하는 내 심정을 이해하여 주기 바라오.”      


사실, 한국과 중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한 십여 년 전부터 연변지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곳 동포들을 농락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사기 사건들이 많았다 한다.

지금 그의 표정에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응어리진 한국인들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나 역시도 그 경계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좌불안석의 표정으로 앉아있던 내가 안 돼 보였던지 은하가 아버지의 경계심을 다소라도 풀어보려고 다시 나섰다.      

“아버지, 윤 선생님은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분 들하고는 다르십니다.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교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시인이시고요.”      


이 말을 들은 배 교수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흥미롭다는 듯 하는 말이다.      

“교수시라고요? 전공이 한국사시고?”      

아버지의 지독한 편견을 조금이라도 허물어 보기 위하여 은하는 내가 배 교수와 같은 지식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있었으므로 내가 나서서 교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쑥스럽습니다만 모교에서 시간강사를 잠시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시를 쓰는 사람도 아니고 가끔씩 습작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의 역사왜곡을 전담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 2실에 소속돼 있습니다.”      


나로부터 직접 나의 정확한 신분을 확인한 배 교수는 다소나마 경계심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거워 보이는 뿔테안경을 벗어 앉은뱅이 나무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수 녹차 한잔씩을 따라주었다.

또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창문을 응시하며 말했다.      

“순전히 공무 차 날 찾아온 손님한테 내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윤 선생, 용서하시오.”      

   

그의 표정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공무차라는 말로 오늘 만남의 선을 분명하게 긋고 있었다,

그의 말속에서 내 신분과는 관계없이 한국 남자인 이상 자신의 딸과는 엮이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선생이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원이시라 하니 하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하는 일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오.

북한이야 중국이 생명줄을 딱 틀어쥐고 있으니 가타부타 말할 처지가 못 된다지만, 한국에서는 대체 동북공정에 대한 국가적인 의지가 있기나 한 거요?”      


어쨌든 화제가 바뀌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방금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시비에 가까웠다.

녹차 한 모금을 더 마신 후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천천히 대꾸하기 시작했다.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산하의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한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중국의 역사교과서들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면서 노려봤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기 있는 고구려 발해 관련 역사서와 관광안내 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것들이 최근에 새로 발행된 중국아이들을 가르치는 역사교과서예요.”      

   

이미 여러 차례 꼼꼼하게 읽어본 후 문제의 내용들을 일일이 형광펜으로 표시해 두었던 모양이다.

해당 페이지들을 손쉽게 찾은 배 교수는 직접 손으로 그곳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확인시켰다.       

“이것 봐요! 지금 고구려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에요.

아예 통째로 우리 고대사를 송두리째 왜곡하고 있어요.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발해를 독자적인 나라가 아닌 당나라의 일개 군으로 규정하면서 발해건국을 주도한 세력은 말갈족이고 발해초기의 정식국호도 말갈이었다고 날조하고 있단 말이오.”     


그는 다시 앞으로 몇 장을 더 넘기더니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해 둔 부분을 손가락으로 힘을 주어 가리키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내게 따지겠다는 표정이다.       

“여기를 봐요, 심지어는 고조선도 주나라의 무왕이 보낸 은나라의 유민 기자가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마저 중국의 역사라고 버젓이 날조 해났어요,      

교육현장에서는 이렇게 엉터리 역사서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한국에서는…”      

   

여기까지를 말한 후 그는 재떨이에서 하염없이 타고 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천장을 향해서 연기를 길게 쏘아 올리더니 마치 비웃듯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요, 우다웨이 외교부부장이 한국으로 날아가서 역사교과서에 고구려사를 왜곡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요?

그것도 문서가 아닌 말로써만 해준 약속 하나만 달랑 믿고 이제는 다 해결됐다는 듯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이 금의 한국정부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고도 한국정부의 의지가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어찌나 흥분하면서 고함을 쳐 대던지 그의 침이 내 얼굴에까지 튀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침을 닦을 수도 없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은하가 무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얼굴을 숙였다.

나는 이 짧은 만남만으로도 배 교수의 성격을 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보시오! 개편된 역사교과서에서 고구려사를 아예 통째로 빼버렸어요.

세계사에서 고구려사를 완전히 지워버렸단 말입니다.  

윤 선생, 어디 한번 말해보세요.”      

더 이상의 논쟁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배 교수의 주장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배 교수의 항의에 나로서는 딱히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집요한 공격은 계속됐다.      

“이것 보세요. 고구려사는 통째로 빼버린 대신 고조선과 발해는 중국사라고 하면서 아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발해사만큼은 한국에서도 그동안 소홀히 다루어왔던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북한에서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역사로 지켜왔기 때문에 그나마의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이지만 말입니다.”     


배 교수의 이 말은 사실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언젠가 서 교수님께서도 오늘날 우리 학계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로 반도사관을 지적하셨다.

일제강점기,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주입된 식민사관의 하나로 자리 잡았던 것이 반도사관이다.      

간도를 중심으로 광활한 대륙에서 태동했던 우리 민족의 웅대한 북방역사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이것은 소홀히 다룬 채, 우리 민족의 사관을 반도 내로 협소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특히 발해에 대해서는 한국사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조차 편향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치부해 버리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서 교수님께서는 늘 강조하셨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는 협소한 반도가 아닌 광활한 대륙중심의 역사임을 항상 명심하라고!


배 교수의 열변을 듣고 있자니 그가 왜 이렇게까지 흥분하며 열변을 토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난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이제 교수의 질책끝이 났고 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부끄럽습니다만 이제부터라도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자료수집 목적으로 제가 여기에 온 것도 우리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시겠지만 앞으로 지켜봐 주시고, 많은 지도편달을 바라겠습니다.”     


한동안 창문을 열어 두었더니 방안 가득히 찬 기운이 들어와 제법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마침 은하가 일어나서 창문을 닫고 앉았다.

얼마나 열변을 토했던지, 배 교수의 얼굴은 입술 양 옆에 고인 허연 침으로 인하여 더욱 보기가 안쓰러웠다.

간혹 톤을 높일 때는 목청에서 빽빽~ 소리까지 났는데 그 열정 하나만큼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배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다시 조금 열더니 또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즉시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자 그는 훨씬 누그러진 태도로 변했다.        

“윤선생, 나도 나이를 먹다 보니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선생의 첫인상이 신의도 있고 인품도 웬만한 것 같으니 선생이 여기 계시는 동안 학술적인 교류나 하면서 지내도록 합시다.     

사실은 나도 몇 년 전까진 연변대학에 있었소.

나도 윤선생과 같이 사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뭐 향토연구소네 하면서 내 잘난 맛에 살고 있소만."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의 연구과제도 동북공정이 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미치는 영향분석입니다.

교수님의 연구 성과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바랍니다.”      

이제 그만 일어서려는데 잠시 앉으라고 하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은하에게 담배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눈치도 없이 재빨리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그에게 권했지만 저 타르의 한국산 담배는 싱거워서 못 피운다며 굳이 은하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은하가 없는 사이 나에게 긴히 하고픈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은하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내 눈빛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소곤거리듯 말문을 열었다.     

“난 우리 은하의 눈빛만 봐도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지요.

은하는 내 앞에선 거짓말을 못합니다.

아이 엄마가 너무 일찍 세상을 버리는 바람에 내손으로 똥 기저귀 갈아주며 키운 아이요.

딸아이의 아비로서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런 말하기가 쉽지는 않소만, 선생을 바라보는 우리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염치 불고하고 하는 말이오만, 선생! 우리 은하와는 대체 어떤 사이요? 솔직히 말해주면 고맙겠소.”      

   

이 중요한 순간에 난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바보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방바닥만 쳐다봤다.

“내 짐작이 맞는군.

선생, 이 사람의 말을 선생이 어떻게 생각해도 좋소만, 내 진정으로 부탁하오. 선생이 마음을 돌려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불행해져요. 선생과 우리 아이는 격이 맞지가 않아요.

우리 아이는 어린 나이에 적잖이 정에 굶주렸겠지만 그래도 참 맑게 자라줘서 나로선 여간 고맙지가 않아요.  

넓은 세상은 우리 아이에게는 맞지가 않아요, 상처받기 딱 좋은 곳이란 말이오.

그래서 북경에 있는 아이를 무작정 내려오라 했지.

우리 은하만큼은 가슴에 상처받는 일없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아비로서의 바람이니 선생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 바라오.”      

   

이렇게까지 말하는 동안에도 난 아무 말도 못 한 채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배 교수는 녹차 한 모금을 더 마시더니 나못지않은 풀 죽은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윤 선생 본인은 우리 은하에 대한 감정이 그렇지도 않은데, 내가 너무 앞서나갔다면 선생한테 내가 큰 실례를 범했소만…”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완곡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말은 은하와의 관계에 더 이상의 진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은하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내가 가졌던 벽,

이제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던 그 벽이 또다시 우리들 앞에 떡하니 버티고 다.      

배 교수가 말하는 격이 맞지 않다는 표현 속에 담긴 그 격차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열네 살 차이라는 나이를 염두에 둔 말일까?

아니면 연변처녀와 한국남자라는 결코 조화롭게 동화될 것 같지 않은 인식의 차이를 염두에 둔 말일까,      

은하와 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엄청난 벽은 결코 쉬이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참으로 험난한 벽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배 교수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 은하와 함께 딱히 정해둔 목적지도 없이 거리를 걷고 있다.      

가로수가 잘 정돈된 거리는 고풍스러운 주변의 경치도 볼만해서 은하와 걷는 데이트코스로는 아주 훌륭했다.  

그러자 여기가 중국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 읍내 같은 친숙한 옛 고향에 와있는 기분이다.      


우린 오래된 연인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정해둔 목적지도 없이 시내를 향해 다시 길을 걸었다.

바람이 한바탕 불어오자 낙엽들이 바람을 따라서 몰려간다.

그중 하나가 은하의 머리 위에 앙증맞게 내려앉았다.

은하의 머리에서 떼어낸 잎사귀는 아직은 낙엽이라기보다는 노란색으로 물들다 만 설익은 낙엽이었다.

아마도 친구들을 따라서 엉겁결에 나무에서 내려온 모양이다.      

   

그것을 살짝 떼어내 은하에게 주었더니 마치 소녀처럼 냄새도 맡아보고 입에도 물어보면서 신기한 표정이다.

하는 모양새가 꼭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마냥 귀엽기가 그지없다.      

이때, 은하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대화내용으로 보아서는 그녀의 오빠인 듯하다.

오빠가 우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으니 연길시내에 있는 극장식 식당 해당화에서 만나자고 했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 해졌을 때, 우린 약속시간에 맞추어 북한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아가씨들이 식당 앞에서부터 우리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아담한 분위기의 작은 무대가 나타났다.

무대 위에서는 전자오르간과 기타를 연주하며 어여아가씨들이 노래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벌써부터 테이블의 절반이상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 무대 앞쪽의 원탁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있던 남자가 은하를 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 아는 체를 다.

배 교수보다는 다소 작아 보였지만 그 체격이 단단해서 야무진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양새로 보아서는 여기 연변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나를 바라보면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시오? 나 은하 오라비 되는 배창우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오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윤준노라 합니다!”      

그는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손에 잔뜩 힘을 주고 내 손을 잡았다.


자리에 앉아 물 한 컵을 비우는 사이, 어느새 주문한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이기 시작한다.

잉어찜을 비롯한 해물요리와 산해진미들이 한 접시 한 접시 들어오자,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창우의 얼굴이 뿌듯한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조선식당은 어디를 가나 요리 맛은 일품인데 요리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집에서 최고로 맛난 음식으로 미리 주문을 했댔습니다.

윤 선생, 시장하실 터이니 일단 들면서 얘기합시다. 은하도 많이 들어?”      

   

과연 창우의 말대로 요리 맛은 일품이었다.

천연조미료로만 요리를 했다고 하는데 은은하게 우러나는 깊은 맛이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창우가 따라주는 북한 술은 상호가 백두산 들쭉술이라고 적혀있었다.

창우가 한껏 뽐내면서 거드름을 부려댔다.      

   

“선생, 이 술이 말이요.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정 위원장이 함께 건배했던 술인데, 북한에서는 최고로 치는 술이지요.”      

창우의 건배 제의로 한잔씩 들이켰을 때 은하는 술이 너무 독한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잠시 입가에 대는 표정만 짓고는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때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 홀에서 서빙하던 아가씨들도 공연에 합류하자 극장식당 안의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 다.

“윤 선생, 저 미모의 아가씨들이 북조선에서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선발된 엘리트 출신들이란 말입니다.

중국에 파견된 외화벌이 아가씨들이 이곳 연변 관광지마다 몇 군데 있는데 말입니다,

모두가 당성이 투철한 아가씨들이죠. 아무나 안 내보내지요. 그랬다간 큰일 나니까요.”      

   

은하로부터 연변조선족 자치주 대북 무역사업의 실무를 관장하는 과장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막상 그의 입을 통하여 북한의 실정을 듣게 되자 또 다른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북한의 내부사정에 정통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소식들이다.  


이번에는 그가 옆자리에 앉아있는 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은하 오랜만에 보는 사이 많이 예뻐졌구나.

너 바쁘다고 전번 추석 때도 못 내려왔었지?

나도 한 일주일 조선에 출장 갔다가 오늘 오후에야 왔댔어,

짐은 원래 쓰던 너 방에서 풀었지?,”       

“예 오빠, 앞으로도 오빠 아파트에서 계속 신세 좀 져야겠어요,”      

“신세라니!, 철이 공부나 좀 봐주고 그러면 우리야 좋지 뭐, 예전처럼 편히 지내자고,

몇 시간 전에 최 씨 아저씨가 사무실로 전화 안 해주었으면 우리 은하 온 지도 모를 뻔했더랬어.

아버지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 한번 들리라고 전화가 왔더라.

그때 네 얘기도 들었어. 윤 선생도 같이 와 있다고.”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은하는 오빠에 대한 섭섭함을 따지겠다는 듯 의자를 빠짝 당겨 앉았다.

은하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오빠, 인제 그만할 때도 됐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를 오빠가 좀 이해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난 아버지가 너무 측은해서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은하가 정색하며 따져 묻는 상황에서도 창우는  그저 가벼운 미소로 은하를 바라볼 뿐이다.


“그래그래, 우리 은하 마음은 이 오빠가 잘 알지. 이제 은하가 내려왔으니 아버지를 잘 모셔야지.

요즘 들어 웬 술을 그리도 드시는지 최 씨 아저씨가 걱정을 많이 하더라.”      

창우의 넉살 좋은 언변으로 자칫 딱딱할 뻔했던 분위기가 해소되었으나 은하는 오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나지만 오빠가 아버지 하고 잘 좀 지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와 다투지 말고 제발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이때 창우가 젓가락으로 잉어찜 살을 큼직하게 집었다. 

그것을 왼손바닥으로 받치며 은하의 입 가까이 가져갔지만 은하가 사양하자 자기 입으로 밀어 넣은 후 우직 우직 씹으면서 대답했다.     

“너도 왜 잘 알잖아. 난 아버지와는 도무지 사고방식이 맞지가 않아.

도대체 그놈의 동북공정이 뭔지, 그게 터진 후론 더 내속을 뒤집어 놓고 있단 말이야.”      

   

창우의 입에서 동북공정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는 그동안 보여 왔던 창우의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갑자기 날이 서기 시작했고 그 순간 나 역시도 경직되었다.      

부자지간 대립하고 있는 전후사정을 알 수 있는 상황이기도 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쩌면 나 역시도 당사자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연히 나의 신경도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도 좀 생각을 해주어야지 말이야,

아버지가 동북공정이니 간도땅 찾기 운동이니 하면서 연변 지식인들을 충동질하고 다니는 문제 때문에 지난달에는 내가 당으로부터 주의처분까지 받았단 말이야.      

향토연구소에서 주최하는 무슨 분기토론횐가 뭔가 때문에 한족 아이들하고 대판으로 패싸움이 나서는 온 연변사회가 시끄러웠단 말인지.

이거야 원! 자식 앞길을 가로막겠다고 작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나?”      

   

창우의 목소리는 자제력을 잃었는지 점차 흥분되었다.

그제야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은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창우도 동생의 쩔쩔매는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이내 냉정을 되찾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윤 선생, 미안합니다. 귀한 손님 앞에서 가정사문제로 큰 소리를 내고 말았소이다.

실례가 됐다면 용서해 주시오. 그나저나 올해 몇이나 자셨소?”      

“예, 금년에 우리 나이로 마흔둘입니다. 부끄럽게도 주책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이때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사람들이 모두 무대 앞으로 몰려나가 춤을 추는 통에 내 말을 못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다시 물어왔을 때 내가 마흔둘이라고 재차 이야기하자 의외라는 듯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나보다도 아래로 보았는데, 동안입니다 그려. 요즘 어리게 보인다는 말이 최고로 치는 칭찬이지 않습니까.

나보다 여섯이 위시구먼. 역사를 전공하시는 학자이시라면서요?”      

   

자신보다 아래로 보았다가 여섯 살이나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의 말투는 아랫사람을 대하듯 여전히 당당했다.      

“학자까지는 아니고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내 신분을 확인한 창우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자세히 훑어봤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 아버지 하고는 소통이 잘 되시겠구먼.

난 그딴 일에는 솔직히 말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옛날 고구려가 조선역사면 어떻고 또 중국역사면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길림성이 옛날에 고구려 땅이었으니 되돌려달라고 하면 중국이 돌려준답디까?      

난 그게 다 배부른 학자들이 떠드는 말장난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오.

아, 내 이 말은 취소하리다. 선생 앞에서 함부로 떠들고 말았소.

어쨌든 난 현실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지 케케묵은 옛날애긴 별로 취미가 없단 말입니다.”      

   

창우의 말이 어찌나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던지 내 신경을 적잖이 자극했다.

그렇잖아도 내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 안절부절못하던 은하로서는 나를 자극하는 오빠의 직설적인 표현에 더욱 초조한 기색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었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우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있는 것도 재단의 연구원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심을 하고서 그동안 참고 있었던 말을 토해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 뿌리인 고조선으로부터 자긍심이 높았던 고구려, 그리고 그 고구려를 계승했던 발해는 모두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킨 쪽은 오히려 중국입니다.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의 역사를 저들의 역사라고 우기면서 역사왜곡을 시작한 쪽은 바로 중국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맞이해서도 우리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사가 중국사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중국의 속국도 아닌 우리나라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간도 땅이 과거 우리 민족의 땅이었으니 지금 당장 이 땅을 모두 내어놓으라는 영토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킴으로써 우리 민족의 혼을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창우는 더 이상의 확전은 피하려는 듯 다시금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그 독한 40도짜리 들쭉술을 또다시 단번에 비웠다.

벌써 혼자서 한 병을 거의 다 마셔가고 있었다.

술에 취하여 기분이 좋아졌던지 창우의 표정은 좀 전보다는 많이 쾌활해졌다.      

“자, 이제 우리 딱딱한 동북공정 이야기는 나중에 우리 아버지 하고나 하기로 하고, 나와는 건설적인 이야기를 좀 합시다.

어쨌든 선생의 신분은 확실합니다 그렇죠? 그럼 됐습니다. 결혼은요?”      

   

그의 평소 성격이 이러했던지 창우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단도직입적인 대화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에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미혼입니다”      

“고매한 학자시니 공부하신다고 늦어질 수가 있지요.

아 요즘 마흔 넘은 노총각들 흔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기반은 잡았는데 결혼을 못했느냐, 아니면 기반을 못 잡아서 결혼을 못했느냐, 뭐 그런 것이 중요한 문제지 않겠습니까?”      

   

창우는 내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스타일대로 시원스럽게 말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대화의 핵심을 향해서 달려가는 중이다.

나 역시도 배 교수의 거대한 벽을 창우를 통해서 무너뜨릴 수도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의 말에 고분고분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윤 선생, 우리 은하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 뭐 여자로서 내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말입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은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창우는 안심이 된다는 듯, 나와 은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창우가 육포 안주를 씹으며 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은하야,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던? 반대 안 하시던?”      

그 대답은 사실 내가 해야 될 것 같았다.

배 교수로부터 ‘절대 교제불가’라는 엄중경고를 받은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말이다.


내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단번에 마신 후 또다시 창우에게 잔을 채워주고서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차마 은하 앞에서 배 교수가 했던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 때 창우는 짐작하겠다는 듯 일부러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은하야,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라.

주변에 한국 남자들에게 신세 망친 연변처녀들이 늘려있다 보니 걱정하시는 게 당연하지.

윤 선생!, 나도 다년간 대외무역사업을 하다 보니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안목은 있수다.

척 보면 알지. 윤 선생은 진품이요!, 내가 보증하지요.”      

   

창우는 그 말과 함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그의 말과 행동에서 우린 폭소를 터트렸다.

나에 대한 창우의 호감은 배 교수가 가지고 있는 편견의 벽을 넘어서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도 창우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왠지 모르게 오래된 묵은 사이처럼 어느 사이에 우린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런데 윤 선생, 동북공정이라는 거 말이오.

내가 당원이라서 주워들은 게 있었어하는 말이 오만, 선생말대로 그거 한가로운 역사논쟁이나 하자는 게 아닙니다.

중국에서는 민감한 정치문제란 말이외다. 선생이 이걸 좀 이해해 주신다면 뭐 서로 간에 얼굴 붉히며 지낼 필요까진 없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창우는 동북공정이라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정리를 다.

나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주는 대신, 그가 처해있는 입장을 고려하여 달라는 주문이다.

부자지간에 이 문제로 심각한 갈등상이 존재했던 것도 배 교수의 언행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불리한 상황 때문이다.

즉, 당으로부터 얼마 전에 받았다는 주의처분이 갈등의 주요 요인이었던 셈이다.      

   

창우의 거침없는 주장은 계속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당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열심히 역사책들을 뒤지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이 사업을 주도하는 건 공산당입니다.

윤 선생이 하는 일에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겠지만, 중국 당국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접근하는 게 쉽게 말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뜻입니다.

사실 내가 우리 아버지와 만났다 하면 다투는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인데 내 처지는 손톱만큼도 생각을 안 해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외다.”       


창우가 계산을 하고 있던 사이 은하와 난 식당 밖으로 나와 연변 하늘가를 빼곡히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윤동주 시인이 감탄했듯이 정말 초롱초롱한 색색의 별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에서 바라보는 밤하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래서 윤동주는 별을 헤아리면서 그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도 모르겠다.       

   

이때 지배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십여 명의 아가씨들이 떼로 몰려나와 창우를 극진히 배웅하고 들어갔다.

아마도 홀에서 서빙하는 아가씨들의 절반 이상은 뛰쳐나온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서 대북한 무역의 실무사업을 관장하는 창우의 영향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참, 윤 선생. 이번 주 토요일에 사업차 백두산에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가는 게 어떻겠소?

다음날이 일요일이니 1박 2일로 이참에 아버지도 모시고 함께 다녀옵시다.

우리 아버지는 백두산이라면 껌뻑 넘어가시는 분이시거든!

사람 간에는 자주 만나야 정이 드는 법이지 않습니까?”      

   

창우의 제안은 배 교수와 내 사이를 어떻게든 원만하게 풀어보려는 호의였고 나 또한 창우와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창우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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