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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Sep 06. 2024

목련꽃 배송작전

10회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서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2029년의 마지막 태양도 저물고 2030년의 새로운 태양이 동해 앞바다를 힘차게 솟아올랐다.

국정원의 곽 차장은 아침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스마트폰으로 걸려온 윤 비서관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답답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윤 비서관의 이 말에 곽 차장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잠시 뜸을 들이고서야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들도 조선족 자치주의 계엄령이 해제되기를 기다리는 실정입니다,

아직도 위중한 상황이라 현 단계에서 은하 씨를 이동시키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현지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섣부른 행동대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기왕에 기다려주었으니 우리를 믿고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죠!”


곽 차장은 최대한 성의 있게 말하려고 했지만 윤 비서관의 한숨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서 연거푸 전해지자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그런데 연길에 있는 우리 처남의 메일에 따르면 천지회뿐만 아니라 공안까지 나서서 우리 집사람 행방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공안까지 나선 것으로 봐서는 우리 집사람을 어떤 의도로 활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만!”


이 대목에서는 곽 차장의 입에서도 무의식적인 작은 한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사실은 우리도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은하 씨를 통해서 윤 비서관을 부각하게 되면 자연히 우리 정부가 드러날 테니까요,

대통령님 환송 행사 때 발생한 만세사건으로 중국이 큰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공안의 자체 집계로도 만 이상의 중국동포들이 가담한 걸로 확인이 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없던 것으로 그냥 넘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만세사건을 우리 정부의 기획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아닌지 우리로서도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순간 윤 비서관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널뛰면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은하를 연길로 보냈던 것은 만세사건을 염두에 둔 사전 조치였음은 사실이다.

이제 와서 이것을 사실대로 말하여 불필요한 논쟁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토록 위험한 일에 은하를 끌어들였다는 자책감으로 더욱 심란해졌다.

“계엄령이 언제나 끝날지도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제가 직접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집사람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냥 손을 놓고 있는 나 자신이 화가 나서 도통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윤 비서관의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국정원에 대한 원망의 말이었다.

이제는 자제력을 잃었던지 곽 차장의 무의식적인 한숨소리가 큰 소리로 새어 나왔다.

“휴∼ 알겠습니다,

제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라도 은하 씨만큼은 꼭 구출해 낼 테니까 우리를 믿고서 기다려주시죠,

다른 사람도 아닌 은하 씨를 구출하는 일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다 강구해 봐야겠지요,

윤 비서관한테는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만 우리 쪽 중국파트의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최선을 다해볼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곽 차장의 간곡한 말을 듣고서야 윤 비서관의 침울했던 목소리가 다소간 회복되었다.

“네 믿지요! 제가 곽 차장님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차장님께는 늘 제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도 차장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천근만근 무겁게 만 느껴지던 휴대폰을 내려놓은 곽 차장은 내심 걱정이 앞섰다.

며칠 전 선양총영사관에 파견 중인 정 과장의 보고서에서도 배은하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중국당국의 공작 조짐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계엄령하의 현지 상황이 워낙 엄중하여 지금 움직이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는 보고였다.

멍하니 오른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토닥거리던 곽 차장이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지 양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초저녁 대림동 중앙시장의 풍경은 길림성의 연길시장을 통째 옮겨놓은 듯 그 분위기가 판박이다.

시장 안쪽으로 난 좁은 통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가자 가게의 불빛들도 흐릿해지고 사람의 인적도 잦아드는 한적한 곳이 나타났다.

중앙시장의 전체로 보자면 통행량이 적어서 장사가 잘 안 되는 마이너리그 같은 곳이지만 그래도 장사하는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비교적 저렴한 임차료 때문이다.

주로 형편이 어려운 중국동포들이 중고 테이블 몇 개를 들여놓고는 작은 양꼬치구이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2부 리그들의 공통점인 듯 한결같이 흐릿한 불빛과 칙칙한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모퉁이 코너 방면에 자리 잡은 작은 양꼬치구이집,

경태와 기수가 작업복차림 그대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붉은색 페인트로 볼품없이 써진 ‘길림성 꼬치구이’라는 입간판이 그렇잖아도 휑한 분위기를 더욱 보태는 꼴이다.


두 사람은 오늘 건축공사장에서 일당노무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국정원 요원의 호출을 받고 대기하는 중이다.

지난달 초 은하의 소재를 캐묻던 칼치 일당을 경태와 기수의 기지로 경찰이 체포했을 때 국정원에서 이들을 인계받아 취조했었다.

이들 모두는 장백산천지회에 소속된 패거리들로 밝혀졌고 배은하를 찾아내서 테러를 가하라는 조직의 명령이 있었음을 실토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국정원에서는 경태와 기수를 국정원의 협력자로 포섭하여 대림동 일대에서 활동 중인 천지회의 동향을 파악하는 정보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담당 요원인 홍 반장이 들어서자 경태와 기수는 자리에 앉은 자세 그대로 가벼운 눈짓으로만 인사할 뿐 요란스럽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홍 반장이 두 사람에게 소주 한잔씩을 따라주면서 무심한 말투로 하는 말이다.    

“그동안 별일들 없었지요?”

경태가 소주잔을 단번에 털어 넣은 후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천지회 패들이 모두 잠수를 탄 것 같습니다”


머리를 끄덕이던 홍 반장이 경태에게 다시 소주잔을 채워주었다.

“혹시 배은하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

두 사람의 표정으로 봐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니다.

기수가 홍 반장 쪽으로 머리를 최대한 내어 밀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누나가 전번에 연길 간다며 우리한테 전화했었지요,

사실은 얼마 전에 성태와도 연락이 됐는데 만세사건이 터진 뒤로는 천지회와 공안에서 누나를 찾아다닌다고 혈안이 돼 있다네요”


홍 반장이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성태 씨와도 연락이 된다는 거죠?”

기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홍 반장이 다시 주변을 살피더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만세사건을 주동했던 성태 씨와 청년단원들이 공안의 수배를 받고서 잠적중입니다,

그래서 현지 사정에 밝은 두 사람이 배은하 씨 구출작전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데”


경태가 더 이상은 기다리지 못하고 홍 반장의 말을 끊어먹었다.

“당연히 나서야지요!

그렇잖아도 난 이참에 여기 생활을 청산하고 연길로 돌아가려고 맘먹고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천지회 놈들의 총탄에 돌아가셨는데 은하누나까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경태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하자 홍 반장이 이번에는 기수 쪽을 바라봤다.

“기수 씨는 한국에서 정착하여 살아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까?”


홍 반장이 부어준 소주잔을 단번에 털어 넘긴 기수가 홍 반장에게도 잔을 건네려 했지만 홍 반장이 사양하며 말했다.

“업무 중에는 술 안 마시는 거 잘 알면서 또 그러신다?”

기수가 피식 웃으며 경태에게 술잔을 넘겼다.

“그렇죠! 업무 중이시죠, 난 여기가 좋습니다,

물론 지금은 어렵지만 참고 견뎌서 자리를 잡아보려고 합니다,

이제 곧 통일도 될 테니까 내 인생의 미래는 여기 코리아연방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대신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요,

지금은 은하누나를 구출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두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홍 반장은 곧장 이들과 함께 모처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작전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한시라도 마음이 급했던 곽 차장은 현지의 정 과장에게 전화했다.

“정 과장! 계엄령이 해제되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최소한의 조건만 충족되면 목련꽃 배송작전을 개시할 수 있도록 설계도를 한번 만들어봐!

현지 사정에 밝은 블랙요원 두 명을 파견해 줄 테니까 아마 도움이 될 거야!”


곽 차장의 특별 지시를 받은 정 과장은 이번 작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현지의 상황이 워낙 위중하여 성공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이었고 설계도의 윤곽이 드러나자 서둘러서 작전은 개시되었다.  


오후 세 시경 길림성 장춘공항에 내린 경태와 기수는 기다리던 국정원 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검정색 지프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자 선글라스를 쓴 채 조수석에 앉아있던 정 과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우선 말해둘 게 있습니다,

서울에서 교육받은 대로 블랙요원의 신분은 블랙일 뿐 우리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끝까지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생포되어 고충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두 분을 부정하게 될 겁니다”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경태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아니까 길게 설명 안 해도 됩니다!”

지프차는 두어 시간을 더 달려서 한적한 대로변에 위치한 제법 큰 여관에 도착했다.


힘찬 필력으로 나무현판에 새겨진 ‘소목청’이라는 글씨가 미풍에 흔들렸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며 건물들의 관리 상태로 봐서는 한눈에도 유서 깊은 상급여관으로 보였다.

여관 종업원의 안내로 2층의 큰 룸으로 들어서자 칠십 대와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테이블에 앉아서 다소곳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두려운 눈빛으로 목례하는 것으로 봐서는 순박한 시골 아낙네들로 보였다.


세 남자가 멀찍이 떨어져서 각자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여전히 짙은 선글라스 속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던 정 과장이 방안의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 두 분은 모녀지간인데 현재 배은하 씨가 기거하고 있는 구룡촌 마을의 옛집에서 최근까지도 생활하시던 분들입니다,

배창우 씨가 이분들로부터 옛집을 다시 사들였지만 서류상으로는 아직도 이 아주머니의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 현시점에서 배은하 씨와 그 옛집은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한눈에도 풍기는 분위기가 단정해 보이는 젊은 여인이 다시 일어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경선이라고 합니다,

배 사장님이 여동생을 살리는 일이라면서 부탁하시기에 나서기는 했지만 무섭고 떨려서…

거저 시키시는 대로는 해보겠습니다만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앉은자리에서 딸을 바라보던 엄마가 답답하다는 듯이 투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쏘아붙였다.

“뭣이 무섭다더노!

그냥 평소 우리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지,

배 사장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길가로 나앉았을 텐데 이만한 일도 못할라꼬!”


정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여인 앞으로 다가가더니 가볍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평소 하시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어려울 것 하나도 없습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평소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두 모녀가 작전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이랬다.

구룡촌 마을에서 메주콩농사를 지으며 무탈하게 살아가던 딸 내외에게 불행이 닥친 건 몇 년 전이었다.

연길시장에서 메주콩 거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사위가 뺑소니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오랜 병원생활 끝에 결국 사위가 빚만 잔뜩 남긴 채 죽게 되자 사단이 발생했다.

담보로 잡혀있던 구룡촌의 집을 빚쟁이한테 헐값에 넘기고도 빚을 청산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마침 은하를 위해서 옛집을 다시 매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창우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아주머니를 찾아왔다.

빚쟁이와는 달리 창우는 정당한 시세를 쳐서 집을 되사주게 되었다.

그 덕분에 빚쟁이의 빚을 모두 청산하고도 얼마간의 장사밑천까지 손에 쥐었다.

창우에게 집을 판 후 연길시내의 한 여인숙에서 생활하던 두 모녀를 다시 찾아간 창우는 정 과장의 구상대로 솔깃한 제안을 하게 된다.

구룡촌의 시골집을 평생 무료로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줄 테니 동생 구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모녀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창우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답답하던 여인숙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 구룡촌마을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정 과장이 이 정도까지만 설명했는데도 머리회전이 빠른 경태가 제일 먼저 이 상황극의 스토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연스럽네요, 은하누나와 경선 씨를 바꿔치기해서 빠져나온다면…”

정 과장이 오른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면서 경태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 분들은 메주콩 농사를 지어서 인근의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근의 시장은 길림성 관내의 시장을 말하는 것인데 연길시장뿐만 아니라 때로는 장춘시장까지도 이동을 합니다!”

이번에는 기수가 끼어들었다.

“시장 갈 때를 이용해서 은하누나하고 바꿔치기를 하면…

그러고 보니 은하누나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해서 서로 바꿔치기를 한다고 해도 눈에 띄지는 않을 것 같네요”


이때 경선이 녹차 주전자를 들고서 일어나 일일이 일행들의 잔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한층 화기애해 지면서 벌써부터 같은 목적을 공유하는 동지의식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경선이 다가오자 경태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이 모습을 기수가 유심히 지켜봤다.


녹차 한 모금을 음미하던 정 과장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아주머니와 경선 씨는 애당초 구룡촌의 집을 판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장춘시장에 납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요,

내일은 평소와 같이 하루 종일 시장에 내다 팔 콩을 가려내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모레새벽 일찍 다시 장춘시장으로 이동하게 될 텐데 이때 은하 씨가 경선 씨를 대신하여 자연스럽게 구룡촌 마을을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 작전은 종결됩니다”


정 과장은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경태와 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은 오늘 당당하게 연길시내로 들어가면 됩니다,

경태 씨는 서울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고요,

기수 씨는 당분간만 다니러 왔습니다, 내 말이 맞죠?”

경태가 기수를 힐끗 쳐다본 후 빙긋이 웃으면서 기수 몫까지 한꺼번에 답변을 했다.

“저 친구는 연길에 처자식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만, 나야뭐 딸린 처자식이라고는 없으니 완전히 돌아온 게 맞지요”


이제야 기수는 경태의 속내를 짐작하겠다는 듯 경태와 경선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혼자서 살포시 웃었다.

“경태 씨는 내일부터 우리가 준비한 1톤 더불캡으로 용달 일을 시작하게 될 텐데 그 첫 일이 바로 아주머니의 메주콩을 장춘시장까지 배달하는 일입니다”

정 과장의 이 말에 경태와 기수는 내심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태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연길에 돌아가면 용달배송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지금 정 과장이 그 계획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사실 정 과장이 목련꽃 배송작전을 설계할 때부터 홍 반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가 바탕이 되었고 기왕이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설계도를 준비했다.

“기수 씨의 역할은 나중에 따로 말해주도록 하죠,

명심할 사항은 지금부터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작전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려야 합니다!

특히 배은하 씨를 머릿속에 담아주시면 안 됩니다!

그냥 일상적인 여러분들의 생활만 생각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진행하셔야 합니다,

밖에 준비된 트럭은 경태 씨 명의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앞으로도 편하게 사용하십시오!”


트럭 한 대를 거저 준다는 말에 경태와 기수가 놀라운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마당에는 진짜로 방금 출고한 파란색의 더블 캡이 정차되어 있었다.

기수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태의 머리를 토닥이면서 함께 자리에 앉자 정 과장이 마무리 발언을 했다.

“모레 아침이면 은하 씨와 함께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습니다만 한 가지 명심할 사항이 있습니다,

휴대폰을 사용할 때는 공안으로부터 도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통화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우린 처음부터 만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계엄령이 발동된 조선족 자치주로부터 목련꽃을 구출해 낼 작전회의를 마쳤다.


두 모녀는 소목청을 나서자마자 곧장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버스를 타고 구룡촌 마을로 향했다.

버스로도 족히 세 시간을 더 달려가야 했으므로 구룡촌 마을 진입로에 설치된 공안의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경태는 1톤 더블 캡을 운전하는 내내 싱글벙걸 즐거운 표정이다.

옆 자리의 기수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마디 건넨다.

“너 인마! 트럭 한 대 얻었다고 싱글벙걸인 것 아니지?”

“공짜로 얻었으니 기분이야 째지지! 또 뭐가 있을라고?”

“지금 너 경선 씨 얼굴이 떠올라서 마음이 싱송생송한 것 맞잖아 인마!

내가 모를 줄 알았지?”

꼭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경태가 어색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냥 실토하고 말았다.

“귀신같은 놈! 내 맘을 어떻게 알았어?

꼭 은하누나를 닮은 게 첫인상이 너무 좋더라!”

“그래 옛날부터 성주하고 넌 은하누나라면 껌뻑 갔었지,

내가 봐도 경선 씨의 분위기가 은하누나하고 비슷한 데가 있었어,

그래도 넌 인마 총각인데?”


기수의 이 말에 경태가 피식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마흔 넘은 총각! 그것도 벼슬이가?

난 아무래도 관계없다 경선 씨만 좋다면…”

경태의 마음을 확인한 기수는 더 이상의 놀림대신 경태의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생각해 보면 경태에게서 여자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이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상상해 보았더니 의외로 노총각과 한번 다녀온 돌싱녀가 꽤 잘 어울렸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연길시내에 들어섰다.

여차하면 짓뭉개어 버리겠다는 듯 탱크와 장갑차들이 줄지어 서서 살벌한 공포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를 상대로 벌이는 중국 당국의 신경질적인 반응처럼 보였다.

최근 환구시보의 사설을 통해서 언급되기 시작한 조선족 자치주의 해체가 실제로 눈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경태의 더불캡 트럭은 대로변에 설치된 인민해방군과 공안의 합동 검문소 앞에서 정차했다.

두 사람을 차에서 내리게 한 공안이 소지품을 모두 책상 위에 올려놓게 한 후 하나하나 샅샅이 살펴봤다.

그런데 노트북의 모니터에서 두 사람의 출입국 기록이 나타나자 의자에 앉은 채 노트북을 빤히 쳐다보던 공안이 경태와 기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못 나가서 난리인 판국에 하필이면 이 시점을 택해서 들어오는 이유가 뭐요?

이 시국에 굳이 계엄령이 발령된 조선족 자치주에 들어오겠다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요?”


공안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경태가 대뜸 당돌한 태도로 돌변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남의 나라에 일하러 갔다가 내 고향집을 찾아오는데 뭐가 이상하요?”

피 끓던 이십 대 시절부터 배 교수와 함께 이곳 연변지역에서 민족운동을 해오면서 다져진 반골기질이 욱하고 터졌다.

하지만 지금 드러내는 감정은 다분히 계산된 감정이었다.

한국을 남의 나라라고 규정하면서 같은 중국인임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었다.


이때 기수도 거들고 나섰다.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와서 내 집을 찾아가는데 뭐가 이리도 복잡하요?

우리가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 거요!

신속하게 좀 처리합시다!”


자리에 앉아서 두 사람의 여권을 쳐다보던 공안이 재촉하는 경태와 기수를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중국을 고국이라고 부르는 이 자들에게서 사상범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알 수 없어 두 사람의 휴대폰으로 자신의 번호를 꾹 눌렀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던지 자리에서 일어나 더불캡의 차량 앞을 자신의 휴대폰으로 촬영을 한 후에야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

취업목적의 F4비자를 확인한 이상 두 사람의 신분은 입증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유심히 관찰하겠다는 암시였다.


검문을 통과한 더불캡은 연길시장을 지나다가 습관적으로 향토연구소 방면으로 향했다.

그 앞을 천천히 지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이들이 발견한 사람은 대림동 중앙시장에서 활동하던 바로 그 칼치였다.

서울에서 은하의 행방을 대라며 행패를 부리던 칼치일당을 경태와 기수의 기지로 경찰이 덮쳤을 때 칼치는 체포되지 않고 도망쳤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여기에 있었다.


향토연구소 앞을 몇몇 부하들과 함께 서성이던 칼치가 연구소의 정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벌써 보름째 문을 쳐닫아났구먼!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니 도대체 어디 로들 숨어든 거야!”

칼치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행동대장 훠치산에게 전화했다.

“형님! 이것들이 어디서 잠수를 타고 있는지 연길 시내에서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요?”

칼치의 휴대폰으로 훠치산 특유의 악센트 높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철통같이 경계를 서고 있는데 지들이 도망갔으면 어디를 갔겠어?

어쨌든 연변 근방에 숨어있을 테니까 외곽으로도 샅샅이 뒤져봐!

회장님의 특명이니까 공안 애들보다는 무조건 우리가 먼저 찾아내야 돼!”     


백두산의 서문방향으로 나란히 자리한 호텔들 가운데서 유독 장백호텔 주변으로는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숲 속에 파묻힌 주변의 절경 탓에 새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이 호텔의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장백산천지회의 본부사무실,

오늘도 중절모자부터 양복이며 양말까지 온통 백색으로 치장한 왕 회장이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최고급 쿠바산 시거 연기를 무지막지하게 뿜어대고 있었다.  

왕 회장이 북경으로 전화하고 있는 동안 옆자리는 언제나처럼 그의 심복 훠치산이 시거연기의 테러공격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아침부터 벌써 세 번째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허 원장은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왕 회장이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려던 바로 그때였다.


허 원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왕 회장이 아직도 나에게 볼일이 있었던가요?”

“원… 원장님! 조선족 만세사건은 사실 우리로서도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다고는 했습니다만 조선족들이 그렇게까지 떼거지로 몰려나올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암튼 조선족들은 독종들입니다!

고구려족의 후예라고 하더니만 그 정도로까지 독종들인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이 정도로 대응했으면 가타부타 상대의 답변이 있어야 하겠지만 허 원장은 또다시 침묵모드로 돌입했고 왕 회장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원장님! 화가 많이 나신 건 알겠지만 사실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지만 왕 회장이 재차 재촉해도 침묵만 이어질 뿐 허 원장으로부터는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나올 때는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인데 왕 회장으로서도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긴 침묵 끝에 허 원장의 화난 목소리가 왕 회장의 귓전을 강타했다.

“이것 보세요 왕 회장!

난 이번에 당신의 그 깔끔하지 못한 일처리 때문에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는데 당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참 쉽게도 말을 합니다 그려,

고구려가 어쩌고 어쨌다고요?,

고구려는 우리 중국의 변방에서 활동했던 중국의 소수 민족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입니까!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간과하는 당신의 그 천박함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들고 말았어요,

당신도 입이 있으면 한번 말을 해봐요?

지금껏 당신이 제대로 처리한 일이 뭐가 있었소?

걸핏하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징징거리기나 했지 도대체 뭐 하나라도 똑 부러지게 처리한 일이 있었느냐 말이요!”


그래도 동북 3성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자들도 인정해 주는 장백산천지회의 우두머리인데 이렇게까지 무안을 주다니 전화기를 잡은 왕 회장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어쨌든 북경과 동북지방은 갑과 을의 관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북경의 상황을 재빨리 간파한 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전화기를 공손한 자세로 바로 잡으며 머리를 최대한 낮게 조아렸다.


평소 점잖은 샌님 스타일인 허 원장이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을 땐 북경의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뜻이다.

이럴 땐 무조건 머리를 최대한 숙여서 폭풍우를 피하고 봐야지 머리 빳빳하게 쳐들고 까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 북경과 거래를 해오면서 축척된 왕 회장 나름의 처세술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원장님!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2미터에 육박하는 큰 덩치의 왕 회장이 허리를 조아린 채 쩔쩔매는 모습은 훠치산에게는 오금을 저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다시 허 원장의 음성에 노기가 증폭되었다.

“당신의 엉성한 일처리로 인하여 현재 북경에서의 내 처지가 어떤지는 당신 같은 무성의한 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오,

동북공정이 무슨 어린아이들 장난인 줄 아시오!”

이렇게 말한 허 원장이 일방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원장님! 잠깐만요, 한국정부의 기획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국정부가 뒤에서 순진한 조선족들을 부추겨서 벌인 기획사건이었습니다!”


“뭐요? 방금 당신이 한 말을 책임질 수 있어요?

확보된 물증은 뭡니까?”

“지금 그 증거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빼도 박도 못할 빼박증거를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 봐요 왕회장! 당신의 일 처리 방식이 매사에 그 모양이지 않소?

한국대통령이 출국할 때 십만이 넘는 조선족들이 떼로 몰려나와서 대통합코리아 만세를 외쳤단 말이요!

조선족 자치주를 분리 독립시켜서 코리아연방에 통합하겠다는 정치행사를 그것도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버젓이 벌였단 말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한국정부의 사주를 받은 사건이 분명하다면 당연히 우리는 한국에 일격을 가할 무기를 가지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심증만 있을 뿐 증거는 없다는 것 아니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차후 이 따위의 전화질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리고 불쑥불쑥 북경으로 날아오지도 말고 내가 찾을 때까지 근신하고 있으시오!”

귓전을 강타하는 '탁!'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어졌고 왕 회장은 한동안 굳어버린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동북 3 성지역에서 당정군의 고위인사들조차 왕 회장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그 파워의 원동력은 바로 북경과의 연결고리였다.

그중에서도 허 원장을 통한 인사 청탁은 단연 핵심 무기였다.

그런데 허 원장과의 관계가 뒤틀려버렸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하루아침에 자신의 입지가 추락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 같은 난감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하루속히 배은하를 잡아들여서 조선족 만세사건을 사주한 집단이 한국정부임을 실토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 필요성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훠치산! 아이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지금부터는 훠치산이 직접 나가서 현장을 지휘한다, 알았나!”

“예! 회장님”

깍두기머리에 거친 인상이며 한 눈에도 삼합회의 주먹대장으로 인식되기에 손색이 없던 훠치산이었지만 지금 왕 회장 앞에서는 겁먹은 생쥐처럼 머리를 조아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연변일대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배은하를 잡아와! 단 죽이지는 말고 말이야,

내가 직접 저희 아비처럼 처단할 테니까 반드시 산채로 잡아와란 말이야!

그전에는 내 눈에 띌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너마저도 내가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해서 공안은 공안대로, 천지회는 천지회대로 서로가 눈알들을 부라리며 온 연변일대를 이 잡듯이 헤집고 다녔다.

특히 행동대장 훠치산이 직접 내려온 이후로 그 도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자치주 전역을 들쑤셔댔다.

그들의 그림자가 아직 구룡촌 마을까지는 미치지 않았다지만 그것도 이제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은하는 모처럼만에 밥상다운 아침상을 마주했다.

어젯밤 무사히 검문을 통과하여 집에 도착한 경선 모녀에게서 그간의 사정을 전해 들은 은하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으로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두 분께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 때문에 안 하셔도 될 고생을 하시게 되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경선엄마가 측은한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봤다.

“한국에서 편하게 사시던 분이 우짜다가 이런 고초를 겪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소마는 우리가 도와줄 테니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소,

우리야 뭐 이 집에서 다시 살게 된 것만 하더라도 감사한 일 아이던교!”


경선은 어젯밤 은하를 처음 본 이후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분위기가 비슷한 은하에게서 친근감을 느꼈다.

“같은 동포들 사이에는 서로 도와야지요,

그래도 배 사장님 덕분에 빚도 청산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여인숙을 떠 돌지 않아도 되게 생겼으니 오히려 우리가 고맙지요”


아침밥상을 물리자마자 두 모녀는 남들 보란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마루에 앉아서 콩 가리는 일을 시작했다.

내일 장춘시장에 메주콩을 납품하기 위해서는 콩에 섞여있던 이물질들을 가려내는 작업은 필수 작업이었다.

반면에 은하는 혹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 봐 방 안에서 꿈적도 하지 않은 채 어서 오늘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선족 자치주의 김일경 공안국장은 자신의 모가지가 경각에 달렸던 처지라 몹시도 초조한 상황이었다.

빨리 배은하를 잡아들여야 한다며 산하 여덟 개의 시현 공안국장들을 아침저녁으로 닦달했다.

그런데 배창우와 향토연구소를 중심으로 샅샅이 훑고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흔적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 국장이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지 업무용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박호소장 연결해!”

연길시내의 중심가를 관할하는 파출소는 자치주의 공안들이라면 누구라도 근무하고 싶어 하는 파출소였다.

그래서 같은 조선족으로서 자신의 중고등학교 직속 후배이기도 한 박호를 이곳 소장으로 발탁한 당사자가 바로 김 국장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박 소장은 김 국장의 충복으로 통했고 김 국장도 편하게 속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부하였다.  


“이봐 박 소장! 아무래도 우리가 번지수를 잘못짚은 것 같아, 이미 연길시내를 벗어난 것 같단 말이야”

“외곽으로 숨어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말인데 외곽의 시골마을들을 중심으로 그 계집이 숨어들만 한 연고지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봐!

잘 알고 있겠지만 이번 사건 해결 못하면 내 모가지는 물론이고 박 소장 당신 모가지도 장담 못하는 것 잘 알지?”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형님하고 저는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 아닙니까!”

“이건 극비사항인데 조만간에 조선족 자치주가 해체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어,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공을 세워서 단단한 기둥뿌리 하나정도는 붙들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다간 이번 태풍에 살아남기가 힘들게 생겼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샅샅이 한번 뒤져보란 말이야!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니까!”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 소장이 다시 한번 배은하의 가족과 관련된 서류파일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가만있어봐라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구룡촌 마을이 배창우 배은하의 고향마을이라면 이곳으로 숨어들지 않았을까?

검문소를 빠져나가면 곧바로 국도를 탈 수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어쩌면 여기가?

맞아 바로 여기가 포인트가 될 수 있겠어!’


점심 무렵부터 조금씩 휘날리던 눈발이 저녁이 되자 온 연길시내를 뒤덮을 만큼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검문소의 교대근무를 마치고 파출소로 돌아온 이 경사와 세 명의 견습 경원들이 입구에서부터 모자며 옷에 잔뜩 묻은 눈발을 털어낸다고 분주하다.   

“이 경사! 오늘은 뭐 특이할만한 사항 없었어?”

출입문을 열어놓은 채 아직도 옷에 묻은 눈발을 털어내고 있던 이 경사가 박 소장의 질문에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듯 평이하게 대꾸했다.

“한국에 체류하다가 F4비자로 다시 들어오던 사십 대 남자가 두 명 있었고 그것 말고는 별일 없었습니다”

이 경사의 방금 이 말에 박 소장의 동공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른손으로 손짓하며 빨리 와서 보고하라고 이 경사를 재촉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하늘은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하지만 온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은 백색의 눈발들로 인하여 벌판은 여전히 하얀색 천지다.

마루에 앉아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감상하던 은하 곁으로 경선이 다가오며 쪼그려 앉았다.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느덧 마흔일곱 중년의 여인으로 변해버렸지만 여전히 은하는 이십 대의 청순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옛날생각! 어릴 적 오빠하고 눈 오던 날 여기 이렇게 앉아서 멍하니 앉아있던…”


경선 역시 나지막한 돌담 너머로 펼쳐진 백색의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나보다 열 살이나 위인데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요,

언니의 처녀 적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제 말이 맞죠?”


실제로 은하는 이십 대부터 즐겨 입기 시작한 청바지와 귀밑까지 내려온 뒷 머리를 큰 핀으로 묶는 스타일까지 세월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당시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했다.

“응 오래된 습관이야,

꾸민다는 건 왠지 어색하게 느껴져서 여태 화장도 잘 못해, 난 그냥 편한 게 좋아”


경선이 자신의 거민신분증에 붙은 사진과 은하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살포시 웃었다.

“다행이에요, 어두운 데서는 의심하지 않겠어요,

내 사진과 언니 얼굴의 윤곽이 비슷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지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신분증을 은하에게 건네며 말했다.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했으면 좋겠네요”


경선의 신분증을 건네받으며 은하가 경선의 두 손을 다정하게 감쌌다.

“고마워! 기회가 된다면 꼭 은혜를 갚고 싶어”

은하의 이 말에 경선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언니도 참! 이 정도의 일로 무슨 은혜까지!

내일 무사히 여기를 떠나더라도 가끔씩은 놀러 올 거죠?”


이번에는 경선의 어깨를 오른팔로 감싸면서 말했다.   

“그럼 내 고향인걸 당연히 돌아와야지”

그런데 정작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왠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은하는 꼬박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웃집 수탉의 홰치는 소리를 신호로 모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삐 움직였다.

명분은 장춘시장에 메주콩을 팔러 가는 것이지만 실상은 살벌한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과 진배없었기에 그만큼 긴장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은하와 경선은 서로의 옷을 바꿔서 입었다.

경선이 시장 갈 때 입는 복장이었지만 길림성의 혹독한 겨울날씨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몇 겹으로 끼워 입었다.

은하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장상태를 바라보던 경선이 놀리듯이 하는 말이다.

“이렇게 입으니까 백두산을 종주해도 까딱없겠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던지 은하도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경선이 씌워주는 귀덮개모자까지 쓴 후에야 마당으로 나왔고 이제는 정말로 떠난다는 생각에 옛집의 이곳저곳을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모두 담아서 가겠다는 듯 부엌이며 작은 화단이며 은하의 눈길이 바삐 움직였다.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를 켠 채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새하얀 눈길 위를 밟으며 경태의 더블캡 트럭이 다가왔다.

경태와 기수가 마당에 서있던 은하를 발견하자 하마터면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부를뻔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인사만으로 상봉식을 대신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메주콩을 담은 40킬로짜리 포대자루 여덟 개를 단박에 트럭의 짐칸에 실었다.


이제 출발이다.

기수도 조수석에 오르고 있었을 때 경태가 슬그머니 경선에게로 다가갔다.

경선이 수줍은 얼굴로 머리를 숙이자 경태가 잠바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낸 작은 선물포장 꾸러미와 명함 한 장을 경선의 손에 쥐어준 뒤 차에 올랐다.


이 모습을 차에 타고 있던 경선엄마도 유심히 보고 있었지만 경태는 이 한마디 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운전했다.

“쉿! 지금은 질문 안 받으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경태의 유별난 행동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장감을 풀어냈다.


경태가 주고 간 선물꾸러미에는 연길시내의 초콜릿 전문 가게에서 산 작은 초콜릿 상자가 들어 있었고 예쁜 카드도 한 장 끼어있었다.

‘경선 씨 때문에 내 마음에도 오랜만에 희망의 새싹이 피어났어요,

달랑 건강한 몸덩이 하나뿐이지만 경선 씨와 만나보고 싶습니다’

함께 전해준 명함에는 ‘태선용달사’ 대표 최경태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종일 고민하여 탄생한 ‘태선’이라는 이름 속에서 그의 확신을 망치질해 버렸다.

경선은 어느새 마음을 빼앗겼던지 멀리 떠나가는 트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남녀 간의 감정이라곤 아예 메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심장에선 쿵쾅거리는 요동소리가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다섯 시를 갓 넘긴 시각,

국도 진입로 입구에 설치된 검문소가 가까워졌다.

이 검문소만 무사히 통과한다면 곧장 국도를 타고 약속된 장소인 소목청까지는 족히 세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다.


“정지! 모두 내리시오!”

검문소를 지키는 공안은 모두 두 명이다.

아직 신입티를 벗지 못한 견습경원이 모두를 차에서 내리게 했고 차에서 내린 일행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얼굴을 빼꼼하게 들여다봤다.

그러던 사이 제법 고참 티를 내던 다른 공안이 느릿느릿 짐칸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신분증검사를 통과한 경태가 너스레를 떨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구룡촌 마을 하면 메주콩 아닙니까?

이 모녀가 농사지은 메주콩을 장춘시장에 내다 팔러 갑니다,

우린 용달인데 가야 할 길이 멀어서 그러니까 빨리빨리 좀 처리합시다!”

짐칸의 물건이 메주콩임을 확인한 공 경사가 앞으로 다가와 피식 웃더니 운전석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러더니 단박에 차량에 올라타고는 매서운 눈매로 차량내부의 여기저기를 세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은하의 신분증을 확인한 진 경원이 얼굴 대조를 하기 위해서 다시 은하를 쳐다봤다.

순간 일행들은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정작 은하는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진 경원에게 ‘수고가 많습니다!’라고 따듯한 인사말까지 건넸다.

검문소의 조명등에서 의도적으로 떨어진 위치에 서있던 은하는 흐릿한 불빛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통과되었다.

처음부터 은하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던 경선엄마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이다.


신분증검사를 모두 마친 진 경원이 공 경사를 바라보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지만 공 경사는 기어이 뒷문까지 열어젖혔다.

이번에는 차에 올라타지는 않았지만 허리를 구부려서 시트 밑까지 확인을 한 후에야 돌아섰다.


좀 전에 경태가 했던 말이 신경에 거슬렸던지 경태를 쏘아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때가 어느 땐데 빨리빨리를 말하는 거요?

당신은 지금 계엄령이 발동됐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시면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던가!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랑 거려서 당신들한테 좋을 게 없을 텐데 말이야”

공 경사가 싸늘한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일행은 또다시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잔뜩 겁을준 공 경사가 차량 번호를 수첩에 기록한 후 검문소 안으로 들어가 파출소에 전화하고 있을 때였다.

은하가 경선엄마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진 경원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우리 엄마가 몸살기가 있었어 그러는데 우린 이제 그만 차에 타도되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려요!”

진 경원이 공 경사 쪽을 한번 살피더니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은하는 경선엄마를 먼저 뒷자리에 오르게 한 후 같이 차에 올랐다.


그런데 공 경사가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을 때 하필 전화를 받은 당직자는 그저께 저녁 기수와 경태를 검문했던 바로 그 이 경사였다.

“차번호를 보니까 한국에서 돌아온 그 떨거지들 같은데 소장님이 요주의 대상으로 관찰해 보자고 했으니까 공 경사! 내가 소장님한테 연락해 볼 테니까 그때까지는 그 떨거지들 보내주지 말고 잡아두고 있어 봐!”

전화를 마친 공 경사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검문소의 문을 나오자마자 삐딱한 시선으로 일행들을 쳐다보더니 어깨에 차고 있던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손전등의 불빛을 비쳐가면서 재차 얼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차에 타고 있던 은하가 차창을 내린 채 그대로 앉아있자 공 경사가 은하를 쏘아보면서 대뜸 큰 소리로 소리쳤다.

“누가 차에 타라고 했어! 빨리 못 내려요!”

마치 중죄인이라도 된다는 듯이 공 경사가 정색한 얼굴로 고함치고 있었지만 은하는 차분한 표정으로 경선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가 추운 데서 오래 서있었더니 몸살이 오려나 봐요,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사정 좀 봐주셔요, 부탁드려요!”

간청하듯 은하가 말하고 있었지만 공 경사의 완강한 태도는 막무가내였다.

어서 내리라고 손짓까지 하면서 두 여인이 내리기를 거칠게 재촉했다.

그럼에도 차 안의 여인들이 경태와 기수 쪽을 바라보며 미적거리고 있자 공 경사의 얼굴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경태가 다시 나섰다.

민첩하게 공 경사의 오른팔을 끌고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더니 바지주머니에서 꺼낸 지폐 몇 장을 공 경사의 가죽잠바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쁜데 편의 좀 봐주시오!

장춘시장까지 가려면 시간이 촉박해서 그럽니다,

또 저 아주머니의 몸 상태도 안 좋은 것 같으니…”


피식 쓴웃음을 짓던 공 경사가 순식간에 경태의 양팔을 뒤로 꺾어 검문소 쪽으로 끌고 가며 진 경원에게 고함쳤다.

“진 경원! 수갑 가져와!

이 새끼 아무래도 수상하다, 파출소로 끌고 가야겠어!”

공 경사의 눈빛은 잔뜩 독이 오른 늦가을 독사눈처럼 변해있었다.

그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년도 의심스러워!”


진 경원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갑을 풀고 있던 사이 경태가 기수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미리 약속해 두었던 다음 작전에 돌입하자는 신호였다.

기수가 슬금슬금 공 경사의 뒤로 다가오더니 오른발로 그의 허리짝을 세차게 밀쳐버렸다.

‘퍽’하고 공 경사가 앞으로 꼬꾸라지자 기수가 다시 날렵하게 달려가 길가의 도랑으로 공 경사를 굴러서 떨어뜨렸다.

2미터 깊이의 도랑에 굴러 떨어진 공 경사가 신음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이내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처음부터 정 과장은 바로 이런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몸놀림이 재빠른 기수에게 그 역할을 따로 주문했었다.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대처하여 은하를 데리고 속히 현장을 벗어나라는 지시였다.  


공 경사가 일격을 당하여 쓰러지자 이에 놀란 진 경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공안 봉을 빼들고 기수를 향해서 다가왔다.

기수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기 위해서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선 잔뜩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이때 진 경원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간 경태가 순식간에 두 팔을 잡고는 발을 걸어서 앞으로 꼬꾸려뜨렸다.

오른 발목으로 그의 어깨를 짓누르면서 길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갑을 바라보며 기수에게 소리쳤다.

“거기 수갑 좀 가져와!”

떨어진 수갑을 재빨리 주워온 기수가 진 경원을 허리 뒤로 수갑 채우면서 그의 허리춤에서 또 다른 수갑을 발견했다.

일어서는 경태에게 진 경원의 허리춤에서 푼 수갑을 던져주며 소리쳤다.

“도랑에 빠진 놈도 수갑 채우고 빨리 떠나자!”


수갑을 받은 경태가 도랑으로 뛰어들어 코피를 흘리면서 의식을 잃은 공 경사의 양손을 허리 뒤로 수갑 채웠다.

그런 뒤 흙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공 경사가 혹여 숨이라도 쉬지 못할까 봐 얼굴을 옆으로 돌려주는 인정을 베푼 후 일어섰다.

경태가 차에 오르자 기수의 오른발은 더블 캡의 가속 페달을 힘차게 밟아대고 있었지만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의 온몸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경직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검문소에서는 계속 전화벨이 울려댔다.

하지만 뒤로 양손이 수갑 채워진 진 경원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도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한동안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진 경원이 간신히 왼쪽으로 누운 후에야 힘겹게 일어섰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어 휘청휘청하는 동작으로 겨우 검문소 문에 어깨를 기댄 진 경원이 창백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숨을 고른 진 경원이 몸을 뒤로 돌려 수갑 채워진 양손으로 문을 당겼다.

가까스로 검문소 안으로 들어와서는 입으로 전화기를 물어서 바닥에 떨어뜨린 뒤 고함을 질렀다.

“비상! 비상입니다!

검문 불응자에게 당했습니다,

공 경사님이 많이 다쳤습니다!

검문불응자들이 장춘방향 국도로 달아났습니다!”


동이 틀 무렵 박 소장이 급히 파출소로 출근하여 사건현장으로 달려간 이 경사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다.

“소장님! 공 경사가 의식은 돌아왔습니다만 여기저기를 많이 다쳐서 일단 병원으로 후송했고요,

그저께 소장님이 잘 관찰해 보라고 했던 한국에서 들어온 그 떨거지들이 아무래도 단순한 자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용달 일을 이제 막 시작하는 자들이 이렇게까지 무리하는 걸로 봐서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 자들과 함께 있었던 자들의 신원은 파악됐나?”

“네 장춘시장에 메주콩을 팔러 가는 모녀가 함께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모녀가 함께 있었다는 말에 박 소장은 순간 번쩍하면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 경사!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 보내 줄 테니까 진 경원한테 보여줘 봐!

같이 있었던 모녀가 맞는지 확인을 해봐야겠어!”

박 소장은 자신의 폰에 내장돼 있던 배은하의 여권사진을 이 경사에게 전송한 후 초조하게 그 결과를 기다렸다.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 걸려온 전화는 이 경사가 아니라 병원으로 후송된 공 경사였다.

“소장님! 늙은 여자와 함께 있던 딸년이 소장님이 보내준 사진 속의 그 여자가 맞습니다,

진 경원 그 멍청한 놈이 잘 모르겠다고 해서 이 경사가 저한테 사진을 보내왔는데요,

이 여자가 틀림없습니다!”


박 소장의 목소리는 이내 흥분상태로 돌변했다.

“공 경사! 틀림없이 사진 속의 그 여자가 맞다는 거지?”

“예 분명합니다! 사진 속의 여자가 틀림없습니다,

뭐 중요한 여자라도 되는 모양이죠,

암만 생각해도 느낌이 이상하다 했어요,

메주콩이나 팔러 다니는 촌년의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마음이 급했던 박 소장은 너스레를 떨어대는 공 경사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후 다급하게 김일경 공안국장에게 전화했다.

“뭐 배은하라고?

검문소를 벗어난 지는 얼마나 됐어?”

“삼십 분가량 됐습니다,

장춘시장으로 간다고 했으니 아마도 장춘공항으로 빠져나갈 계획인 것 같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지명수배자가 어떻게 공항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겠나?

국정원과 접선해서 다른 루트를 찾아볼 거야!”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김 국장이 잠시나마 머뭇거렸던 것은 조선족 자치주가 해체될 경우 십중팔구 조선족 출신들의 자리보전이 어려울 게 뻔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극복할 방책으로 배은하라는 대어를 오롯이 자신의 공으로 잡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배은하를 빼돌린 일당이 이미 자치주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커다는 사실이다.

이럴 경우 길림성 공안청의 관할이 되기 때문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수 있었다.

공안청에 보고하지 않고서도 배은하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김 국장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장백산천지회의 왕 회장이었다.

길림성 공안청장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던 왕 회장과 이번 기회에 직접 소통하여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공안청장을 패싱 하는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긴 했지만 어차피 '도 아니면 모' 좌고우면 할 시간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왕 회장님!

저는 조선족 자치주의 공안국장 김일경입니다,

회장님께서 관심을 가질만한 사건이 발생해서 급히 연락드렸습니다!”

“오호 그래요?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라면 혹시?”

“그렇습니다, 오늘 새벽에 드디어 배은하가 저희들의 감시망에 걸려들었습니다,

현재 저희들이 뒤쫓고 있는 중입니다”

“뭐요! 지금 배은하라고 했소?

거기가 어디요? 아니지 아니지!

김 국장이 공안청장을 제치고 내게 직접 연락을 해왔을 때는 나와 직거래를 하고 싶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내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요 김 국장?”

“아 아닙니다! 감히 제가 회장님과 거래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저의 이름을 회장님께서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뜻으로…”

“조선족 자치주의 김일경 공안국장이라,

내가 당신 이름을 꼭 기억하겠소!

이번 일만 잘 처리된다면 당신이 길림성의 공안청장이 될 때까지 내가 쭉 뒤를 봐주리다,

자 이제 배은하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겠소?”


김일경 국장으로부터 배은하의 현재 위치를 알아낸 왕 회장은 연길시내에 머무르고 있던 훠치산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왕 회장의 지시를 받고 출동한 훠치산 일행은 지금 국도 방향이 아니라 연길시 소방청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왕 회장의 전화 한 통화로 소방청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예열을 시작했다.

국도검문소를 빠져나간 사십 분의 시간을 보충받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왕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동북 3성 지역에서 왕 회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소방청의 헬기를 이용하는 정도의 일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에 속하지 않았다.      


검문소를 빠져나와 국도를 달린 지도 한 시간가량이 흘렀을 때 어느덧 기수의 심리상태도 안정을 회복했다.

뒤쫓아 오는 차량도 고 국도에 설치된 검문소도 없는 것으로 봐서는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제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황금색 태양빛이 대지를 조금씩 밝히고 있었을 때 차창 밖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은하가 차 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웠다.

“저 때문에 다들 위험한 상황에 처하신 것 같아서 너무 죄송합니다,

저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위험들을 무릅쓰는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은하의 자조 섞인 말에 대한 반응이었을까,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던 경선엄마가 아무 말 없이 은하의 손을 가만히 감싸며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답변은 조수석에 앉아있던 경태가 대신했다.

“누나가 뭐라니요?

우리가 존경하는 배 교수님의 따님이시고 대통합코리아연방을 구상하신 윤 비서관님의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누나는 우리가 볼 때도 평범하지 않지만 중국이 볼 때는 효용가치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나는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건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누나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저 멀리서부터 헬리콥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지나가는 소방청의 헬기정도로만 생각했지 설마 하니 자신들을 추격하는 헬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시간대에 장춘방향으로 달려가는 파란색의 더불캡 트럭을 공중에서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도를 낮춘 헬리콥터는 몇 백 미터를 먼저 날아간 뒤 전방의 차량흐름이 뜸한 지점을 택하여 전격적으로 착지를 시도했다.

국도 한가운데서 갑자기 헬리콥터가 착지를 시도하자 운행하던 차량들이 급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하면서 연쇄적으로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유유히 헬리콥터에서 내린 훠치산 일행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국도 상에서 장애물들을 이리저리 비켜가며 거침없이 내달렸다.

일행들 중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경태가 머리를 들었을 때는 연쇄충돌의 중간쯤에 파묻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황임을 확인하고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더군다나 차창 밖에선 부하들과 함께 달려온 훠치산이 검정색 가죽장갑으로 흐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훠치산이 자신의 휴대폰에 내장된 은하의 여권사진과 실물을 비교하더니 감격의 파안대소를 하면서 곧바로 왕 회장에게 전화했다.

“회장님 기뻐하십시오! 드디어 잡았습니다!

배은하 년이 틀림없습니다, 옛! 즉시 끌고 가겠습니다”

휘치산의 눈짓 신호로 패거리들은 오직 은하 한 사람만을 끌어냈고 그 사이에 뒤쫓아 온 박 소장 일행은 나머지 사람들을 체포하여 모두 수갑을 채웠다.

은하를 태운 헬리콥터가 백두산의 서문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가던 일행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은하는 장백산천지회에 잡혀갔고 나머지 일행은 공안에 체포되고 말았으니 국정원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했던 목련꽃 배송작전은 의심의 여지없는 완벽한 실패였다.

작전의 현지 책임자인 정 과장으로부터 이 같은 처참한 소식을 보고받은 곽 차장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정 과장! 헬기의 도착장소를 알아낼 수는 있겠나?”

“공안청이 아니라 소방청에 소속된 헬기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장백산천지회가 있는 서문 쪽일 가능성이 큽니다만 최대한 알아보고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곽 차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사무실의 책상을 두 주먹으로 내리 치면서 앞으로 불어 닥칠 뒷일 걱정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렇다고 이 중차대한 사실을 윤 비서관에게 통보하지 않을 도리도 없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전체 16층의 청와대 신청사 안에서도 대통령집무실과 같은 층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참모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늘 긴박하게 움직이는 국가안보실의 상황과는 달리 통일정책비서관실의 최근 표정만큼은 달랐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강렬한 아침햇살이 부담스러웠던지 의자를 돌려 앉은 윤 비서관은 오늘도 침울한 분위기 속에 휩싸인 채 도무지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삼일특공대를 이끌고 있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생각할 때 일분일초도 허투루 사용할 수 없는 비상 상황의 연속이다.

통일을 향해서 힘차게 내달려야 할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이토록 업무에 집중할 수 없는 시간들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큰 스트레스였다.

온통 머릿속은 사랑하는 아내를 사지에 내팽겨 두었다는 자괴감으로 꽉 차 있었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면서도 결단을 미루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사정을 세심하게 헤아려주는 그분을 실망시킬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염없이 멍 때리는 시간만 길어지고 있었을 때 드디어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왔다.

성공 아니면 실패를 알리는 전화가 분명하다.

스마트폰을 잡은 윤 비서관의 오른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곽 차장의 머뭇거리는 말투에서 일순간 정적이 흘렀고 윤 비서관은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간파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차장님!”


차마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던 곽 차장의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마지막 단계에서 그만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을 만나 작전이 잘 안 됐던 모양입니다”

불길했던 직감이 적중하자 윤 비서관의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집사람의 신변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곽 차장의 한숨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윤 비서관의 뇌리에 까지 전해졌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오늘 아침 작전중에 은하 씨가 미상의 단체에 납치되어 어디론 가 끌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후의 사정에 대해선 아직까지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만 현지에서 계속 추적 중에 있으니 좀 더 기다려봐야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곽 차장의 휴대폰에서는 더 이상 윤 비서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맥이 풀려버린 사람처럼 윤 비서관의 두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윤 비서관은 자신의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어금니를 깨어 물고 있는 중이다.

한참을 그렇게 들고 있던 곽 차장의 휴대폰에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윤 비서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제가 뭘 해야 되죠?

무슨 일이든 다할 테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은하 씨를 구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일이지 윤 비서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괴롭겠지만 우리의 일은 우리에게 맡겨두고 윤 비서관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 주세요,

한 가지만은 약속드리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은하 씨를 구출하는 우리의 임무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됐습니다! 차장님의 그 말만 믿고서 저는 저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끝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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