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의 뚝순이
야구기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여러 가지 직업이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라면 야구 선수가 되고 싶을 것이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에는 야구 구단 프런트, KBO 직원, 트레이너 등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혹시나, '야구기자'라는 이 네 글자를 듣고 가슴이 쿵쿵 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야구기자라면 누군가 야구팬들에게 '덕업일치'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꿈의 직장! 아닌가. 요즘은 남성 팬뿐 아니라 여성 팬들도 야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만큼 여성들의 야구기자 취업 도전도 10년, 20년 전보다는 훌쩍 늘었다.
야구기자가 되면 돈을 주지 않아도 매일 좋은 장소에서 야구 경기를 볼 수 있고, 야구팬들이 선망하는 야구선수와 단지 보는 것을 넘어 매일 가까이에서 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직업이니 얼마나 행복할까.
취준생 시절의 나 역시 그렇게 막연히 생각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나는 1년간의 취준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야구기자를 꿈꾼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의 꿈은 따로 없었다.
누군가는 야구기자들이 엄청나게 사명감을 가지고 야구계에 투신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내 주변에는 실제로 야구가 너무 좋아서 환경이고 조건이고 따지지 않고 야구계에 뛰어든 사람도 있다. 함께 했던 선배는 야구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 먼 시골에서도 이곳저곳 야구장을 돌아다니다 불굴의 의지로 야구기자가 되기도 했다.
반면 나의 케이스는 조금 달랐다. 나는 2010년 초반 우연히 야구계에 여자가 많아지기 시작할 때 야구계의 문을 두드렸다. 그전에는 여성뿐 아니라 누구나 그렇듯 그저 평범하게 점수 맞춰 대학을 가고 점수 맞춰 전공을 고르고 이력서에 맞춰 나를 선택해줄 회사를 기다렸을 뿐이었다.
나는 야구기자라는 단어가 있는지도 몰랐고 스포츠 기자가 있다는 것은 ‘기자 스터디’를 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때 같이 스터디를 하던 친구가 나에게 “사회, 경제, 정치 기자를 하고 나면 편하게 쉰다는 느낌으로 스포츠에 발령이 난다고 하더라. 스포츠 기자는 경쟁도 덜하고 좀 쉽다더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래서 기자로 취직을 한다면 언젠가 한 번은 스포츠 기자가 되어볼 수 있겠군 이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했다. 스포츠 기자는 편하다는 엄청난 오해가 생겨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하루아침에 나는 만 23살, 지금 생각하면 한참 어린 나이부터 야구기자가 돼 있었다. 그것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이름을 수식어로, 때로는 꼬리표로 달고 살아갈 줄은 몰랐다. 그 기간 동안 좋은 일도, 웃을 일도, 나쁜 일도, 슬픈 일도, 이상한 일도 참 많이 겪었다. 선배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10년 전 일은 이제 가물가물해질 때가 됐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꿈의 직업일, 누군가에게는 하루하루가 치열한 전쟁터일 야구계에서 10년간 겪었던 일들을 조금은 이를지 모르지만 이야기 보따리들로 조금씩 풀어내 볼까 한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기자에 대해 실망할 수도,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건 내가 직접 보고 겪고 느낀 일들이다. 내 글을 통해 야구기자에 대한 선망이나 선입견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프롤로그를 조금 털어놓자면 시작은 미약했다.
야구팀 기자를 뽑아서 이력서를 넣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를 뽑아주신 분들께 너무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저 어디선가 사람을 뽑길래 지원했다. 1년간의 취준 기간에 지치고 지쳐 그렇게 영혼을 담아 넣은 이력서를 쓰지는 못했다. 사실 그분들은 이미 아셨을 수도 있다.
면접은 당시 국장님이 봤다.
나와 2인 1조로 같이 본 사람은 지금도 잊지 못할 이름이다.
덩치가 산 만한 사람이 내 옆에 앉아 면접관의 자기소개 질문에 "안녕하세요 이대호입니다"라고 했으니 말이다(실명토크 미안해).
우리는 투수의 세이브 요건 등 여러 가지 야구 규칙이나 현안 등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아는 데까지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필기시험 주제는 류현진의 해외진출 성공 가능성이었다.(이 질문을 놓고 보니 새삼 옛날 이야기를 쓰는 느낌이긴 하다)
우연히도 이날 면접을 보러 가면서 지하철에서 류현진의 해외 진출에 대한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류현진의 체인지업과 피홈런 상관관계를 다룬 그 기사 내용을 참고해 썼다. '류현진의 직구는 메이저리그 투수들과 비교하면 빠르지도 않고 강한 편도 아니다. 이 때문에 주무기인 체인지업을 잘 활용해야 한다. 체인지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메이저리그의 힘센 타자들에게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체인지업 제구력이 관건'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기사를 썼던 어느 선배에게 감사하다. 아.. 감사한 게 맞나.
그리고 같이 시험을 본 이대호 씨는 영어, 나는 일본어 기사를 번역하는 시험도 있었다. 왜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했을까 머리를 쥐어박아가며 '손수건 왕자' 사이토 유키에 대한 기사를 한국어로 옮겨 썼다. 사실 당시에는 일본에서 쓰는 야구 전문용어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글이 굉장히 엉망진창이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직구’를 뜻하는 ‘まっすぐ’를 다 ‘똑바로’라고 번역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회사에 제대로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없어 대충 맞는 것 같다고 넘어갔다는 뒷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며칠 뒤 나는 지하철에서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전화를 기다리는 사이에 야구기자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당시 대기업 최종 면접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용감하게도 그 기업에 '내가 만약 최종 합격을 했다면 나를 떨어뜨려달라.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메일을 보내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땅을 치며 후회한 적도 있지만 그때만큼은 왠지 나에게 야구기자는 찰떡같은 일이라는 착각이 단단히 들어 있었다.
이틀 뒤 회사에 출근을 했더니 그 산만한 이대호라는 사람이 내 유일한 입사 동기였다. 다행히도 이때부터 시작된 고달픈 인턴기자 생활을 버티게 해준, 친절하고 살가운 오라버니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긴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가족들끼리도 서로 인사하고 지내는, 그야말로 '찐 동기'다.
첫 출근날 국장은 우리에게 당분간 내부에서 교육을 받으며 적응하고 한 달 뒤쯤 현장에 투입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첫날부터 바로 우당탕탕 기자 생활이 펼쳐지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