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의 뚝순이
단언컨대 기자 일의 꽃은 인터뷰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의 종류는 많다. 사실 내가 처음 기자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낀 것은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직업이라서다. 하지만 특히 스포츠 기자에겐 ‘사실 전달’이라는 의무 뿐 아니라, 자신의 기사에 색깔을 입혀줄 수 있는 것이 인터뷰라고 생각한다.
사실 야구기자들은 하나의 경기를 보고도 수십 개의 기사를 쓸 수 있다. 보통 경기 3시간 전에 야구장에 출근하는 기자들은 경기 전 양 팀 감독의 이야기, 팀별 특이사항, 라인업, 엔트리 등말소 등을 쓰고 경기가 시작되면 선발투수, 홈런, 특이 기록, 승패 스트레이트, 경기 승부처, 수훈선수까지 기사로 만든다.
온라인 매체에서 일하는 야구기자는 하루에 적어도 10개 이상의 기사를 쓴다. 종이신문(지면) 기자들은 지면 특성상 채울 곳이 없으면 더 쓰지 않지만 최근에는 포털사이트 전송용 기사를 따로 작성하기도 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많은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그 많은 기사 중에 오롯이 나만의 기사는 없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조금씩 형식만 다를 뿐 누구나 그 장면을 보면 쓸 수 있는 기사다. 기자들이 처음 신입으로 입사했을 때 가장 먼저 훈련하는 것도 스트레이트 기사 쓰기다. 선배들은 육하원칙에 의거한 스트레이트 기사 틀을 가르쳐주고 이에 맞춰 쓰게 한다.
반면에 나만 쓸 수 있는 기사가 바로 선수와 일대일 인터뷰 기사다. 내가 만든 질문으로 인터뷰이의 독창적인 답변을 받아 나만의 기사 방향성으로 이끌면, 그것은 틀도 없고 따라할 수도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기사가 된다.
그리고 내가 인터뷰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또 있다. 데이터 야구의 시대를 맞아 요즘은 야구계에서 일하지 않아도 선수들을 평가하고 서술할 수 있는 ‘일반인 전문가’들이 많아졌다. 그들을 절대 낮추는 게 아니라 어느 때는 ‘이래서는 기자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만큼 뛰어난 글을 볼 때도 있다.
그때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해주는 것이 인터뷰의 힘이다. 그들에게 직접 어떤 경기에서, 그 상황에서 느끼고 배운 점을 직접 들어 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제는 선수 평가, 경기 후기보다 기자에게 더 중요한 것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됐다.
정식 인터뷰는 다른 선수였지만 나의 첫 일대일 인터뷰 상대는 잊을 수 없다. 상대가 잊을 수 없어서라기보다 상황이 그랬다. 아마 상대도 조금은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입사 후 몇 달. 인턴기자가 아닌 기사를 쓰는 로봇처럼 길러지고 있을 때였다. 매일 집에서 잠만 자고 나와 회사, 야구장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야구장에 출근하자마자 선배가 나한테 미션 하나를 내렸다. 전날 주루를 하다가 무릎을 다친 타자가 있었는데 오늘 출장할 수 있는지 컨디션을 물어보고 기사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 선수가 아픈지, 오늘 경기에 나설 수 있는지도 팬들에게는 중요한 체크 사항이기 때문에 큰 기삿거리였다.
나는 그 정도야 뭐, 라는 생각으로 당당하게 선수에게 다가갔지만, 슬프게도 약간은 무서운 인상이었던 그 선수 1미터 앞에서 쪼그라든 나였다. ‘부상 때문에 짜증나는데 기자가 귀찮게 하네’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나는 온갖 부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리면서 그 선수에게 다가갔다.
한껏 긴장한 내 입에서 나온 질문은 "오늘 등판 가능하세요?"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타자였던 그 선수는 '왜 나한테 등판을 묻지'라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아직 정식 KBO 야구기자 AD 카드도 나오지 않은 내 처지를 알아챈 것인지 센스 있게 "네 나갑니다"라고 답해줬다.
덕분에 나는 기사를 쓸 수 있었지만 말거는 김에 물어보려 했던 다른 질문들은 미처 꺼내지도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기자실에 돌아와야 했다. 부끄러움은 덤이었다. 그 뒤로는 인터뷰를 할 때 정말 준비를 잘해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런데 내가 신경을 아무리 써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2012년 아시아시리즈가 부산에서 열렸다. 나는 아시아시리즈 내내 부산으로 출장을 가서 취재 중이었다. 나는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훈련 시간에 취재를 나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해도 어쨌든 기삿거리를 찾아야 하기에 일본 기자들 뒤에서 까치발을 들었고, 모르는 건 친절한 몇몇 기자들에게 다시 물어봤다. 그런데 나의 더듬더듬 일본어를 신기하게 받아들여준 일본 기자들이 사고를 쳤다.
일본 야구계의 '왕자'와도 같은 요미우리 주전 유격수 사카모토 하야토가 라커룸에서 뛰어나올 때 "이 기자가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외쳐준 거다. 나는 '이 사람들이 나를 언제부터 봤다고 사지로 몰아넣는 거지'라는 심정이었지만 어쨌든 ‘대어’를 물었기에 최대한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어떤 질문을 해야 하나 머리를 한참 굴릴 때였다.
"それで?(근데요?)"
사카모토의 한 마디는 찰나의 고민에 빠져 있던 내 머리 위로 떨어진 물 한 바가지 같았다. 나는 웅장하게 쏟아진 물세례에 온머릿속이 엉망이 된 채 인터뷰는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사카모토를 그라운드로 떠나보냈다.
사카모토는 쓱 쳐다보고 세 글자로 나를 제압한 거다. 역시나 일본 야구의 왕답게 일본 기자들은 아무렇지 않고 웃었다. 그 선수를 보고 "쿨하다" "역시 차갑다"고 말하는 일본 기자들은 그저 원망스러웠고 사카모토의 그 태도가 정말 짜증났다. 다시 태어나면 저렇게 ‘신’ 같은 존재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카모토처럼 인터뷰어가 아무리 열려있다 해도 인터뷰이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인터뷰는 성립하기 힘들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사카모토를 예로 들었지만 국내 선수들 중에서도 "근데요?"는 많다. "최근 타격감이 아주 좋은데요"라는 질문을 그렇게 받아치는 스킬. '나 인터뷰하기 싫은데'를 세 글자로 줄일 줄 아는, 아주 효율적 사람들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선수들을 마주치면 "어머나, 어떡하지. 나는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저들이 나를 거부하네"라는 생각으로 패닉에 빠졌지만, 지금은 "아 예. 그럼 가세요. 당신만 선수인가요"라는 문장을 눈인사로 전한다. 그리고 다른 선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너만 효율성 있냐. 나는 말로 꺼내기도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