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기자 Jun 01. 2022

2. 시집이나 가야겠네

야구장의 뚝순이

두근두근 입사 첫날이었다. 6월인데도 정장을 입고 긴장하면서 앉아 있었던 탓에 매우 더웠다.


그렇게 선배들 눈치를 보면서 앉아만 있는 것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는데 나이 지긋한 선배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출근 이후 나의 행적을 재빠르게 되돌아보며 바짝 긴장했다.


그 선배는 나를 쭉 훑어보더니 시크하게 한 마디를 던지고 갔다.

"너 앞으로 치마 입고 나오지 마라"


정장 투피스는 당시 여성 취준생의 정석과도 같은 옷인데, 내가 설마 그것 때문에 선배에게 혼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야구장에 출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알았지만 야구장에서 여기자는 치마나 7부 이상 바지 등을 입지 못한다. 신발도 구두는 지양해야 하고 주로 운동화가 허용된다. 야구장 내의 이상한 불문율이다. 


당시에는 ‘여자의 살을 보면 남자 선수들의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안되는 성차별적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실제로 나는 장마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날 젤리슈즈를 신고 갔다가 어느 선배에게 '발가락이 보이는 신발을 신으면 어떡하냐(?)'며 혼난 적도 있다. 여자의 맨살이 무조건 ‘에로틱’으로 여겨지다니. 정말로 201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현재는 그래도 야구장 내 성감수성이 높아진 덕분에 더이상 그런 괴담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불문율은 조용히 이어져 오고 있다. 가끔 아주 더운 여름에 긴 치마를 입거나 반바지를 입는 선배(연차의 차이가 용감성을 만드는 걸까)들이 있는데 나는 그 문화가 반박 없이 받아들여져 자연스러워지길 속으로만 조용히 응원한다.


하지만 2010년 초반에만 해도 우리 부서에 여자는 나 혼자였고 남자 선배들은 그 불문율을 대충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자세한 룰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눈치껏 야구장에서 여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찾아가고 혼나가며 조금씩 배워나가야 했다.


입사 첫 날 난관은 끝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문화가 됐다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반론 없이 '기자=술'이었다.

첫 출근날 국장, 부장, 차장 선배들과 점심에만 소맥 3잔을 마시고 (내 치사량은 맥주 2잔이다) 사무실로 돌아와 입사 동기와 함께 기사를 썼다... 취한 상태에서 무려 영어를 번역해 해외 외신 기사를 써내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안되겠으면 말해라. 너희 말고도 일할 사람이 널렸다. 연락만 하면 된다’는 선배의 말이 뒤에서 꽂히며 술 해장을 도와줬다. 우리는 입사 첫 날인데, 설마 이건 연습용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혼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정신을 차려가며 영어를 읽고 한국어로 바꿔 썼다. 


그런데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기사가 포털사이트에 송출돼 있었다. 물론 정갈한 맞춤법과 기승전결 같은 건 소맥 3잔이 내 몸에서 해독되는 사이 같이 날아가 있었다. 기사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인데다 잘 알지 못하는 메이저리그 이야기라서 기사 진행도 어색했다. 여기에 오차 없이 계산해야 하는 달러 환산까지 잘못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일단 기사에 욕 박힌 댓글이 달린 것은 물론이고 나 스스로가 너무 창피했다.

이런 예측불가능한 회사.


선배는 껄껄 웃으며 "원래 욕먹어가면서 배워야 실력이 빠르게 는다”고 기사를 포털사이트에 송출한 이유를 알려줬다. 매우 원망스러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제대로 기사를 써야 한다는 것을 그때 몸으로 정확하게 익혔다. 이후로는 손이 다쳐도 집중이 안되는 상황에서도 오타 없이, 비문 없이 기사를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분명히 당분간 내부 교육 후 현장 투입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입사 이틀 만에 사수 선배를 따라 잠실야구장 현장으로 출근했다. 입사 하루 만에 ‘이만하면 됐다’라니. 융통성이 넘치는 회사였다.


내 앞에 펼쳐진 '프로야구의 성지' 잠실야구장.


그동안 TV로만 봐왔던 선수들이 내 눈 앞에서 훈련을 한다는 신기함은 3초 만에 깨졌다. 

선배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를 데리고 다니며 인사시키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편하게 공부하기 위해 머리를 바가지로 짧게 짤라 내가 더 어려보였나보다. 선배들은 비교적 젊은 내 나이에 더 놀라며 이 아이가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지를 걱정했다.


나는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지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면서 선배들 이름과 얼굴을 외우기 바빴다. 첫날에는 회사 선배들을 외워야 했는데 잠실을 가보니 온갖 회사의 선배들이 다 취재를 위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이 선배들을 하루만에 다 외울 수 있을까. 그렇게 내 멘탈이 탈탈 털리고 있을 무렵 한 선수를 마주쳤다.


"인사해 ㅇㅇㅇ 선수야"

"안녕하세요 새로 들어온 인턴기자입니다"


지금까지 인사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수고하세요’ ‘반갑습니다’ 라는 뻔한 대답들을 기다린 것이 무안하게 그 선수가 한 마디를 날렸다.


"그 성격으로 무슨 기자야. 시집이냐 가야겠네"


취업준비 1년. 백수에게는 영겁 같던 시간을 지나 겨우 직함이라는 걸 얻었는데.

내가 왜 시집을 가야 하지? 내 나이 만 23살에?

갑작스러운 시집 공격을 받은 내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짓는 걸 알았는지 그 선수가 한 마디를 보탰다.


"그렇게 수줍어해가지고 기자 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래. 못 하지"


그때 나는 알았다. 이 선수가 나를 꿰뚫어봤다는 걸. 나는 사실 여대를 나왔고 남자들의 세계와는 먼 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야구장에 나와 보니 나와 소수의 여기자, 소수의 여성 프런트 직원을 제외하고는 더그아웃, 기자실이 모두 남자의 세계였다. 거기서 버틸 ‘깡’이 필요한데 그저 수줍은 나에게서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날 밤 집에서 와 방에 누워서 생각했다.

진짜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이 일이 뭐길래? 왜 이 성격으로는 못하는 거지?

아닌 것 같으면 하루라도 빨리 도망가는 게 좋다던데 나도 그렇게 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성격으로도 기자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할까.


나는 사실 전자 95%, 후자 5%의 비중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무슨 바보 같은 느낌이었는지 후자를 택하기로 결정하고 밤샘 고민을 마쳤다.

버라이어티 하고도 스펙터클한 나의 야구기자 생활은 그날 밤 했던 5%의 생각 때문에, 덕분에 10년을 넘게 이어지고 말았다.


참고로 그 시크한 멘트를 던졌던 선수는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중에 은퇴하고 만난 그에게 나중에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자

"내가 진짜 진심으로 한 충고였네. 나 밖에 없다 정말"이라고 받아쳤다.


네.. 감사했는데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전 02화 1. 우당탕탕 야구기자의 서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