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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자 Jun 01. 2022

7. 아가씨 나오세요!

야구장의 뚝순이

전체 야구기자 중 여기자는 약 10% 정도라는 것이 내 예상이다. 여기에 각 구단 프런트까지 합치면 야구장에서 일하는 직원 중 여성은 10%가 채 안 된다. 

 

한때는 여기자를 뽑는 것이 매체들의 ‘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여기자라면 더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여자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원자들도 많아졌다. 최근 2년 사이에 야구기자를 뽑으면서 남자 대 여자의 지원 비율이 거의 5 대 5에 가까워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야구를 포함해 스포츠 매체로 범위를 넓혀보면 여전히 많은 곳에서 남기자들이 훨씬 더 높은 비율로 뽑히고 있다. 구단 직원 중에서 홍보팀, 마케팅팀에는 여성 직원이 많이 생겼지만 여전히 전원 남자인 선수들을 대하는 운영팀 직원들은 대부분 다 남자다. 선수를 시작으로 기자, 프런트까지. 야구장은 굉장히 남자들의 세상이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일들이 남자들 위주로 돌아간다. 야구장에 여자 화장실이 늘어간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특히 관계자들이 출입하는 구장 1층 사무실, 선수단 라커룸 쪽에는 여자 화장실이 없거나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최근 지어진 신식 야구장 정도가 깔끔한 여자 화장실을 구비하고 있다.

 

화장실 뿐 아니라 선수들이 야구장에서는 편한 차림으로 다니는 편이다.  10년 사이에 여성들의 비율이 늘면서 라커룸 밖에서는 항상 옷을 단정히 입고 다니지만 약 10년 전만 해도 더그아웃에서 옷을 갈아입는 경우도 흔했다. 

 

낙후된 야구장에는 원정 라커룸이 크지 않아 선수들이 옷을 갈아입을 데가 마땅치 않았다. 요즘도 아마추어 선수들은 라커룸이 아니라 더그아웃에서 주로 옷 매무새를 추스른다. 여기자들은 그 길을 피해서 돌아가거나 고개를 돌려서 최대한 빨리 지나가는 것이 무언의 예의.

 

아직 전국의 야구장들이 리모델링을 제대로 마치기 전쯤, 나는 한 지방 구장에 출장을 갔다가 경기 후에 원정 더그아웃 쪽으로 선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뛰어갔다. 원래 경기가 끝나면 기자들이 다 대표 수훈 선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인터뷰룸이나 더그아웃 한쪽에 모이는데 나는 그 경기를 유심히 보고 있던 회사 선배의 '특명'을 받고 다른 선수를 만나야 했다. 

 

선수가 이미 짐을 싸고 갔을까봐 부랴부랴 더그아웃으로 내려갔다. 내가 만난 선수는 아직 더그아웃에 남아 있었다. 그 선수는 짐을 주섬주섬 싸면서 내 질문에 대답하다가 "혹시 저쪽으로 가면서 인터뷰하면 안 되냐"며 원정 라커룸 쪽을 가리켰다. 나는 라커룸 앞까지만 가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하면서 같이 걸어갔다.

 

그때였다. 한 지긋한 코치님이 멀리서 "아가씨! 아가씨! 거기 나오세요!"라고 소리치며 펄쩍 뛰어왔다. 깜짝 놀란 나와, 내가 기자인 걸 알아차린 그 코치가 당황한 사이 그 선수는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코치는 기자인지 뭔지 모르고 일단 젊은 여자가 라커룸 쪽으로 들어가려 하니 막은 거다.

 

나중에 구단 직원이 코치의 사과를 전하며 사정을 설명해줬다. 알고 보니 그 구장은 더그아웃에서 몇 미터도 안 돼 바로 선수 샤워실이 있다고 한다. 선수들은 대부분 샤워실 문을 열고 라커룸을 오갔기 때문에 내가 몇 발자국만 갔다면 선수들의 나체를 봐야 했다. 

 

아마도 그 선수는 그것을 노리고 나에게 장난을 친 게 아닌가 싶다. 아가씨라는 호명도, 나를 이끌려 했던 장난도 모두 기분이 나쁠 뿐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다음부터는 무조건 먼저 피하는 게 도리였다.

 

더 심각한 일이 2019년에 오고야 말았다. 그해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선발투수로 뽑히면서 나도 현장 취재 차 미국행 길에 올랐다. 올스타전을 본 뒤 류현진이 선발등판하는 다저스의 보스턴 원정을 따라 갔다 돌아오는 것이 내 임무였다. 

 

메이저리그는 라커룸 개방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어 류현진을 보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맞춰서 다저스 라커룸에 가야 했다. 그리고 그 라커룸에는 류현진뿐 아니라 다른 다저스 선수도 있었다. 모두가 벗은 채.

 

다저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프런트 중 라커룸 안쪽 샤워실에서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나온 건 딱 2명. 마에다 겐타와 류현진이었다. '아시안 샤이 가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가 '당당하게' 나체를 드러내고 돌아다녔다. 겨우 가릴 곳만 가리고 인터뷰를 하거나 라커룸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 포커를 치는 선수들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부끄러워하는 여기자나 여자 리포터가 있으면 더 짓궂게 앞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차마 고개를 많이 들지 못하고 동공 초점을 흐리게 한 뒤 류현진만을 찾아 직진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살색들의 향연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류현진을 취재하러 왔기 때문에 한 팀만 방문하면 되는 것이 참 다행이었다. 다저스 라커룸 첫 방문 날 나는 남편에게 전화해 "커쇼의 엉덩이를 보고 말았다.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왠지 사과해야 할 것 같은 일이었다.

 

한때 국내에도 라커룸 개방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문화가 달라서인지 몇 년째 통과되지 않고 있다. 아마 선수든 기자든 한국 야구계 마인드가 굉장히 오픈돼야 가능할 일일 것 같다.

 

내가 기자가 되기 전 시절에는 여기자의 더그아웃 출입을 막고 '음기'를 피하는 코칭스태프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몇몇 여기자들이 계속 싸워나간 덕분에 현재 아무 제약 없이 더그아웃을 들어갈 수 있게 됐다(코로나로 다시 막혔지만). 


나 역시 "여자가 어디"라는 시대착오적인 단어를 야구장에서 처음 들어보기도 했다.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심하게 보수적인 KBO리그. 그리고 심하게 오픈된 메이저리그그 중간 어딘가에서 평화롭게 취재할 날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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