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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자 Jun 01. 2022

8. 기사 때문에 은퇴합니다

야구장의 뚝순이

기자로서 취재를 하다 보면 단독 욕심이 날 때가 있다. 야구계 수백 명의 기자들 중에 한 정보를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됐다는 쾌감은 생각보다 짜릿하다. 그리고 고민에 빠진다. 이것을 남들보다 빠르게 쓸 것인가. 아마 야구계가 아니라 모든 기자라면 단독 기사라는 유혹을 쉽게 지나치기 힘들 것이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단독 기사는 독려되는 편이다. 좋은 단독 기사를 쓴 기자들은 기자상을 받기도 한다. 

 

좋은 조건에 이적을 한다든지, 가볍게는 결혼, 연애 같은 선수에게 이로운 정보는 기자도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해당 선수가 써도 된다고 허락만 하면 더욱 고민의 가치가 없어진다. 냉정하게 말해 단독을 달 가치가 있는 선수인가 하는 판단의 문제만 남는다. 유명한 선수다? 화제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선수가 써도 된다고 한 정보다? 이건 못 먹어도 '고'다.

 

문제는 그다지 유쾌한 정보가 아닐 때다. 대부분의 단독 기사는 탐사 보도나 고발이 많고, 결국 해당 선수나 구단 등 취재원에게는 그리 긍정적인 일이 아니다. 그럴 때 단독 기사로 취재원을 고발하느냐, 그 취재원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조용히 넘어가느냐는 기자의 가치 판단에 달렸다. 스포츠에서는 사회 고발성 기사가 많지는 않다. 선수 이적, 은퇴, 입단 등 개인의 향방이 중요한 경우가 많다.

 

몇 년 전 한 팀을 취재하던 중 새 시즌 코칭스태프 정보를 들었다. 그런데 명단 중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아직 현역 선수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코칭스태프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것은 곧 그 선수의 은퇴를 뜻했다.

 

나는 팀에 사실 정보를 확인했고 그 선수가 은퇴를 한 뒤 코치로 새 시작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침 일찍 선수의 은퇴, 그리고 새 야구 인생 시작에 대한 단독 기사를 썼다. 그런데 그 기사가 한 선수의 인생을 바꿔놨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날 오후 야구장에 나갔더니 역시나 그 기사가 화제였고 나는 마냥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진 인터뷰 요청에 응한 그 선수, 이제는 전 선수가 된 그분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침까지 은퇴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정하게 됐네요"

 

그 선수는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던 것이다. 구단의 은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할 경우 이적을 하든지 다른 루트를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기사로 그 선수를 '강제 은퇴'시켜버린 셈이 됐다.

 

그 선수는 코치가 됐지만 얼마 뒤 독립리그에서 한 번 더 도전해보겠다며 은퇴를 '번복'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당분간 '단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됐다. 내 기사가 한 사람의 인생길에 마음대로 좌표를 찍을 수 있다는 것. 나에게는 기자로서 신념을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반면에 선수가 단독 인터뷰를 요청할 때도 있다. 음주운전으로 징계를 받았다가 팀을 떠나게 된 한 선수가 하루는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사고는 쳤지만 구단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크다. 그만큼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도 너무 큰데 그동안 나서서 사과를 하질 못 했다. 팀을 떠나기 전에 팬들에게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달라"

 

나는 그 선수의 진심어린 사과를 단독 와이드 인터뷰로 길게 실었다. 그 선수가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다 담으려고 했다. 많은 팬들이 그 기사를 읽은 덕분에 그날 이후로 그 선수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바뀐 것으로 안다. 

 

반면에 "사고 친 선수를 왜 '실드'치냐", "너도 한통속이냐" 하는 항의 메일도 많이 왔다. 나 역시 그 인터뷰를 왜 내가 써야 하는지, 쓰는 게 맞는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선수의 말이 너무나도 진심이었다. 팀에서 쫓겨나듯이 떠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다. 기사가 나간 뒤 그 선수는 너무나도 마음 후련하다며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 선수와는 여전히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다.

 

약간은 귀여운 선수도 있었다. 하루는 밤 12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한 선수가 개명 후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름을 바꾸면 최대한 빠르게 널리 알려야 된대요".

따지고 보면 '미신'을 믿는 그 선수가 귀엽고 웃겼다. 그럼에도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이름을 바꾸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기에 밤 12시에 온 전화를 거절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기사는 많이 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필요할 때 생각난 기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나라는 것. 선수와 기자의 공생 관계는 그럴 때 빛을 발한다는 점에서 뿌듯한 기사였다.

 

이처럼 단독 기사는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그 단독 기사를 얻기 위한 정보 싸움도 치열하다. 평소에 취재원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두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기삿거리를 캐내는 노하우도 있다.

 

A라는 선수에 대한 정보를 A에게 들으려고 하면 오히려 그 선수는 숨기는 것이 먼저다. B라는 팀에 대한 소식을 B팀 관계자들에게 듣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야구기자들 사이에서는 B팀에 대해 알려면 C팀, D팀에 물으라는 불문율이 있다. 다들 다른 팀 소식들은 빠삭하게 알고 있고 기사 출처에 대한 부담감도 적기 때문에 당사자들보다는 잘 알려준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너무 멀리서 들으면 왜곡될 때가 많다. 한 번은 담당팀 감독이 팀을 떠나고 공석이 됐다. 열심히 후속 감독 물망에 오른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는데 회사 선배가 “C라는 인물이 후속 감독”이라며 나에게 단독 기사를 빨리 쓰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99.9%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소용 없었다.

 

결국 나는 그 기사를 썼고 구단은 오보라고 밝혔다. 실제로 오보였고 전혀 다른 인물이 감독이 됐다. 담당기자가 아닌 다른 이가 애먼 곳에서 듣고 온 정보를 믿고 기사를 쓴 나도 문제였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오보 기자’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를 결국 얻어버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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