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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자 Jun 01. 2022

10. 야구기자가 가장 '꿀렁꿀렁'한 곳

야구장의 뚝순이

10년간 야구기자를 하면서 취재를 위해 많은 곳을 가봤다. 각 야구장은 물론이고 서울의 호텔들(오해 마시라. 기자회견 때문이었다)을 섭렵한 나지만 일하러 가면서 괜스레 설레는 곳이 있다. 

 

바로 ‘하늘의 문’ 공항이다.

 

코로나 시대 전까지는 매년 1월 말 선수들이 해외 전지훈련을 위해 출국하고 3월 초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했다. 해외파 선수들은 매년 1월 초 개인 훈련과 해외 팀 전지훈련을 위해 공항으로 향한다. 이 때문에 야구기자들은 매년 주기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김포공항, 혹은 인천공항에 자리를 잡고 취재를 한다. 국가대표 출입국도 있다. 

 

공항철도나 버스를 타고 특히 인천공항에 도착해보면 우리만 빼고 모두가 행복한 여행객들이다. 여행의 설렘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이들 가운데 피곤에 찌든 기자들이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거나 바닥에 앉아 기사를 쓰고 있다. 날씨라도 좋아서 공항이 푸르게 비치는 날에는 더 ‘센치’해진다. 공항에 도착해 그대로 해외로 떠나고 싶은 꿀렁꿀렁한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해야 한다니, 말 그대로 가혹한 일이다.

 

공항에서 전지훈련을 위해 출국하거나 귀국하는 선수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느 카운터인가에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다면 바로 그곳으로 가면 된다. 선수들은 출입국 때는 팀을 대표하기 때문에 항상 정장 차림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한 팀에는 그 팀을 담당하는 여러 명의 기자들이 기 때문에 구단에서 감독, 대표 선수들의 인터뷰 자리를 알아서 마련해준다. 만약 팀마다 시간대가 달라서 하루에 세 팀이 아침, 저녁, 저녁으로 출국할 경우 담당팀을 떠나 그냥 공항 당번을 맡은 한 명이 하루종일 취재하는 경우도 있다.

 

국가대표 같은 경우는 워낙 많은 기자들이 몰려온다. KBO가 대표로 인터뷰 자리를 만들면 방송기자, 취재기자가 한 번에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룬다. 한 번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단체 티케팅을 구경하러 카운터로 갔다가 선수들의 티켓 발권을 도와주고 있는 대학교 친구를 만나 서로 신기해한 적도 있다.

 

한편 공항에서 취재할 때 취재기자들은 크게 문제가 없지만 방송기자나 사진기자들은 모두 미리 공항 보안직원에게 등록해야 한다. 공항의 보안직원들은 허락 없이 공항을 오가는 승객들이나 직원, 공항 시설을 찍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전 등록이 필수다. 최근에는 사진기자 못지 않은 전문가용 카메라를 든 팬들도 보안 직원에게 등록하는 경우를 몇 차례 봤다. 

 

일반 대중들은 야구선수들의 동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기자들이 우르르 몰리면 연예인인 줄 알고 같이 구경할 때가 있다. 매번 입국 게이트에서 사진, 영상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으면 한 번도 빠짐없이 누군가가 와서 “연예인 와요?”라고 물어본다. 그때 “선수 OOO이요” 혹은 “프로 팀이요”라고 대답하면 대부분 “에이”라며 실망하고 고개를 돌리는 웃지 못할 광경도 펼쳐진다. 야구가 조금 더 유명해져야겠다는 사실을 공항에서 몸으로 느낀다.

 

보통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취재를 하지만 귀국하는 선수들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대부분 미국에서 귀국하는 선수단이다. 예전에 미국발 비행기가 하도 빨리 와서 공항 직원에게 물어보니 미국에서 오는 비행기는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북서풍을 타기 때문에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올 때가 많다고 한다. 때를 놓치면 공항에서 아무리 뛰어가도 선수들이 이미 떠나버리고 없다. 

 

30분 정도 늦었더니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선수 2~3명만 남아있을 때도 있었다. 당시 너무 당황해서 구단 버스를 타고 떠나는 감독과 전화 인터뷰를 한 뒤 인터뷰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처음 고백한다. 나도 어린 시절 몇 번의 실수 후 도착 시간보다 1시간은 일찍 다니는 편이고 다른 기자들 역시 취재 시간은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번은 특정 구단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 때였다. 전지훈련 동안 좋지 않은 일이 있던 구단의 귀국을 취재하러 갔다. 공항 입국장에서 기자들을 맞이하던 구단 홍보팀 직원들은 선수들이 B 출구에서 나온다며 기자들과 함께 B 출구에 서 있었다. 

 

그런데 국장 문이 살짝살짝 열리는 걸 보고 있자니 수십 명의 '정장 차림' 선수들이 D 구 쪽으로 슬슬 걸어가고 있었다. 구단이 기자들을 속인 거다. 기자들은 홍보팀을 째려보며 미친 듯이 D 출구로 뛰어야 했다. 먼저 움직인 선수들은 대부분 밖으로 나갔거나 침묵으로 일관해 취재 허탕을 치게 했다.

 

기자들은 분노를 담아 하나같이 '침묵의 귀국'이라는 기사를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언급을 피해야 하는 구단, 선수들과 어찌 됐든 입장을 들어야 하는 선수들의 기 싸움이 공항에서 벌어진 순간이었다.

 

그나마 입국 시간을 알고 있을 때는 어디서 기다려야 할지 안다. 선수가 언제, 어디로 오는지 모르고 공항에 갈 때는 훨씬 심난하다. 그 넓은 인천공항에서 취재원이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기자들은 이를 '뻗치기'라고 부른다. 공항에서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매고 목표물을 찾아 하염없이 돌아다니는 일은 매우 피로하다. 놓치면 큰일이다 싶은 긴장감과 압박감까지 더해진다. 인천공항에 제2터미널이 생겼을 때 야구기자들이 한숨을 토해냈다는 건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한 사실일 거다. 

 

한 번은 어느 연말 한 선수가 외국 팀과 계약한다는 '첩보'를 들은 뒤 새벽 첫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내가 아는 것은 출국 날짜 뿐이었다. 인천공항은 너무도 넓기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공항으로 가면서 이 선수가 어느 항공사 비행기를 탈 것인가, 어느 등급 좌석에 앉을 것인가 동행한 사진기자와 함께 끊임없이 생각을 했다. 

 

당시의 도박은 다행히도 맞아떨어졌다. 그곳에서 줄 서있던 선수 뒤로 다가가 등을 두드렸을 때 선수의 놀란 표정은 아직도 기억한다. 몰래 출국하고 싶던 선수에겐 정말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겠지만, 기자로서는 무조건 취재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 선수는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계약을 하면 단독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계약을 하더니 호텔에서 거하게 기자회견을 열어버렸다. 조금은 얄밉지만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행복을 빌어줬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아쉽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보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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