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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자 Jun 01. 2022

12. 어떤 선수랑 제일 친해요?

야구장의 뚝순이

친구 모임에서, 소개팅에서, 심지어 미용실에서내 직업이 야구기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떤 선수가 제일 착해요?"다. 사람들은 멀리서 보는 선수들의 진짜 모습을 많이 궁금해한다. 그리고 나면 "어떤 선수랑 제일 친해요?"라는 질문 나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착하다’의 의미 만큼이나 '친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굳이 쓰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착한 사람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친하다 역시 기준이 모호하다. 특히 야구계 뿐 아니라 스포츠 전체에서 해당되겠지만 기자와 선수 사이의 친하다는 의미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묘하다. ‘불가근 불가원’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는 걸 볼 때 어쩌면 언론계 전체에서 기자와 취재원 사이에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다.

 

친하다는 걸 뭘까. 사적인 고민까지 나누는 사이?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 지나갈 때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이? 어떤 사이가 친한 사이일까. 10년을 넘게 일하면서도 친한 선수가 누군지, 야구계에서 친하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모르겠다. 어떤 선배들은 선수들과 밖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같이 방송 매체에도 출연한다. 그런 것이 친한 사이라면 나는 아직 친한 선수가 없다.

 

기자를 갓 시작했을 때 한 선수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다가 한 선배기자를 보고 "어제 기사 보고 아내가 좋아하더라. 고마워" 라는 말을 했다. 선수와 기자가 반말을 하다니, 아내 이야기를 하다니, 기사를 보고 고맙다는 말을 하다니. 아직 내 이름을 아는 선수도 없던 나에게는 '신계'처럼 느껴진 대화였다. 

 

나는 아직도 그 선배와 그 기자와 그 장소를 뚜렷하게 기억한다. ‘저런 기자가 되고 싶다’는 롤모델이 처음 생겼기 때문이라서일까. 나도 그렇게 선수들이 격없이 다가와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나도 담당팀이 생기고 담당팀의 선수들과 안면을 트면서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가 생겼다. 그때는 마치 내가 그 선수들처럼 유명해진 것 같아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선수들이 "기사 잘 봤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도 하고, 야구장 앞 카페에서 만나면 커피 한 잔 사주고 갈 때, 가까워진 사이를 실감했다. 

 

한 선수는 특히 내가 친해지고 싶어 많은 노력을 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에 하나라도 더 잘 써주고 싶고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여자인 내가 남자 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상해보였나보다. 한 홍보팀 직원은 나에게 “혹시 그 선수 이성으로 좋아하시는 거 아니죠?”라고 물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선수와 친해지는 건 여기자에게는 이만큼의 벽이 또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어느새 내 휴대전화에 차곡차곡 쌓이는 선수들의 전화번호는 야구팬 친구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야구를 좋아하는 부모님에게는 내가 자랑거리가 됐다. 내가 통화하고 문자하는 선수가 유명해질수록 나도 같이 유명해진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리고 친한 사이는 쉽게 '배신'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한 선수가 나에게 매우 화가 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 전날 부진했던 그 선수에 대한 기사를 쓰기는 했지만, 많은 기자들이 같은 날 비슷한 기사를 썼기 때문에 유독 나에게 화가 난 이유를 딱히 찾지 못했다. 

 

그보다 나는 그 선수와 ‘기사 하나’로 사이가 틀어지기엔 친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몰래 같이 구단 흉을 보기도 하고 가끔은 사적인 이야기도 건넸다면 친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당황한 나는 다른 선수를 통해 이유를 좀 알아봐 달라 했다. 나의 부탁을 받은 수는 다음날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네가 그럴 줄은 몰랐대".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이일수록 멀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다른 기자는 친하지 않아서 기사가 덜 아프게 느껴지고 자신을 감싸줄 줄 알았던 나의 비판은 더 아프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선수와 친하다는 것에는 무게가 있다는 걸 배웠다. 그동안 내가 부러워했던, 많은 선수들과 친한 기자들은 비판 기사를 쉽사리 쓸 수 없는 고충이 있다는 것도 이때쯤에서야 알았다. 

 

그 뒤에도 많은 선수들과 인연을 쌓았고, 또 그만큼 기사 하나로 멀어졌다. 나에게만 속 이야기를 잘 털어놓는다고 생각했던 선수의 단독 인터뷰 다른 곳에서 나올 때는 서운하기도 했다. ‘저 선수는 내 선수’라는 말도 안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우물에서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게 애정을 쏟았던 선수가 인터뷰 중에 "질문 예의가 없다"며 나를 공격할 때는 눈물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몇 년을 알고 지내온 선수지만, 그 이후로는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됐다. 나는 ‘나의 노력’이라는 나무 중 아주 큰 가지 하나가 태풍에 꺾여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물론 선수들에게도 이유는 있을 거다. 기사 하나에 칭찬을 듣는 반면 기사 하나에 욕을 먹는 일이 다반사이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기사로 선수의 고과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팬들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프로 세계는 어느 정도 이미지도 중요하다. 선수들은 팬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생각보다 많이 민감하다. 그래서 어떤 선수들은 대놓고 인터뷰에 불만을 드러내거나 인터뷰 방향을 자기 마음대로 잡고 싶어하기도 한다.

 

언젠가 한 선수는 구단과 연봉협상 관련 기사 하나로 나에게 크게 화가 났다. 나는 당시 최대한 구단과 선수의 입장을 모두 반영한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구단 입장을 쓰는 부분에서는 선수에게 불리한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선수는 이후 화해하는 자리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우나에서 모르는 사람한테 갑자기 욕 먹어봤어요?". 

 나는 “설마 내 기사 하나 때문이겠냐”고 받아치긴 했지만 내 책임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모르는 대중들에게 사랑받아야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 선수들에게 그만큼 충분히 고충은 있을 터. 서운함을 조금은 누르고 다시 인사를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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