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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자 Jun 01. 2022

9. 텔레비전에 내가 나온다고?

야구장의 뚝순이

방송기자가 아닌 보통의 취재기자(이른바 pen 기자)가 방송에 얼굴을 비추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취재기자는 오히려 얼굴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 얼굴이 공개되기를 원치 않는 편이었다. 기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방송에 출연한 선배 기자들이 온라인에서 일부 팬들에게 '인신공격'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 마음을 굳혔다. 기자의 부실한 정보에 실망했거나 특히 스포츠 도박을 하는 이들에게 제공한 정보가 어긋난 예측일 때, 많은 이들이 기자의 정보를 찾아 분노를 터뜨리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한 선배의 가족 정보, 집 주소가 공개되는 것도 목격했다.

 

기자라면 말이 아니라 기사로 싸워야 한다는 한 선배의 이야기도 '기자뽕'이 차올라 있던 입사 초기의 나에게는 가슴 깊이 다가왔다. 그 선배는 TV에 나와 얼굴이 공개된 뒤 야구장에서 사진 촬영, 사인 등을 부탁받는, 이른바 유명세를 치르는 일부 기자들을 바라보며 나에게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기자가 사인할 곳은 카드 명세서뿐이다"

 

그리고 한 선수의 조언도 있었다. 한 번은 기자들이 나오는 토크쇼 출연 제의를 받았다. 선수들의 더그아웃 뒷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유명인도 출연하기에 신기해서 방송 출연을 고민할 무렵 그 선수 나에게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선수들은 기자가 방송에 나와서 야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자가 나와서 이야기하면 '해봤어?'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방송에 출연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어느 정도 받아칠 만큼 야구를 잘 안 뒤에야 출연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내 야구 지식이 충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하나의 출연은 예외였다. 몇 년 전 시각장애인 야구 팟캐스트에서 방송 패널을 맡아달라고 연락이 온 적이 있다. 시각장애인 PD와 시각장애인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야구 팟캐스트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야구를 알고 보는지' 궁금해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야구를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보는지를 알게 됐다.

 

그 팟캐스트에서 만난 시각장애인분들은 손바닥에 그라운드를 그려가며 야구를 배웠다고 했다. 그라운드가 다이아몬드 모양이라는 말조차 다이아몬드의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야 하는 시각장애인들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2~3배는 더 열심히 야구를 공부해서 팟캐스트에 임하고 있다. 나도 더욱 책임감을 갖고 출연했다.  물론 얼굴이 비추는 방송이 아니라서 부담감도 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갑자기 많은 TV 방송 제의가 왔다. 내가 몇 년간 담당했던 팀이 가을야구에 나가게 되고 유명해지면서 방송에서 그 팀을 다룰 일이 많아지자, 나에게 '방송에서 그 팀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다 거절했다. 그러던 중 오만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기자가 방송에서 그 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그 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기자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한마디로 ‘까도 내가 까고 싶다’라는 마음이었다.

 

그 뒤로는 제의가 오면 크게 자극적인 주제가 아닐 때 출연을 거절하지 않았다. 지상파, 케이블 방송을 가리지 않고 그 구단을 주제로 하는 방송에 한해 출연을 이어갔다. 나는 어느새 많은 이들에게 그 팀의 가장 유명한 담당기자로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나는 방송 출연에 맛을 들였다. “TV에서 잘 보고 있다”가 어느새 야구장에서 나를 보는 사람들의 단골 인사가 됐다.

 

엄마가 마음 아파하는 것을 알기 전까지 그랬다. 어느 날 엄마가 모든 야구 커뮤니티를 찾아 내 이름을 검색해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는 일부 팬들이 내 외모를 보고 공격하는 것까지도 모두 찾아보고 있었다. 야구장에서 나를 알아보는 팬들은 대부분이 “실물이 낫다”, “생각보다 젊다” 등 칭찬을 해줬지만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내 얼굴을 비하하는 것이 재미로 여겨지고 있었다.  

 

"우리 딸 원래 안 못 생겼는데 왜 그러지?"

 

엄마의 이 한 마디에 나는 다시 한 번 방송 출연 욕심을 접었다. 추후 생계를 이유로 방송에 나가기 전까진 말이다. 2017년 내가 무직으로 지내고 있을 때 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의가 왔다. 선배들은 “어디서라도 계속 얼굴을 비춰야 다시 취직할 기회가 있다”며 추천했고 나는 다시 방송인 생활을 시작했다.

 

또 한 번의 절망적인 일도 있었다. 올스타전에 대한 가벼운 토크라고 해서 방송 출연에 응했다. 알고 보니 출연자가 4명이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3명이 다 여자 아나운서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예쁜 아나운서가 모두 총출동했다. 나말고는 다 여자 아나운서라니! 나는 '오징어' 역할로 출연하는 건가?

 

녹화는 잘 마쳤지만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방송을 보지 못했다. 예쁜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대학교 졸업앨범 이후 처음 눈썹을 붙였으니 나에게는 아주 진한 화장이었다), 원피스를 입어달라는 요청 대신 여기자의 상징 같은 긴 바지를 입고 앉아 있는 내가 너무 없어보일 것 같아서다. 나에게도 예쁜 원피스를 입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것 또한 누군가에게는 놀림감이 될 것 같아 거절했다.

 

그 방송이 나간 뒤 많은 동료들이 농담처럼 '안 꿀렸다'고 방송평을 남겨줬다. 정말로 그럴까. 새 회사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뽑힌 날부터 내가 방송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남자 아나운서가 진행할 때만 패널로 나갔다.'여자가 동시에 2명 나오면 이상하다'는 게 이유지만 알고 있다. 건 날 위한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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